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2/2025 | 주현 후 제 2주
새해 말씀 시리즈 2 "있는 모습 그대로" "Just As You Are"
시편 8:3-6
이 사진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입니다. 미켈란 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 벽화는 그가 33세에 그리기 시작해서 4년의 시간 동안 목과 머리를 뒤로 젖힌채 작업을 마친 작품입니다. 벽화의 그림을 요청을 받고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온 열과 성의를 다하여 작품에 임하게 되었는데 벽화 그리기에 몰두했던 그가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명을 한 뒤 성당 문을 나서던 순간 그는 눈부신 햇살과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작품임을 깨닫게 되자, 그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서명 같은 것을 남기시지 않았는데 기껏 작은 벽화를 그려 놓고는 나를 자랑하려 했다니" 그는 즉시 되돌아가 천정 벽화에서 자신의 서명을 지워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속에서 그의 믿음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시편의 기자는 하늘, 땅, 자연만물, 하늘의 달과 별들, 무한한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비교할 때, 인간은 너무나 작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히 생각하시고 보살펴 주시며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8:3 주께서 주의 손가락으로 친히 만드신 저 하늘과 또 창공에 매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우러러 바라봅니다. 4 참으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듯 생각해 주시며, 과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토록 보살펴 주시는지요!
수천 년 전 다윗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해를 보고, 공기와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내가 특별히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 손가락'으로 창조하신 하늘과 달, 별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크리스천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히브리서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과 함께 히브리서의 구절도 함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8:5 주께서는 사람을 신적인 존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지만,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9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지만, 마침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이기고, 지금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채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를 우러러 봅니다. 정녕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약 성경에 매우 해박한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가 기록한 하나님이 행하신 비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다'는 구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낮아지셨지만"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지만 그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신" 상태로 아버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가 얻은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냅니다.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찬양의 시인데, 히브리서의 구절은 시편 8편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광과 존귀'를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실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경험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분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잠깐 동안 낮아지신 이유를 첫째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주기 위함이며, 둘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귀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 보시겠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평생 마귀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히 2:15)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인간 안에 자신의 형상을 새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억눌린 인간을 찾아오셨고, 그분의 오심으로 인간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82년 12월 4일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받는 간호사들은 울었고, 태어난 아이를 안아 주라는 의사의 권면에 엄마의 반응은 이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고 데리고 나가 달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이 아이를 받아 들이기 까지는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에게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의 부모는 절망과 충격속에서 틈만 나면 눈물을 쏟았습니다. 또한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인생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원망과 고통속에서 몸부림칩니다. 8살이 되었을때에 이 소년은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자 마음 안에 절망과 파괴적인 충동들로 인해 3번이나 자살 시도를 합니다. 그는 어릴때 부터 팔과 다리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15살 때에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셨고, 그의 입술을 통하여 절망과 불행속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주님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호주의 복음 전도자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현재)입니다.
닉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할 때, 자신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체적 약함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약함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잠깐 동안'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닉을 구속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팔과 다리가 없는 몸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은 그의 몸을 고쳐주지 않으셨지만, 닉은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도 사용하십니다. 당신이 느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부족함과 상처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죽음이 죽어버린 사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땅에서 영원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한줌의 흙만 남게 되기에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함으로 인해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삶을 영위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잊으시지 않지만 우리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잊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누가 크냐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형제라고 부르신다고 말씀합니다. 2장 11절 보시겠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또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속한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구절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가 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한 피로 형제 삼아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각자가 믿음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약함을 가진 바울은 오히려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 드러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약함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삶에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고백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기꺼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 개역개정)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도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히 죽음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잘 믿는데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십니까? 그럴 때일수록 영광의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셨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다. 6 또 주께서는 손수 지으신 것들을 사람이 일일이 다스리게 하시고, 온갖 피조물들을 사람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세와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단순히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내면을 채우지 못하여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영적 공허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과 능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의 거대한 하늘, 캄캄하고 광대한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손수 만드신 하늘 보석, 제자리에 박아 넣으신 달과 별들을, 그리고 한없이 작은 내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 하지만 우리는 신들보다 조금 못한 자들, 주님은 에덴의 새벽빛으로 빛나는 우리에게 손수 지으신 세상을 맡기시고 창조의 임무를 되새기게 하셨습니다."(메세지 성경)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면 그저 감사와 은혜 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인간을 회복시키고,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모두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또 다른 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새해에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문제와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맡겨진 책임을 적극적으로 다하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믿음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강렬한 빛과 같습니다.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의 말 한마디가 어둠을 밝히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며, 새로운 생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1/5/2025 | 성탄 후 제2주
새해 말씀 시리즈 1 "우리는 어디서 출발 했는가?" "Where did we start from?"
