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2025 | 사순절 세번째 주일

광야의 은혜 Grace in the Wilderness

시편 63:1-8

사순절 4주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의 실존은 메마른 땅에 내몰린 광야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광야로 직접 찾아오셨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새벽기도를 함께 드리며 40일 동안 내면의 광야로 들어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 시간을 통하여 부활의 소망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피곤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에 귀한 은혜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광야 같은 현실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시며 성령에 이끌려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 물이 없어서 모세에게 불평하고 다툼을 벌였던 경험도 있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는 자리이자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이 물없이 견딜수 있는 시간이 3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광야의 시간이 지속되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본 시편을 쓴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으로 자신을 죽이려 하자 그 칼을 피하여 유다 광야에서 도망 다녔습니다. 아들의 배신으로 아버지가 느꼈을 슬픔의 감정은 사실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을 것이고, 정신적 충격도 컸을 것입니다.

본 시편의 표제어는 유다 광야에 있을때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탄원과 슬픔보다 성소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고백이 가득합니다. 관계의 상실감배신에 대한 쓰라린 고통 가운데 구원의 기쁨과 소망을 바라 보는 다윗이 대단합니다. 다윗은 목마름으로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한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속에서 드리기도는 깨어있는 기도요. 절박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63:1 오 하나님,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간절히 찾아 헤매고, 내 육체가 주님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하나님 보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현실의 상황들이 거대해 보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것만 같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으로 부터 면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은 것처럼,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도 죽음의 고통 속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인해 수천만명이 사망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극한의 고통을 겪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의 기도드렸습니다. 1절은 병이 시작될 때의 고백이고, 2절은 투병 중의 고난 가운데 기도이며 3절은 회복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나의 주님 도와 주세요. 죽음이 문 앞에 왔어요. 당신께 부르짖어요. 이것이 당신의 뜻인지요. 저를 죽이려 하는 이 화살을 빼 주시기를. 제가 살 여유도 없으니 저에게 안식을......통증과 압박이 내 영혼과 육체를 사로 잡습니다....제 혀는 침묵하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합니다. 온몸엔 감각이 거의 마비됐어요... ..주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주세요. 다시 회복하는 것 같아요. 이 땅에서 다시는.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입술로 당신을 찬양합니다......오직 당신의 도움으로 완전해 질 수 있을 뿐입니다."

쯔빙글리는 죽음의 병중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상황을  목마름으로 표현하지만 실제 상황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상황에서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그리워 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감기로 인해 뒤척이는 아이 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돌보아 줄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며 기도도 해 줍니다. 자녀에게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지만,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 가운데서도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더욱 더 갈망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이진희 목사님이 쓰신 '광야를 살다'라는 책이 있는데, 부제는광야의 삶을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언급하며 다양한 종류의 광야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 인간은 농사를 지어야만 살 수 있게 되었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인생의 광야를 살아간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자신의 도시를 만듭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시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세운 도시는 하나님에 의한 홍수로 인하여 사라집니다. 이후 인간은 다시 바벨이라는 도시 안에 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중단이 된 것입니다.

 

또 다른 광야가 나옵니다. 기다림의 광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후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25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광야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가능성이 없을 때, 사라가 자녀 생산의 능력이 끊어졌을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다림의 광야에서 약속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다윗에게 광야는 어떤 장소였습니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하는 장소였습니다

 

3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생명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기에, 내 입술이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4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목숨이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고, 내가 나의 두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권세 보다 강하고 죽음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사랑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 사랑이 더 소중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광야의 현실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는 힘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주의 사랑에 눈을 뜬 것입니다. 생명을 스스로 보존할 수 없는 그 장소에서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도망자의 신세였는데, 무슨 음식을 먹어서 만족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은 듯 내 영혼이 아주 충만하고 만족하니, 내가 입술을 크게 열어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다윗은 죽음의 공포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영혼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하루 아침에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만나는 자리를 통하여 신앙도 한뼘 더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영혼의 밥상입니다. 한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시며 영혼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다윗의 예배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간절했던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 목숨을 다하도록 주를 찬양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다윗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주님만을 생각하고 밤을 새며 주님을 그리워했습니다. 6 내가 잠자리에 누워서도 주님만을 생각하고,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도 주님만을 그리워합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언제 자신을 급습할지 모르는 상황에 편안한 잠을 잘수가 없었을 겁니다. 잠을 자는 시간은 무방비 상태이니까 다윗은 밤 깊은 시간에도 대적들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정말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고는 수많은 의심과 불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 들어옵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믿음의 생각을 허무는 감정들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구하는 절박한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8 내 영혼이 주님께 매달리니, 주께서는 권능의 오른손으로 이 몸을 굳게 붙들어 주십니다.

