설교 모음
10/6/2024 | 세계성만찬 주일, 장학헌금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3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약속 Our Promises We Must Not Forget
고린도 전서 11: 23~29
이 시간 예배 드리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세계성만찬 주일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과 신앙 안에서 하나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네 가지 특징은 하나인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된 교회, 사도적 교회입니다. 이 속성 가운데 “보편적”교회는 모든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매주 사도신경으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바로 보편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바울의 교회론을 보면 유대 민족주의를 벗어나 이방인들을 향한 환대, 세상을 향해 열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문화, 헬라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던 사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성찬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교회가 주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며 하나님의 동등한 백성임을 고백하며 성만찬을 지켜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그 은혜의 자리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찬의 정신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 갑부였던 록펠러는 55세에 불치병 진단을 받으며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그로 인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최후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가던 중, 로비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라는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그는 마음에 전율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시 후 병원 한쪽에서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병원측에서는 병원비가 없어서 입원이 안된다고 했고, 환자의 어머니는 입원시켜 달라고 울며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비서에게 아무도 모르게 지불을 하도록 했습니다. 치료를 받았던 소녀가 회복이 되었고 록펠러는 자신의 자서전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나눔의 삶을 작정하고 제단을 세워 미국을 넘어 세계 각 지역에 도서관을 세우고,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선한 일에 더욱 힘을 쓰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선한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며 나누고 베풀 힘을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며 제자들에게 이 떡과 잔을 마실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정신은 내것을 나누는 삶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고,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계성만찬 주일을 장학헌금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 공부하는 다음 세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눔을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 줄 수 있고, 포기하려던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장학헌금 주일을 통하여 미국에 와서 학업을 이어가는 세대들이 꿈을 이루는데 귀한 씨앗이 되리라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매일 함께 공동의 식사를 나누고 그 끝에 성찬을 행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필요한 음식을 각자가 집에서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자나 노예의 신분인 성도들은 집에서 음식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서로의 마음과 뜻이 주안에서 서로 통했습니다. 당시 생명을 주는 삶의 이야기가 외부 사람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시선에 그들의 삶의 양식이 너무 차이가 났기에 궁금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사 교수인 알렌크라이더(Alan Kreider,1941-2017)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4세기 전까지 설교에 대한 어떠한 글도 쓰지 않고 기도와 성만찬 세례에 대한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4세기 전 남아 있는 설교문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관해 나누고 성경대로 살지 못한 죄를 고백하며, 내것을 내어주며 서로를 용서하고, 다름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말씀을 서로가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 성찬은 세상과 교회를 구별되게 하는 의식입니다.
바울은 성찬의 기원이 그가 만든 것이 아니며, 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전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한 이유는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주의 만찬이 일반 식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행하는 성찬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가운데 애찬(Love Feast)과 성찬(Eucharist)이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함께 모여 애찬을 나누며 성찬을 진행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다리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 버렸습니다. 대개 공동 식사에 늦게 참석하는 이들은 노예와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주의 만찬을 하면서도 배고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성찬의 본질이 그들만의 잔치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성찬의 정신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 책망합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유익을 추구하다 보면 갈등과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때때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찬의식은 그러한 갈등을 넘어 세상과 교회의 목적이 다름을 분명히 구별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식사후에 제자들에게 잔을 드시며 이것을 행하여 마실때마다 자신을 기념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기념물을 구입합니다. 특별한 순간과 장소를 기억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겼고, 이를 기억할때마다 주님과의 관계를 깊어 지게 합니다.