시편 139: 13-16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시작이자 기회입니다. 서로의 속도가 다를지라도, 주님께 드리는 모든 섬김과 예배 가운데 진심을 담아 한해를 시작하길 소망합니다.
작년에 52개의 주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2024년 성탄주일에 주보를 준비하면서 순번이 한주씩 밀리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시 지난 주보들을 살펴보니, 종려주일 12번 주보 이후 13번을 건너 뛰고 부활주일 주보를 14번으로 기록하는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주보 번호가 하나씩 밀린 상태였고 성탄 주일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을 53번의 번호로 마무리해야 할지, 아니면 51번을 두 번 기록하고 52번 주보로 마쳐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온전하게 주보를 마치기 위해서는 51번의 주보를 2개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1는 2라는 분명한 명제를 믿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사랑의 개념 안에서는 우리의 자아가 죽고 주님만 드러낸다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생각끝에 결국 2024년도 주보는 52번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한 창조의 계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삶에도 사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실수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은 단지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창조하신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음을 믿고, 그 뜻을 따라 겸손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새해 말씀 시리즈는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가'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이 한 문장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게 됩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선택하게 될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13번 주보의 실수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연말에야 알게 된 것처럼, 결국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출생과 죽음에 대해 정직하게 대면해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것을 목격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에 담긴 성경의 권위를 믿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궁금증을 품습니다. "왜 그런지?", "이게 무엇인지?" 등 수많은 질문을 부모에게 던집니다. 진리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와 같은 궁극적인 물음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성경은 간단히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길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예수님의 선언 가운데 여섯번째 진술은 ‘내가 곧 길이요’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길이 되신 주님, 그 길을 우리는 기웃거리기 보다 용기 내어 따라가야 합니다. 홀로 걷는 길 같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당시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이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 주자 수제자 베드로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주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런 다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졸지에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사단이라 불렸습니다.
최초의 인류의 죄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는 교만의 표출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단이 선악과 나무 앞에서 했던 질문은 죄를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유롭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참된 기쁨과 자유를 주셨는데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형상을 주입시켜서 에덴의 언약을 깨뜨리게 했습니다. 오늘날 시대에도 사단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우리의 관점으로 판단하게 하고, 의심하게 만들고, 부당하게 느껴지도록 유혹합니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자신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라고 주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에 동의는 하지만 삶에서는 정작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곧 길이니,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청지기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데 우리가 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강하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의 기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생명 여정을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로 찬양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시편의 인간 창조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인간의 출생 과정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몸속의 모든 장기는 단순히 오장육부를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면의 정서, 의지, 개성까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139:13 진실로 주께서는 내 몸 깊은 곳의 모든 장기를 다 만드셨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 몸을 온전히 빚어 주셨습니다. 139:14 이 몸이 이토록 신기하고 오묘하게 빚어졌으므로, 주께서 하신 일이 하도 경이롭고 놀라워, 내가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솜씨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하신지, 내 영혼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솜씨에 감탄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위대하고 놀랍다고 표현합니다. 그 결과 모든 장기와 심장을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만 터져 나오는 감탄입니다.
139:15 내가 은밀한 어머니 뱃속에서 빚어지고 있을 그때에, 곧 내가 땅 밑 깊은 곳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짜 맞추어지고 있을 그때에도, 주께서는 이 몸의 형체를 이미 다 알고 계셨으니, 내 몸의 뼈마디 하나하나인들 어찌 주님 앞에 숨겨질 수 있겠습니까! 139:16 내 몸의 형체가 아직 갖추어지기도 전에, 주님의 눈은 나의 온전한 모습을 다 보셨습니다. 나를 위해 정해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이 주님의 책에는 이미 다 기록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은 생명을 품어내는 사랑의 장소입니다. 엄마의 뱃속에서 모든 생명은 탯줄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숨을 쉬며 10개월 동안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에 나올 때에는 탯줄을 끊고 새로운 방식으로 숨을 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세상에 태어납니다. 시편 51편 5절은 "보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임신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태어난 이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마주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안에서만 아니라, 구속의 계획 안에서도 온전하게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질문에서 감탄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감탄이 없는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강점이 교만을 부추기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약점은 자신감을 잃게 하고 자격지심에 빠지게 합니다. 수천 년 전, 이 시를 썼던 시인의 믿음과 통찰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디서 부터 우리가 왔는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참된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벨론의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 유년기든, 청소년기든, 청년기든, 혹은 청장년기든 그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 앞에서 세상의 '바벨론'이라는 영적 탯줄을 끊고 살아가라고 2025년의 새로운 시간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또 다시 참된 인생을 부여 받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시작된 시간도 점차 지나가고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발견된 구원은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세상의 눈물과 고통, 절망과 죽음을 거두어 가신 주님은 우리가 한해 동안 겪는 모든 일들 속에서 새로운 출구가 되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비웃고 어리석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믿음이라는 기적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깊이 아시기에, 그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계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이 있듯,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도 다양한 시기와 변곡점이 있습니다. 2025년이 어떤 이에게는 봄날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겨울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각자의 계절에 맞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은혜와 도우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어린이에게 노년기의 성숙함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온전한 삶의 배움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상황에 맞춰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우리가 겪는 모든 계절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십니다.