 

다윗은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주님의 손은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개역개정은 '매달리다'를 주를 '가까이 따르다'로 번역했습니다. 종종 찰스강 근처에서 새끼 오리들이 어미 오리를 줄지어 따라가는 것을 보곤합니다. 새끼 오리들은 어미오리를 의지하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곳이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를 위한 가장 확실한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마다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절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께 매달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더 깊숙이 연결되어 믿음의 뿌리가 더 깊어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며, 완성으로 가는 여정을 걷고 있는 미숙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불안과 두려움의 자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며 우리는 더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안에 인간적인 생각을 걸러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걸러낼수록 은혜의 생수가 길러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질 때에 나쁜 생각은 사라지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순절은 마음을 돌이키는 절기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의 습관들, 몸과 마음에 가득한 악한 마음으로 부터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찢긴 옷을 입은 채 주께 나오면 주님은 우리에게 새옷을 입혀 주십니다. 아프고 상한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손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찾아내시고 건져 내십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광야를 경험하며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율례를 배우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캄캄한 길에 비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은 우리 마음 안에 어둠을 몰아 내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십니다.

 

다윗에게 압살롬과의 갈등은 신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노년에 그는 광야에서 쫓기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8:5절에 보면,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내전으로 전쟁하게 되었을때 다윗은 군대를 지휘하는 요압과 아비새, 잇대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대들은 나를 보아서라도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주시오. 이처럼 왕이 압살롬에 대해 지휘관들에게 특별히 당부하는 말을 다윗의 군사들이 모두 들었다." 그러나 결국 압살롬은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큰 소리로 울부 짖었습니다. “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아!

 

아들의 반역에도 이처럼 통곡하는 마음은 광야의 시간을 통하여 다윗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깊이 깨달은 자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어진 증거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3/16/2025 | 사순절 두번째 주일

전능자의 그늘 아래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시편 91:1-2, 9-16

솔로몬 왕이 사랑했던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골짜기 백합화에 비유했습니다. 골짜기 백합화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장소에 핀 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백합화는 여러 들꽃들을 부르는 총칭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백합화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식물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순결함을 간직한 꽃입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라도 하나님께서 들꽃을 자라게 하시듯, 성도들을 보실때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일까요? 오늘 우리는 시편 91편을 통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쉼을 얻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시인은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에서 편히 쉬게 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라는 표현이 어떤 뜻일까요? 개역개정 성경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라고  번역했습니다. 은밀한 곳은 하나님과 아주 깊고도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장소입니다. 쉬운 성경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장소로, 메시지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앉은 그분의 그늘 아래서 밤을 보내는 그대라고 번역했습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이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간절히 사모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기도들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오 하나님,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간절히 찾아 헤매고, 내 육체가 주님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63:1) 믿음생활 가운데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자를 알수 없는 본 시편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세상 그 어느 장소보다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고, 어떤 세력도 침범할 수 없는 완전하게 보호받는 장소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던 다윗도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 4)라고 고백했습니다.

 

계속되는 시편의 구절을 보면, 시인의 신뢰는 평탄한 삶에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자신의 상황을 묘사한 은유적 표현들을 보면, 사냥꾼의 덫, 한 밤중에 갑자기 닥치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들, 밤에 다니는 사나운 늑대, 방향도 알수 없는 낮에 날아드는 화살, 어둠속을 배회하는 질병, 한낮에 일어나는 재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죽어 나가는 것과 같은 공포와 두려움의 환경이어도 네 곁으로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 이르지 못하리라 표현합니다.  이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보호와 쉼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91:3 진실로 주께서는 너를 새 사냥꾼의 덫에서 건져주시고, 죽음의 질병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91:4 주께서 너를 그의 깃털로 덮어주시리니, 너는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라. 그리하면, 주님의 신실하심이 너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되고 성벽이 되어 줄 것이다. 91:5 그러므로 너는 한밤중에 갑자기 위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대낮에 화살이 날아올지라도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91:6 어둠 속에서 괴상한 질병이 퍼진다 해도, 대낮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너는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으리라. 91:7 너의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너의 오른쪽에서 일만 명이 쓰러진다 해도, 네 곁으로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 이르지 못하리라. 91:8 그때에 오직 너는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고꾸라지는 모습을 너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길이란 고난을 마주할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삶입니다. 이사야 43:2절의 하나님의 약속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도록 지켜 주겠다. 네가 불 속으로 걸어가더라도 네가 불에 타지 않도록, 불꽃이 너를 조금도 태우지 못하도록 내가 보살펴 주겠다."