25절입니다. 11:25 또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성찬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성찬에 참예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회복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약속 안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 받고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약속이 지니고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본훼퍼 목사님은 “혼인이 언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언약이 혼인을 보전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언약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 있을 때, 그 언약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26절입니다.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의미를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찬 예식을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시선에는 모두가 사랑 받기에 합당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은 서로를 더 가까이 연결해 주고, 하나가 되기 위해 실천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떡을 떼고 마시는 것은 말로 만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27 ○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그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29 만일 누군가가 그 빵과 잔이 주의 몸임을 분별하지 못한 채 먹고 마신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경우, 그 사람은 주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의 빵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주님과 하나가 되어진 성도들은 성찬을 준비하며 스스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기 점검 없이 형식적으로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됩니다. 성찬의 떡을 나눌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찬의 잔을 마실 때,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주님을 더 닮는 것 뿐입니다.
셋째, 성찬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특별한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DMZ 민간인 통제구역에 있는 임진강 '독개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한국전쟁때에 파괴되어 현재는 다리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전쟁으로 끊겨진 2개의 다리 가운데 한개의 다리는 복구되었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 복원된 다리를 통해 유엔군 포로들이 귀환해 왔다고 해서 자유의 다리로 불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의 흔적으로 파괴된 독개 다리는 70년 세월동안 더 이상 사람도 기차도 달릴수 없는 다리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에 이 다리는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며,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현재 끊겨진 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건널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은혜의 통로임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끊어지지 않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에게 깊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서로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이임을 다시 깨닫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주님에 의해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찰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찬을 마친 후에는 삶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한주도 성도들의 삶을 통해 주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9/29/2024 | 성령강림후 제 19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2 고난 가운데 기도하라 Pray in the Midst of Suffering
야고보서 5:13~20
성령강림 열아홉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까 나무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은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나무는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앙상한 가지만 남겨둡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보며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도도 인생의 겨울, 고난의 시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을 돌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실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성숙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집중될 때, 세상의 관심이 시들어지고,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언급됩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를 받으십시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경건한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큰 효력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고난 중에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겨울철 감기부터 심각한 질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황들을 고난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기도를 더 하게 될까요? 삶이 즐거울 때일까요, 아니면 크고 작은 고난을 겪을 때일까요? 본질적으로 인간은 고난이 닥칠 때 더 기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하지만,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난이 닥쳤을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성화를 이루기 위해 고난의 경험을 사용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고난과 기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고난과 기도의 관계입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고난 당한 자의 대표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전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실패의 사건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판결은 율법주의자들의 입장에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패의 자리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고난이 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고난을 이길 힘을 주님으로 부터 얻게 됩니다. 고난 자체에 집중하면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커질 수 있지만, 고난을 이기신 주님을 기억하면 그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고,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찾아 오면 불행의 원인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고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회복하기 위해 주신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부모를 원망하며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장애 보다 사람들의 시선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평생 앞을 보지 못했던 그를 회복되어지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저항할 수 없는 우리의 상태를 건져 내시기 위해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죄의 마지막 결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5-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고난이라면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말씀합니다. 인생의 어둠의 터널을 지나갈 때에 희망이 사라진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 주님께 희망을 두십시오. 우리는 온전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둘째, 치유와 기도와의 관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5:14 혹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십시오.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 병든 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병든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찾아가 기도 받으라고 합니다. 당시 장로들은 교회의 양떼를 돌보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병이 들면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1세기 예수의 제자들은 병자의 치료를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것이 일반적인 행위였습니다(막 6:13).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간호할 때도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 10:34). 이는 치유를 위한 적절한 조치로, 기도와 함께 신체적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기도와 의학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 속에 의사의 처방이나 치료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라고 권장하십니다.
주님은 3년 동안 지속적으로 병든 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하신 말씀에서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들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들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유대 사회에서 병든 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이로 인해 그들은 더욱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든 자와 죄인들에게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병든자를 위한 치유기도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질병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형제의 아픔을 나의 고통처럼 여기며 주님의 마음을 품는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이미 주어진 것들을 감사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믿음의 병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먼저는 영적인 치유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통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봄의 꽃향기,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 숨쉬는 순간 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의 병이 들면 우리는 은혜를 기계적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치유 받으면 그 은혜는 값비싼 은혜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안에 어둠을 몰아내시고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시는 치유의 사건입니다.