새해가 시작되며 새로운 결단을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우리에게 믿음의 도전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이들은 점점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계절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과 삶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고, 새해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2/29/2024 | 성탄 후 제 1주
순종의 여정, 하나님의 뜻을 따라 "Journey of Obedience, Following God's Will"
누가복음 2:41-52
한해의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분주한 세상에서 때때로 그 은혜를 잊고 살때도 있었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소년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하시는 이야기입니다. 41절과 42절 보시겠습니다. 41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예수의 부모는 관례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누가는 사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이와 같은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매년마다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예수께서 열두살 되던 해에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는 일상적인 순례의 여정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자란 나사렛 동네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146km 정도 됩니다. 이 정도의 거리는 케임브리지에서 로드 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Providence, Rhode Island)나 뉴햄프셔주 맨체스터 (Manchester, New Hampshire)정도가 됩니다. 교통편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에 꽤 긴 거리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13세가 되면,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소년은 회당의 회원이 될 수 있던 것이지요. 탈무드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소년들은 13세가 되기 1, 2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미리 올라가 율법의 아들이 되기 위한 행동을 배웠다고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가 성전에 올라간 것은 이러한 교육을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절기를 마친 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떠났습니다.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걷다 보니 하룻길쯤 가서 예수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당연히 예수가 자신들을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에는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우리는 쉽게 예수님의 마음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자, 그들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약 주님의 마음을 잃었다면, 우리는 다시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돌아가 회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가는 길에는 여리고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도중 강도들에게 한 사람이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2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룻길"이라는 표현은 하루 정도의 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나 그 근처까지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리고 길은 좁고 험하며 외딴 곳이 많아 밤에는 강도나 도적들이 활동하기 적합한 곳이었으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돌아가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를 샅샅이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사흘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소년 예수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48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했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 속을 태우느냐? 나와 네 아버지는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던지는 질문과 답변에 놀라며 그의 지혜와 슬기에 크게 경탄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 과정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이루며 자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지혜와 슬기가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 속에서 예루살렘의 율법 선생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슬기가 있음을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전을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소년 예수가 메시야로서의 신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지속적으로 인지하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열두살부터는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오가며 절기를 지켰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경건한 삶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앞으로 펼칠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가 쓴 '한나의 아이'는 한 사람의 진솔한 회고록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경 쓰는 것은 인간으로서 하워스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 그리스도인 하워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려움 가운데 기도 생활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믿음이 자신의 삶의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회고록은 나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은 세상 속에서 성도가 외적인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경건한 삶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길이 참 멀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의 고백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아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더욱 깊은 도전이 됩니다.