 

크리스챤 타임지에 실린 존파이퍼 (John Stephen Piper:1946-현재) 목사님의 컬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56 1 8일 에콰도르의 쿠라레이 강가, '팜비치'(Palm Beach)라고 부르던 모래톱에서 짐 엘리엇(Jim Elliot),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에드 맥컬리(Ed McCully), 피터 플레밍(Peter Flemming), 로저 유더리언(Roger Youderian)이 창에 찔려 죽었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와오라니(Huairani) 인디언에게 전하려 하던 중이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이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기렸다. 이 책의 제목은 시편 91 1절에서 따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잃고 2년 후에 자신의 책 제목을 정하면서 이 가슴 아픈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짐이 죽었을 때 엘리엇 부부는 결혼한 지 3년 되었고 10개월짜리 딸이 하나 있었다. 다섯 선교사들의 순교에 얽힌 정황을 조사하자,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손이 드러났다. 1996 9월에 발행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순교한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의 기사가 한편 실렸다... 이는 살해당한 선교사의 아들이 쓴 문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경이롭다.... 어째서 이 다섯 젊은이들이 죽었고 수천 명에게 감동을 주는 유산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설명밖에 없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내 유익을 위해 정하시는 일만 일어난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그분의 주권은 바로 이런 것이다.”

3절로 8절은 전능자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복의 1차 선언이고, 9절로 14절은 지존자를 거처로 삼은 자들이 누리는 복에 대한 2차 선언이라 할수 있습니다.

 

91:9 네가 주님을 너의 피난처로 삼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거처로 삼았으니, 91:10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겠고, 어떤 재앙도 네 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리라. 91:11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천사를 명하여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리니, 91:12 너의 발이 혹시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 천사들이 두 손으로 너를 굳게 붙들어 줄 것이다. 91:13 그리하여 도리어 너는 사자와 코브라를 짓밟고,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발로 짓누르리라.

 

시인은 여호와가 나만의 피난처가 아니라 너의 피난처 말씀을 믿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인칭을 바꾸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관계속에서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을 주고 베푼 만큼 마음의 기대도 커지게 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으로 섬기고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나의 기대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은 알수 없는 길, 우리의 뜻과는 다른길처럼 보일수 있어도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 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것을 기억하면, 모든 것이 감사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겠고, 어떤 재앙도 네 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리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천사를 명하여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리니, 너의 발이 혹시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 천사들이 두 손으로 너를 굳게 붙들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너는 사자와 코브라를 짓밟고,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발로 짓누르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단의 시험이 참으로 그럴듯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91편 11, 12절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보호하시지 않겠느냐?고 시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으시고 물리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처로 삼는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14절로 16절은 전능자의 그늘아래 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가 나를 사랑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알고 받아들이니, 내가 그를 보호하고 높여 주리라.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내가 곁에 함께 있어 주리라. 내가 그를 건져주겠고, 내가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오래 오래 살게 해주고,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라성도가 받게 된 최고의 복은 구원입니다.

 

어린 나이에 순교한 짐 엘리엇이 대학생때 썼던 일기 속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 그의 일기에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기 보다 전능자의 그늘아래 머물기를 훈련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영원한 복을 바라보며 순교의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생각납니다. 그가 순교를 선택할때에 하늘에서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드린 기도와 유사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 받는 우리의 삶에는 슬픔도 있고 수고로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우리는 그날에 주님 앞에 서야 할 한 형제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쉼이 필요해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피곤과 피로가 쌓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때 집이 가장 편하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은 내가 늘 머무는 곳,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이지요.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일을 만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은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이 당장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주께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고난은 예기치 않고 찾아 오기에 두려운 것이고, 홀로 있으면 외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친히 풀어 가시지 않겠습니까?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영문도 모른채 휘 몰아치는 고난의 한복판 복음이 애타게 울려 퍼진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상한 마음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전부라면 하나님은 그 드림을 멸시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어느 것도 헛되지 않는다.” 챕터 한장 한장에 쓰여진 그녀의 고백은 마치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과도 같습니다.

 

그녀는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의 더 깊은 품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린 전능자의 그늘아래의 친밀한 일들을 우리도 선택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보호와 위로는 변함이 없기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세상이 줄수 없는 것들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한주 동안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며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3/9/2025 | 사순절 첫번째 주일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

요한복음 5:2-9절

놀라운 은혜를 시작하면서 의문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 영어로 Why라고 하는 단어도 사용하지요. 무슨 까닭으로, 또 어째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확인을 요구할 때, , Why 그런 말을 씁니다. 이 의미를 표현하면서 주어진 글이 있다면, “인생의 짐”이라고 하는 글입니다. 짐이라고 하는 말은 맡겨진 책임과 의무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자기가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이라고 하는 글입니다.