5:17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지 않습니까? 18 그런데 그가 다시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주룩주룩 쏟아져 땅에서 곡식들이 다시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는 우리의 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엘리야가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까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고 말씀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불꽃은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때 모세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신비로운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불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으며, 애굽의 포로로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느끼며, 어려움에 처하면 두려워하고, 위협을 받으면 불안해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실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바로가 두렵고 자신은 말이 어눌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고, "네 입에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끈질기게 거절하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를 회복시킨 하나님은 애굽에서 백성들을 구출하심으로써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셨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셨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9 ○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미혹을 받아 진리에서 돌이켜 그릇된 길로 떠나갔을 때, 누구든지 그 사람을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면, 20 여러분은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 죄인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게 한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낸 큰일을 한 것이고, 그 결과로 그 죄인의 많은 죄를 덮어 준 셈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편지를 마치며 진리 안에서 바로 서 있으라고 합니다. 미혹된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미혹하여'라는 플라나오(πλαναω)는 '옆길로 빗나가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목표에서 시선이 벗어났거나, 갈망하는 시선을 다른 대상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벗어난 자가 살 수 있는 길은 생명되신 주님께로 돌이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길은 셀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길을 잃어 버리거나 다른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우리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환자가 의사의 지침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바른 길로 걸아가야 합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다시 회복하기 위한 수술과도 같습니다. 수술을 받는 것은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병든 부위를 치료하고 회복시킵니다.
미혹의 길에 빠진 형제들이 진리의 길로 어떻게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바로 기도와 사랑입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형제를 공동체 안에 품어 안아서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미혹된 형제가 있다면,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품어 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전에 길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잃은 양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리떼입니다. 인생의 어둠이 찾아온다면 잃은 양은 목자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끝까지 찾아오신 목자가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길을 잃은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 주십니다.
야고보는 편지를 마치며 인생의 고난이 오면 목자 되시는 주님께 기도할 때이며, 기쁠 때에는 주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상처받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자에게 함께 계시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뤄주십니다. 한주도 믿음의 길에서 상처를 별로 만드는 선한 일에 동참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9/22/2024 | (성령강림후 제 18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1 지혜의 출처를 확인하라 Verify the Source of Wisdom
야고보서 3:13~4:3
성령강림후 열여덟번째 주일입니다. 이 시간 새마음을 주시는 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함께하시길 소망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하늘에 속한 지혜와 육신에 속한 지혜를 대조합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의 출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읽을때에 지혜가 임하게 됩니다.
잠언 1:7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니,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잠언 3:7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당시 교회 내에서 스스로 지혜와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기적인 세속적 욕망에 따라 성도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정보와 같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지혜는 시기심을 낳고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깁니다. 세상에는 뛰어난 머리로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으로 인해 다툼이 발생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만이 아닙니다. 더 가까이 가정과 일터, 교회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과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하늘에 속한 지혜의 특성은 무엇입니까?(3:13-18)
13 ○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진정으로 지혜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입니까?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으로,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그런 사람입니다. 14 여러분의 마음속에 강렬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있다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지도 마시고, 또한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도 마십시오. 15 그런 지혜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요, 육신에 속한 것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이 들끓는 곳에는 온갖 혼란과 악행이 차고 넘칩니다. 17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무엇보다 순결하고, 또한 화평하고, 너그럽고, 양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이 없고, 위선적이지 않습니다. 18 참으로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화평의 씨를 뿌릴 때 거둘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는 온유함과 선한 행실로 나타난나고 말씀합니다. 대학 시절에 묵상했던 말씀 중에서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는 세속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는 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럴 때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는 세속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믿음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된 마음, 시기심으로 인해 다툼과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야고보는 하늘에 속한 지혜의 열매를 열거하는데, 이 열매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성령의 열매와 유사합니다. 지혜의 열매는 순결함, 화평함, 너그러움, 양순함, 자비, 그리고 편견이 없고 위선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참으로 의의 열매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화평의 씨를 뿌릴 때 거둘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모두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약 1:17) 우리는 바울이 전한 성령의 열매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지혜의 열매가 가르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이방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결함을 지켰더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 있을때에도 그곳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죄가 다가올때에 바울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롬 6장 11절) 예수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성결함은 죄의 유혹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화평함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성도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8)고 권면합니다. 우리 안에 화평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다면, 이는 분명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증거입니다. 또 다른 열매는 양순함입니다. "어질 량, 순할 순"이라는 한자어인데 , 바른 몸가짐과 순종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바른 마음으로 서 있게 되면,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도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편견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진실한 성도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말과 태도를 바르게 하고, 형제를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제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갈등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4:1-2)
4:1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다툼이 생겨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4:2 여러분이 욕심을 부려 무엇인가를 원했는데도 그것을 얻을 수 없으면, 살인을 저지릅니다. 무엇인가 탐내어도 그것을 갖지 못하면,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만일 여러분이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갈등의 원인이 욕망과 욕심에 있음을 언급합니다. 쉬운말 성경은 탐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시기하여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시기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테, ζηλοῦτε "라는 단어는 '악의를 지니고 바라보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시기심은 상대방에 대해서 집요하게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시기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악의적인 마음을 가지면 갈등과 다툼이 발생합니다. '살인을 저지릅니다'라는 이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인’을 말합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서 지속적으로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을 끊어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살인 사건들은 인간의 시기심으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한 사건은 첫 번째 인류 간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시기심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게 해 줍니다. 야고보는 이는 육신에 속한 것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온갖 악행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이 들끓는 곳에는 온갖 혼란과 악행이 차고 넘친다”고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잠언은 "마음이 평안하면 몸도 생기가 돌지만, 마음에 시기심을 품으면 뼈까지 썩는다."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3절을 보면 2:1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기만과 위선과 시기 및 온갖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2:2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그 젖을 먹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 복음을 듣고서 여러분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꼭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합니다.
한 번은 목회자 컨퍼런스가 끝난 후 서로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몸이 조금 불편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시며 장애인 사역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고백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삶이 가장 행복합니다. 이미 천국을 살아가고 있어요. 삶속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고백이지만 그분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고백했습니다. 삶이 시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목적이 일상의 행복을 빼앗아 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 세상의 지혜 너머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4:3)
4:3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구했는데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육신적인 쾌락을 누리는 데 쓰려고 잘못된 동기에서 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탁월해지기 위해서는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고 오랜 시간 동안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당장 변화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결단하면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의 자녀들은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의 지혜 너머를 바라 보며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계획을 지니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깊이 있는 연습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모습 너머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고 읽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지혜의 출처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논문을 쓰는 학생이 그 출처를 정확하게 기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랜 전통과 역사속에서 수용된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경험하지 못한 지난 역사속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 온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 낮은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해 주시고 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지혜는 