 

"내 등에 내가 가지고 갈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내 등의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임을 알았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겁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도 알게 되어졌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라고 하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등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 열매가 완전히 익지 못한 사람처럼 미숙하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진 귀한 선물임을 알게 됐습니다. 내 인생에 등의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겁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인생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진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이 글은 자신의 인생에서 져야 되었던 짐에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진 글입니다. 마치 물살이 거센 냇물을 건널 때면 등에 짐이 있어야만 그 무게 때문에 물살에 사람이 휩쓸려 내려가지 않습니다. 만약에 짐이 없다면 그 사람은 가벼워서 물살에 떠내려 갑니다. 화물차도 언덕을 오를 때면 화물칸에 짐이 잔뜩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헛돌지 않습니다. 그 짐 때문에 그 험난한 고개도 넘을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의 짐은 그 짐 때문에 바르게 살게 했고, 안일에 빠지지 않게 했고, 불의라고 하는 물결에 휩쓸리지 아니하도록 나를 붙잡아 주었고, 내 인생의 짐은, 내 인생의 수많은 인생의 고개, 고개를 넘을 때마다 헛바퀴 돌지 아니하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짐이 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져야 할 짐은 무거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준 유익이 되어졌다고 하는 거지요.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짐도 있고, 직장이라는 짐도 있습니다. 교회의 짐도 있습니다. 내 몸이 아픈 짐도 있습니다. 슬픔의 짐들도 있고, 내가 평생 져야 될 자녀의 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짐은 내가 삶을 살아가게 감당하게 된 짐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되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온 위대한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짐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질병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기도해 주면 병이 났는데, 자기는 자기 자신의 질병에서 세 번씩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 질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후에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이 짐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란 말을 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 7절에 이르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바울도 자신이 져야 되는 몸의 질병이 오히려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한 인생의 짐과 같았는데, 지나고 나니 은혜의 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짐으로 여기지 마시고 은혜의 힘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인생에 큰 짐을 지고 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자비의 집 또는 긍휼의 집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여러 개 문이 있습니다. 주로 제사 드리기 위해 양이 들어가는 양의 문 옆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수많은 병자들이 행각 주변으로 사람이 다 몰려 있습니다. 이유는 천사들이 가끔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럼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도 낫는다고 하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그 연못 속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연못 주변에, 행각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5 4절은 기록하죠.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지금 주변에 몰려온 겁니다. 여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38년 동안 환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이름도, 하던 일도, 병명도 모르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서 오랫동안 고생하며 지내온 사람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왔습니다. 물이 움직이면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자기는 넣어 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어쩌면 있더라도 38년 동안 병자의 삶을 살아서 다 떠났을 겁니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완전한 포기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지요. 이런 38년 된 병자가 이 연못에 왔지만, 이 사람은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연못을 떠나기에는 미련이 남아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그 연못에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이 38년 된 병자 앞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병자를 보시고 주님이 묻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 5, 6절에 기록하죠. "거기 38에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연못에 찾아온 겁니다.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38년 된 이 병자에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질문에 이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 저도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5 7절에 기록하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는 쉽지만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예수님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환자에게 강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냐,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 8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38년 동안 환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말하지 않습니다. "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정말 믿겨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다음 9절을 보면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시간도 오래 되지 않죠. “곧 나아서” 성경의 기록은 굉장히 단어로 짧습니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엄청난 인생의 짐을 가져 살아왔습니다. 38년의 고통, 절망, 좌절, 그런데 한마디 "내 자리 들고 걸어가라." 이 한마디에 38년의 고통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저 분의 말대로 해보고 싶은 거예요. 38년 동안 누웠고 여기 와도 누구 하나 연 줄 사람이 절망이지만 지금 내게 말씀하는 이분이 정확히 누군지 모르지만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분 말대로 자리를 들고 일어섰는데 38년의 질병이 떠나간 줄로. 믿습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놀라운 은혜는 38년 된 이 사람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사람, 수많은 병자 있었지만, 유독 이 38년 된 이 병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었을 거라 하는 겁니다. 이 환자는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을 예수님은 주었을까? 우리는 2025년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배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기도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사람으로 그치지 마시고, 38년 된 병자에 찾아오셔서 기적을 주신 놀라운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이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38년 병자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는 왜 그 사람에게만 베푸셨습니까? 첫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란 말이 뭐예요? 하던 일을 도중에 자꾸 그만두어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은 포기하는 순간 희망이 사라집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당시 많은 질병들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 3절에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누워서 물에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다 치료 받으려고, 일반 병원에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구전으로 내려온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서 천사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려고 왔습니다.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지만, 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병명만 썼어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은 병명은 없는데 38년이라는 기록을 씁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그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예수님 오셔 가지고 벌써 그 사람 모습만 딱 봐도, ,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됐다는 걸 주님이 벌써 알아볼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5 5절에 기록하죠. "거기 38해 된 병자가 있더라."고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곳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벌써 예수님 첫눈에도 이 사람은 너무너무 병이 오래됐다는 사실을, 38년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잠깐 눈으로 보아도 38년 동안 질병을 앓아왔다는 얘기는 당시 의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뭔들 안 해봤겠어요. 결국 이 사람은 죽음이란 단어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절망이란 단어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이 38년 된 병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넣어 줄 사람도 없지만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까지 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너무너무 질병으로 38년 된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이 사람 속에 포기하지 않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체크한 겁니다. “네 병이 너무 오래된 건 내가 안다. 그러나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낫고 싶으냐?, 내 마음속에 아직도 희망 있느냐?, 내가 지금 포기하지 않고 있느냐?, 왜 이 사람이 현실을 보면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 누구 하나 자기를 도와서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시고 뭐라 말합니까? 네가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포기하지 않고 있느냐?, 네가 낫고 싶으냐?. 요한복음 5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 벌써 오래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도 말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때 환자의 대답은 포기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 주님, 정말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38년 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온 이 사람에게 가족도 친구도 다 떠났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5 7절은 기록하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포기된 대답이 아니에요. 그 마음속에 지금도 낫고 싶은 희망을 말하고 있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마음 깊은 곳에 희망으로 대답하는 그 사람의 대답을 주님은 보셨단 사실입니다. 여러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잡아 줍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앞을 못 봅니다. 스스로 노동을 할 수 없어요. 이 사람이 결국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거 뭐냐, 구걸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앉아 가지고 나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앞은 보이지 않지만 시각 장애인이 발전되게 청각이 발달돼서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서, 이 사람은 특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 귀에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왜 우리 마을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올까? 왜 그럴까?" 그런데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자기 앞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순간에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자기 앞에 왔는데,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는 거예요. 이때 당시 정통 유대인들은 구약의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아, 구원자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디메오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라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당신이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심을 믿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꾸짖습니다. "조용히 좀 해라, 네가 이 구걸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느냐?"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 48절에 이어서 기록하지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꾸짖지만 더 큰 소리로, 더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는 말은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분명한 확신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바디메오에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예“ ”왜 불렀느냐?" "주님, 저는 보시다시피 시각 장애인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당신이 말씀만 하시면 나는 눈이 떠질 줄로 믿습니다."