정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뒤에 통회하고 자복하며 하나님께 정결한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다윗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셨고 그에게 그 은혜를 주셨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논문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예술적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에 대한 출처를 밝히고자 한다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하늘이 속한 지혜의 출발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 행하도록 도우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1분 1초가 주님께서 새롭게 주신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되는 한 주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인류에게 주어진 삶의 지침서인 지혜의 말씀을 구하고 찾으며, 두드림으로써 세상의 지혜 너머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날마다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9/15/2024 | (성령강림후 제 17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30 말의 힘을 깨우다 Awakening the Power of Words
야고보서 3:1~12
성령강림후 열일곱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살아가는 순간마다 따뜻하게 감싸주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서 2장은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백성들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며, 믿음의 성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차별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믿음의 태도를 통해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혀의 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혀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며, 입을 통해 하는 모든 말들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신창원이라는 죄수가 부산 교도소를 탈출해서 907일 동안 숨어 지내다가 결국 체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907일간의 기록을 보면,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한 교사가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하며 "넌 뭐 하러 학교 나오냐고 말하며,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부정적인 말을 했는데, 소년 시절에 그는 이 말이 자신의 마음속에 악마를 만들어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말 한마디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그의 삶에 악영향을 미쳐 범죄의 길로 가는 데 힘을 실어주었으며, 그의 마음을 차갑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말이 형제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은 선생 되기를 쉽게 알아 너도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나서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다 알고 있는 대로, 후일에 가르치는 사람 된 우리가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경솔하게 주어진 직분을 맡으려 하지 말고 보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말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선생은 가르치는 자리에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랍비의 권세와 권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모든 인간이 말의 실수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말은 양날의 칼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인생을 살리기도 하고 마음을 배어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인간의 말이 항상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말로 인한 실수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도 자신의 뜻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지고, 모범이 되지 못하는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말의 실수가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스스로 자신의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다. 3: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혀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악이요,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떠돌아 다니며, 자극적인 말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사표를 던지고 선거 캠페인을 하는 후보들은 대중들의 시선을 끌기 위하여 상대 후보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 자리에 가 보기 전까지는 후보자들의 진심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상대방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역지사지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 사람의 상황에 가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서로의 환경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비판과 갈등,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로를 향한 말의 칼날을 더 날카로워 지게 합니다.
성경은 주의 자녀들에게 입술의 권세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권세는 우리가 기도하고 행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시행하신다는 의미도 있고, 성도가 살아가며 지녀야 할 말의 품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권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를 믿는 자녀들은 이 땅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상처와 마음을 치유하고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사람들 사이의 믿음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써 나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농부의 심정으로 뿌리는 말의 씨앗은 때가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텐데, 가르치는 자의 책임도 따르지만 잘 감당하면 상급도 주어집니다. 즉 심판의 원리는 상급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지난 날의 잘못이 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용서해 주심을 통해 선한일을 위해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야고보는 잘못된 가르침과 말의 실수에 이어서 말의 영향력에 대해서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둘째, 말에는 선과 악을 맺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3 말을 길들여 부리려고 하면, 우리는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4 배를 보십시오. 아무리 배가 크고 거센 바람에 밀려도, 항해사는 작은 키 하나로 배를 능히 조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배를 몰고 갈 수 있습니다. 5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혀도 매우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숲을 다 살라 버릴 수 있습니다. 6 혀 역시 불입니다. 또한 악으로 가득 찬 불법의 세계입니다. 비록 혀가 우리 몸의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진실로 혀는 우리의 온몸을 더럽히고,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삶을 망쳐 놓고, 결국에는 혀 자체도 지옥 불에 타 버리고 맙니다.
야고보는 3절로 5절에서 말의 영향력에 대해서 3가지 비유를 합니다.