 

이 사건이 2025년 전입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된 지금도 시각 장애, 이 선천적 시각 장애, 눈이 떠진다, 불가능합니다. 2천 년 전에 이 사람은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께서 말합니다. "네 입술로 고백한 대로 되리라." 그래서 마가복음 10 52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로 그 시간이 사람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일생 동안 어둠을 가지고 살았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진 이 사람에게 주님은 기적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2025년을 살아가는 여러분, 우리 모두 다 인생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이 힘들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그 짐을 힘이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너무 힘들다 보면, 짐이 무겁다 보면 자꾸 내려놓고 싶잖아요. 끝까지 붙드십시오.

 

2) 열정이 있었다.

 

두 번째는 열정이 있음을 봅니다. 38년 된 병자, 포기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열정을 봅니다.

 

사람이 그 속에 희망 있으면 그 사람은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그래서 요한복음 5 8절에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붙들던 자에게 말합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주님의 기적은 열정을 가진 이 사람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누가 도와주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은 "네가 스스로 일어나라."라는 겁니다.

 

예수님 말이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내가 일어나요?" 그런데 그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희망을 가지고 열정 있는 자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멘, 그래서 9절에 “곧 그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38년 된 병자가 깨끗하게 고쳐진 사건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논리력으로 분석도 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나를 향하여서 말씀하는 이분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열정을 품고 그분의 말에 일어나 봤어요. 놀랍게도 38년의 질병이 떠나가고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기적을 보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 9절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열정을 가진 자와 일하실 줄 믿습니다.