첫째는 말의 재갈 비유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성질이 사나운 야생마라고 할지라도 고삐를 사용해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분쟁이 생기면 사나운 말처럼 비난과 비판을 서슴치 않게 되지만, 그러한 언어를 통제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비유는 거대한 배와 작은 키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거센 바람에 밀려가는 배로 묘사하며, 키는 비록 작은 것이지만 항해사가 큰 배를 손에 쥔 키 하나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인생의 배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조절하는 키가 필요합니다. 키가 없다면 인생은 바람과 풍랑에 따라 표류하게 되고, 결국 배가 파선하듯이 자기 삶을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즉, 작은 말의 열매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비유는 작은 불씨가 엄청난 파괴력을 지녀서 산에 있는 모든 나무를 태운 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혀를 악으로 가득 찬 불법의 세계에 비유합니다. 불법의 세계는 인간의 부패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즉 혀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지옥불이라면, 그 위력 앞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혀를 길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종류의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이나 바다의 생물들은 다 길들여질 수 있어서, 사람에 의해 길들여 왔습니다." 우리는 말 못하는 짐승이나 새들, 심지어 야생 동물들이 사람의 말에 따라 정확한 동작을 하는 서커스 같은 것을 보며 무척 놀라워합니다.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훈련을 시켜서 사람이 말하는 대로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입니다. (창 1:28) 그래서 인간은 태초 이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둘을 길들였고 또한 길들이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길들일 수 있는 동물과 길들이기 불가능한 혀를 대조하고 있는데,그런데 정작 자신의 혀를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5,6절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평안할지어다 하라. 그 집에 평안이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의 평안이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5장 7절에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을 주면 사랑을 준 만큼 사랑을 받게 되는 부메랑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는 우리가 선을 행하면 인생에 복이 찾아 오고, 하나님을 떠나 악하게 살면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악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말씀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믿고 행하면 그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상주시지만,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른 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걸맞게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말을 정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뿌린 말이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정죄하거나 저주하는 말들도 나의 삶과 나의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말의 변화를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인간은 본질적인 악으로 부터 스스로 변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능력으로 인간의 마음은 변화되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타락한 본성을 변화 시킬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태우고 정결케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회개의 증거가 나타나고, 마음과 영혼, 우리의 입술을 정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기도할 때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입술이 원수를 갚는 말이나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시편 141편 3절을 보면, "오 주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자신의 본성이 부정하다고 고백합니다. 이사야 6장 4절 5절입니다. 6:4 우렁차게 외치는 장엄한 그 소리로 인해 성전의 문지방 터가 흔들리고, 성전 안은 연기로 가득 찼다. 6:5 그때 내가 소리쳤다. “아, 나에게 재앙이 닥쳤구나! 이제 나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렇게 전능하신 만군의 왕이신 주님을 나의 두 눈으로 직접 뵙다니!”
성도는 그 날의 상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들보를 먼저 보고 난 뒤에 남의 티를 중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들보는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남의 티를 말하고 가르치는 일은 되도록 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주의 자녀들은 감사의 언어, 격려와 칭찬, 남을 높이는 말을 즐겨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예배, 기도, 찬양을 통해 우리의 입술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입술은 이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혀로 찬양하기도 하고, 사람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9절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또한 바로 그 혀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이처럼 같은 혀,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참으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어떻게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낼 수 있겠습니까? 12 나의 형제들이여, 어찌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으며,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물을 내는 샘이 단물을 낼 수는 없습니다. '무화과'라는 이름은 '꽃이 없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는 속으로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인하여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던진 나뭇가지로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을 때에 인생의 쓴잔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한주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향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온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9/8/2024 | (성령강림후 제 16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9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Seeing the World Through God's Eyes
야고보서 2:1-10
성령강림후 열여섯번째 주일입니다. 이시간 예배하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야고보서가 쓰여진 1세기는 계급과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뚜렷했던 시대였습니다. 야고보는 당시 회당에서 일어나는 빈부에 따른 차별 행위를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속에서 사람들이 겪었던 차별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차별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나무위키 백과사전에서 차별금지법의 내용을 찾아보니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법을 말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차별에 대해 공감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 차별의 문제는 복잡한 양상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차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시겠습니다.