 

열정은 “어떤 일에 대해서 열렬한 애정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거를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그 사람들은 전해 듣고 왔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한번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가 들어가면서 낫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온 사람들, 어떤 사람이에요? 포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음 기회에 들어가면 되겠지,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냥 남들 따라서 따라온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주님은 그런 자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 속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속에 열정 있는 자, 주님은 기적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025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기도를 드립니다. 왜 기도를 드려도, 왜 예배를 드려도 변화가 없을까요?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려도 그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품고 열정을 가진 자입니다열정을 가진 자는 말씀을 붙들 수가 있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해가 안 돼요. 계산상으로 안 맞아요. 그래도 할 수 있었던 게 뭐예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계산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머리로 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 다른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하십시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뭘 안 해봤겠어요?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봤을 거예요. 그런데 내게 주신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열정이 있고 나니까, 포기하지 않고 나니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요, 사람의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사람의 방법을 뛰어넘습니다. 여러분이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38년의 질병이 바로 그때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2025년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해 봅시다. 포기하지 마세요. 누구나. 인생의 짐은 다 갖고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놀라운 기적은 여러분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은 바다에서 풍랑이 와 가지고 표류하는 배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작은 어선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풍랑에 휩쓸리다가 겨우 풍랑이 멈춰지지만, 엔진도 다 고장나고, 나침판도 다 고장나고, 통신 시설도 다 고장나고,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표류할 수밖에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도 다 떨어졌어요. 배고픔도 왔어요. 더 중요한 건 배고픔보다 더 무서운 게 타는 목마름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목마르니까 바닷물을 떠 가지고 마셔 보지만, 혓바닥은 갈라지면 더 탑니다. 이들은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게 목마름이었어요. “내게 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물 마시고 싶다. 물 마시고 싶다.” 그러나 물은 없습니다. 그 망망대해 뜨거운 해는 내려칩니다. 혀가 갈라집니다. 모두가 목말라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배 한 척이 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혀가 갈라지면서,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 목마름으로 물을 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세요." 그러는 거예요. 물을 달라고 하는데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라”는 거에요. 이해가 안 돼요. 양쪽에서 말합니다. “물 주세요., “물동이를 아래로 내리세요." 어느덧 이 배가 표류되고 바다를 벗어나서 강까지 온 겁니다. 이제 물 바가지만 내리면 물을 마실 수 있어요. 그들은 그걸 모르고 ", 목마르다. 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도 우리 목마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 곁에 어떻게 계십니까? 은혜의 물을 떠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 생에 수많은 내가 져야 될 짐이 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열정을 품으십시오. 주님은 "네가 낫고자 싶으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한 다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025년을 살아가시면서 가정의 짐, 자녀들의 짐, 경제적인 짐, 질병의 짐, 짐 없는 사람 없어요. 다 있어요. 그 짐을 무겁다고 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지면서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으시면서 가십시오.

 

기적은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의 목마름, 내가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내게도 찾아오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수를 마시고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시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38년의 절망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2025년 하나님의 방법 앞에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의 고백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다시금 주님 붙들고 열정으로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도우셔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2/2025 | (주현후 마지막 주, 임명예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A Life of Reverence for God