첫째, 야고보가 말하는 차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절)
1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어서 그는 차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두 사람에 대한 묘사를 가정해서 설명하는데, 한 사람은 값비싼 옷을 입고 금반지를 끼었습니다. 권세가 있거나 유력한 부자를 비유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남루한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입니다. 대조적인 두 사람이 회당에 들어 왔는데 부자들에게는 좋은 자리를 권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자리는 커녕 퉁명스럽게 서 있든지 발판 밑에 앉으라고 홀대합니다. 외적인 것에는 신분이나 성별, 경제적 능력, 인종, 나이, 학력, 외모 등 여러 조건에 따른 것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에 의해 차별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의 8학군 지역은 교육의 성지로 불립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학 진학률을 기준으로 학교의 서열이 정해지며, 학군 중심의 집값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정은 8학군 지역에 진입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입니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부모의 심리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는 부에 따른 차별이 심화됩니다. 편애에 따른 차별의 예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상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방탕한 삶을 살고 돌아온 동생을 받아주며 잔치를 벌였고, 이로 인해 큰아들이 화를 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결정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다 보면, 일을 더 잘하는 자녀에게 더 자주 부탁을 하거나 칭찬을 해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관계 속에서 완전한 형평성과 공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의 일부를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한 대가로 더 많이 받을 줄 알았다면,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호의가 부당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는 자들이 얻게 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차별을 금하라고 하는 이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외적인 요소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크고 작은 죄를 판단하셔야 했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1세기나 21세기나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내용이 세상속에서 차별하는 가치와 부딪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차별의 내용을 윤리적인 차원, 공정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신앙적 차원, 진리의 문제를 지켜나가는 고백과 결단의 의미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을 넘어,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과정입니다. 이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더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삶의 결핍과 비교의식이 느껴질때마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은 지위와 풍요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나만을 위한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믿음은 어떤 삶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1절에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광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스스로 낮추고 소외된 자들을 높이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별하는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피하지 말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믿음의 태도를 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역사 속에서 수시로 변화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공정하신 분임을 믿고 현실 속에서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차별의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5-7절)
야고보는 차별의 근본적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시고, 부자에 대해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믿음이 좋고 부자가 불의하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당시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학대하며 재판장으로 끌고 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부자들의 횡포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부자들을 비판하는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첫째는 잔혹하게 가난한 자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는 부자들의 악독함이며, 둘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고귀한 이름을 비방하는 불신입니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근원적인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부자들 마음 안에 있는 교만함과 인간 본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돈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중립적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물론 돈은 위험성이 클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돈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청년의 이야기는 그 청년이 소유하고 있던 돈이라는 것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고 그가 어려서 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십계명의 다섯가지 계명을 열거합니다. 부자 청년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입니다.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게 있는 것들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비워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청년의 마음을 아시고 구원은 너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재물을 사용한다고 결단했다면 이 청년에게는 하늘의 평화와 구원의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주님은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갖는 청년에게 단순히 계명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요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습니다. 이후에 자신이 지녔던 외적인 조건을 배설물 처럼 여기며 주를 위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맘몬의 신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하라는 의미 보다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난도 부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한량없는 사랑으로 회복하셨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현재 주어진 것들을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해 결핍과 차별의 마음이 자리 잡게 된다면, 이러한 감정들은 마음의 우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소외받는 사람들을 신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 객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바탕으로 고아원, 양로원, 학교, 병원 등이 세워졌습니다. 성경적 명령과 원칙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반면에 믿는 사람들은 현실을 동일하게 바라보면서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도 상황을 해석하는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복할 수 없는 이들의 억울함을 들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사랑이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뒤집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십자가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세상의 교양과 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며, 믿음 안에서 차별의 모든 근본적인 원인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기적을 요구했고, 그리스 사람들은 바울에게 철학적 지혜를 구했지만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셋째, 야고보는 차별의 결과 대해서 말씀합니다. (9-10절)
차별의 결과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에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계명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다른 어떤 것은 소홀히 하는 태도를 취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모든 율법은 빠짐없이 지켜야 함을 밝힘으로써 율법의 가볍고 무거움을 따지는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키다 가도 그중 한 가지만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어긴 셈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마지막 심판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있는가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한주만 시동을 걸지 않아도 자동차의 엔진 상태가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의 성공만을 향해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율법을 지킨다면,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율법과 사랑은 대조적이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을 으뜸이 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 법은 구약의 레위기 19:18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빠지면 율법주의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 사랑의 법을 삶의 지표로 삼고 실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삶의 표준이 되는 명령입니다. 차별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해법은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받을 자들에 대해 긍휼하심을 보임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마 5:7) 따라서 자비로운 마음은 사랑의 새계명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긍휼의 관점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억지로 가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의 길을 걷는자에게 함께 해 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취 하셨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 느껴질지라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영광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은 영광의 보좌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지닌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깨달음을 주시고 자비를 실천하는 여러분에게 새힘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