시편 99:1-9

종교개혁자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인식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책을 통하여 학습되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연악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 가운데 구원을 향한 갈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본 시편 3 5 9절에서 3번에 걸쳐 진실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카도쉬: קָדוֹשׁ''구별되다, 깨끗하게 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으로 부터 구별되시고, 깨끗하셔서 우리가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르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일평생을 살아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를 경험해도 그 거룩함에 압도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서 입술이 부정하여 내가 하는 말이 다 더럽고 불결하구나, 하나님께 속할 수 없고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는 네 부정함이 씻어졌고, 네 죄가 덮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이사야에게 사명감이 임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옵소서라고 결단합니다. 이사야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6:5 그때 내가 소리쳤다. “아, 나에게 재앙이 닥쳤구나! 이제 나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렇게 전능하신 만군의 왕이신 주님을 나의 두 눈으로 직접 뵙다니! 6:6 ○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한 천사가 제단에서 활활 타고 있는 숯불 한 덩이를 부집게로 집어, 그것을 손에 들고 내게로 날아와, 6:7 그 제단의 활활 핀 숯덩이를 내 입술에 갖다 대면서 말하기를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부정함이 씻어졌고, 네 죄가 덮어졌다!” 하였다. 6:8 ○ 바로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할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 그래서 내가 주께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인간의 죄된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기 보다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예수께서는 돈과 하나님 가운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만큼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강력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살 길은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거룩이란 매일같이 일정시간에 예배 드리며 기도하는 외적인 행위 차원이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거룩 안에 명령이 있습니다. 레위기 192절로 18절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몇가지 실천사항을 말씀하시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 거룩은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것이지만 이 일에 너희도 동참하라는 명령입니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회개하는 예배를 드리라.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를 다 거두지 말라.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위한 배려입니다.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지 말고, 서로를 속이지 말아라, 함부로 거짓 맹세하여 너희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라.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이웃의 피를 흘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두둔하거나 권세 있는 자라고 편들지 말고 공정하게 대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러한 사항들이 거룩함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과 일상을 보내고 잠자기 전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행동이  닿는 곳을 보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임명예배를 드립니다. 집사와 권사로 임명 되는 분들은 개인생활, 사회생활, 교회와 가정에서 모범이 되고 헌신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는 일은 우리에게 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 아프고 힘들더라도 사랑해야만 하는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사들은 매주일 아이들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 수고함을 통해 아이들은 이 시절에 배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배하는 기쁨을 배워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처럼 시대적 책임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사명은 참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주어진 자리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어도 맡겨진 임무를 해 나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하고 익숙한 것을 더 찾게 되지만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믿음의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인본주의적 방식이 강해지는 시대가 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견고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음세대가 하나님 중심으로 견고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인도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의 우상이고, 어둠과 죄악 백성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아론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여 지은 죄를 씻게 하였지요. 사무엘은 이스라엘 350여년간 지속된 영적 암흑기의 시대에 다시금 거룩한 역사를 위한 그 사역을 감당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금요예배 결단 찬양으로 불렀던 <주의 인자하신> 이란 찬양의 가사가 계속 마음에 머물러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의 인자하신 그 사랑이 내 생명보다 나으며 위로하시는 주 손길이 내 눈물보다 귀하다. 변함이 없는 주 임재가 내 근심보다 가깝고 주님 흘리신 그 보혈은 내 상처보다 진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삶으로 이어진다면 주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낫고 주의 흘리신 보혈이 내 상처보다 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예배를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뭇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구나.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거리는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로 인해 땅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된다면 이는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라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각변동으로 쓰나미 징조만 보여도 사람들은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두려워 떨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1절과 7절에서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이스라엘과 함께 계심을 나타냅니다. '주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라는 표현에서 구름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 나온 직후부터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임재 가운데 영적인 눈이 열린 사건이 소개됩니다.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예루살렘 성을 겹겹히 에워 쌓았을때 엘리사의 종은 새벽에 일어나 성밖을 내다 보다가 너무 놀라서 그 상황을 엘리사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간구합니다. 그리고 종의 눈이 밝아지자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며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조율 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생의 주인과 삶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3 5 9절에서 진실로 주님은 거룩하시도다 후렴구를 통하여 시편의 기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첫번째 어구에서는 찬양의 대상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지음 받는 피조물이라면 찬양의 대상이 될수 없고, 합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 어구와 세번째 어구에서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참 친근감으로 느껴집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자신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주를 높이 기리고,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속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 상황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맡겨 주신 이웃을 사랑으로 보듬어 그분의 뜻에 따르는 삶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불에 비유합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다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로 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위에 임했다고 증거합니다. 초대교회의 설립도 불같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8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행한 대로 벌을 내리시기도 하셨지만, 결국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AW 토저 'GOD'이라는 책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무 보호책이 없는 죄인들에게 떨어질 때 그 공의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속성은 이 선고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무한한 고통 중에 돌아가셨을 때 이 크신 하나님도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다." 이것은 공의와 긍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의 거룩 앞에 서면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갈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있습니다. 시편 99편은 우리가 이제껏 누구를 위하여 살아 왔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 온 삶은 헛된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누구를 드러내고 계신가요? 사명자들은 이 땅의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사명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도시에 나무가 베어지고 그 숲이 황량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남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새 일을 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지자들이 설교했지만 최종적 결과는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인류의 희망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뤄 나가는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 주시고 허락하신 사명에 응답하는 삶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주도 시편 99편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며 기쁨을 회복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23/2025 | 주현후 제 7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the Humble

시편 37:1-11

본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할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정치적인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영적 지도자로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시라는 점에서 다윗이 노년에 이르러 쓴 시편으로 해석합니다. 다윗은 영적 지도자로 당시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며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도록 교훈합니다.

 

시편 37편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본 시편을 쓴 다윗은 악을 일삼는 자들이 잘 산다고 불평도 하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시인의 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이 불의한 세상을 보며 불평하고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불공정한 일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공정한 사회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고, 과정은 공정하고,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노력한 만큼 결과과 좋지 않을 때도 있고, 불공정한 일들을 겪기도 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형통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고, 악인이 더 잘 살고 잘 될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지도자로서 다윗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형통한 시기를 보낼 있지만, 영적 지도자의 관점에서 보면 백성들의 신앙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세상의 형통과 성경적 형통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인 형통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내 소원의 성취나 만족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과 올바른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느냐?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잠언을 보면 "너는 네 원수가 넘어져도 박수치며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걸려 넘어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라. 너의 기뻐하는 모습을 주께서는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혹 주께서 네 원수에게 내렸던 진노를 너에게로 돌리실까 두렵구나.(잠언 24:17-18) 이 말씀은 원수에 대한 악한 마음을 경계하고 자신을 성찰하라는 교훈입니다. 다윗도 본 시편에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주님만을 굳게 믿고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3 주님만을 굳게 믿고 선하게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심은 대로 거두면서 땅 위에서 형통한 삶을 누릴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려서 열매는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면 꾸준하고 성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매일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것처럼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품고 행하라고 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형통하게 되는 것에 불평도 부러움도 갖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며 선한 행실의 씨를 뿌리라고 권면합니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와의 교제를 통해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와 기대가 다른 응답일지라도 주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타락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땅 위에서 선을 행할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형통한 삶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오직 주님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4 오직 주님만을 기뻐하라. 그러면 주께서 네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성도가 마음을 두고 집중해야 할 대상은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주님은 아버지의 기쁨을 나타내시는데,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의 기쁨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가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느껴 불평했고 결국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며 아들을 기쁨으로 맞아 주었습니다(누가복음 15:24)

 

오늘날 세상은 서로의 고통이 더 크다고 외칩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정치 색깔이 과거에 비해 뚜렷해 졌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지만 서로의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굳은 심지로 인하여 오히려 서로를 향한 언어나 행동은 더 거칠어 졌습니다. 신앙도 양극화 되어 서로의 소리만을 이야기합니다. 만일 믿음도 영적인 우월감으로 보상 받으려고 한다면 시시각각 마음안에 불청객이 찾아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보시며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이며, 믿음생활의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때에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기쁨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스바냐 3 17절입니다. "네 안에 계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승리의 용사시다. 그분께서 너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노래를 부르시며 너로 인해 기뻐하실 것이다."

 

신앙생활에 이 기쁨이 없다면 그 삶이 얼마나 메말라 가겠습니까? 기쁨 없이 맡겨진 일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피곤한 일이 되겠습니까?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하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배워 나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 주 앞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시기 바랍니다.

 

7 주 앞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묵묵히 참고 그분을 기다려라. 악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더라도 조금도 초조해 하지 말고, 악한 계획이 잘 풀려나간다고 전혀 불평하지 말아라.

 

마음의 고요함은 신뢰로 부터 옵니다. 낯선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 본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를 경험하기에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가 들어 간다고 하셨는데 어린아이로 비유하신 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아이들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우리가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의존은 다른 말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때에 이전에 경험하지 않던 말씀들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 굶주리고 슬피우는 사람, 사람들이 배척하고 미워하고 누명을 씌우는 사람을 찾아가셔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병든 자를 고쳐 주셨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들을 경멸하는 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이들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감당 할수 없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예수를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선택받은 유대인이나 선택의 기회가 없던 우리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은 기회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악한 행실의 결과에 있어서도 공평하게 다루십니다. 다윗은 악을 일삼는 자들은 들풀처럼 속히 시들어 버리겠고, 푸성귀처럼 금방 말라버릴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뿌리째 뽑혀 멸망할 것이고, 눈 씻고 애써 찾아볼지라도 그들의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행악자들이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번영과 성공을 누리는 부조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그 일을 시기하여 그 자신마저 죄에 빠질 것을 우려하며 참고 기다리리라는 것입니다. 8절은 모쪼록 화를 가라앉히고, 분을 속으로 삭여라. 이런 것들은 사람을 악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하나님은 단순히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악인이 돌이키기를 원하시고, 또한 고난 받는 의인을 보호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악과 불의를 보고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은 온유합니다. 온유하다라고 할때에 우리는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순종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온유한 사람은 불평이 더 많아진 세상, 자기 권리를 더 주장하는 세상에 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논리가 가득한 세상에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앞장 섭니다. 온유함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삶입니다. 그 힘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힘을 이끌어 내시고 부어 주십니다. 이번 한주도 주안에 있는 참된 평안을 누리시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보내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땅 위에서 평안을 누리며 오순도순 잘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