51절을 보면, 소년 예수는 부모를 따라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가 부모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일상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당시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12년 전 천사가 전해 준 기쁨의 소식만큼은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받았던 기쁨의 소식을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31-35에서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1:31 너는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1:32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잇게 하실 것이다. 1:33 그는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 역시 영원무궁토록 이어질 것이다.”....1:35 천사가 대답했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너를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누가복음 1:31-33,35)
예수가 성전에서 지혜를 드러내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모습을 통해 마리아는 구속의 신비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천사의 말씀을 마음에 더 깊이 새겼을 것이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본문 51절에도 보면, 소년 예수의 어머니가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마음 속에 소중히 담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 US 산타크루즈 연구팀이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은 그룹과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 그룹을 두고 몇주뒤 본 풍경을 묘사하게 했는데, 사진을 찍지 않은 그룹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우리 뇌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보다는 자신을 위해 기억할때 기억을 더 잘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만약 매일 매일 인생을 변화시킬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 일상의 신비를 거룩하게 여길 때, 경건의 능력을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탠리 하워스(Stanley Hauerwas, 1940-현재)는 인생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인생을 '여러 시작과 하나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충실히 사는 법을 배우며, 그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소년 시절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년 동안 성급하지 않게 사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여러가지 도전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우리를 준비시키고 빚어가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49절입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저를 찾으셨나요? 제가 당연히 제 아버지의 집에 있으리라는 것을 왜 모르셨죠?” 한글성경에서 집으로 번역한 ‘토이스’는 헬라어 관사인데, 여격 복수로서 ‘것들’ 로 번역이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번역하면 ‘내 아버지의 것들에’ 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킹제임스 성경은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로 번역했고, 한글 성경을 비롯해서 다른 버전의 영어 성경은 ‘내 아버지의 집’(in my Father’s house)로 번역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내 아버지의 일에 순종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뤄할 장소가 나사렛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예수께서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뤄가야 할 구원의 일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50절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신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예수께서 성취해야 하는 사명은 마리아에게는 고통을 겪는 일이 될 것이고, 예수가 이루게 될 뜻은 배로 낳은 아이를 향한 인간의 감정을 끊어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마리아에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맡겨진 일을 순종하며 감당하는 가운데,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그 출생을 축하받고 기쁨을 나누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을 마칠 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태어난 날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기억하고, 고인이 되면 태어난 날이 아니라 마지막 날을 더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단순히 태어난 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낸 삶의 끝자락에서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순종이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께서 거하실 성전이 됩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예배하는 삶은 주 안에서 거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육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많고, 감정이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욕구를 거스르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흔적에 사로 잡히지 않고, 순종의 여정에서 주님의 마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생전에 그 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52절입니다.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성도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함께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리와 사람에 대한 도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고, 이웃 사랑과 도덕적 책임을 자각하며 성도의 삶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 둘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소년 예수는 그렇게 순종의 삶을 연습하며 공적 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는 날로 키와 지혜가 자라났고,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더욱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탄생 이전에 마리아의 용기 있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탄생을 위해 기꺼이 믿음으로 순종했고, 성육신 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처럼 임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인 아기 예수는 마리아에게는 유대 관습에서 오는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두려움을 덮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인생에도 저마다 각자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갈등을 마주할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훈련과 기도의 자리에 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주 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믿음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영혼의 기쁨을 누리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가정, 일터, 학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는 삶은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순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우리의 능력 밖의 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해도 잘 살아 내셨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사랑하는 교우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의 성도들로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22/2024 | 성탄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2 어둠을 밝히는 빛 The Light that Shines in the Darkness
이사야 9:2-7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시는 26세의 요제프 모르(Joseph Mohr)라는 오스트리아의 사제가 1816년,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에서 쓴 시입니다. 당시 교회 오르간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마음속에 떠오른 멜로디를 바탕으로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성탄절에 부르는 평화롭고 따뜻한 찬양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르 지역에서 평화의 메세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전쟁과 참호전의 일상에 병사들은 자연스레 지쳐갔고, 어느덧 1914년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참호에서 대치 중이던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어둠속에 묻혀 있던 각자의 참호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는데, 상대방 참호에서도 캐럴이 들려오자 누군가가 참호 위에 촛불과 전등으로 장식된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측의 수많은 병사들이 너도나도 참호 위로 올라왔고, 서로 포옹하고 담소를 나누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양측 참호 사이 버려져 있던 양군 시신들을 수습했고, 뒤이어 축구장을 급조해서 팀을 나눠 축구까지 했습니다. 밤이 되자 이들은 같이 캐럴을 부르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한 다음, 다시 각자의 참호로 돌아갔습니다. 이 기적을 이끌었던 노래가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라고 합니다.
찬양이 전해주는 힘은 이렇듯 음악이라는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세지가 됩니다. 두려움과 혼돈의 시간속에서 성탄의 기적은 서로의 마음에 평화와 어두운 곳을 밝히 비추는 사랑의 힘을 전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며 기쁨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한밤중에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일치할 때 기쁨으로 노래하지만, 그 뜻이 어긋날 때에는 실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내 뜻과 내 믿음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예술 작품들이 고통의 밤을 지나며 후대에 걸쳐 위대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시달리던 반 고흐의 작품들,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창조된 베토벤의 명곡들은 모두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 예술의 승화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4악장은 ‘환희의 송가’로 불리며, 듣는 사람들에게 글자 그대로 환희와 감동을 줍니다. 그 가사 중 일부는 성탄의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만인이여, 엎드려 빌겠는가? 세계여, 창조주가 느껴지는가? 별이 빛나는 하늘 저편에서 아버지를 찾으라! 별의 저편에 주님께서 반드시 계실 것이다. 환희여, 아름다운 하나님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리라!"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시대가 아닌 후대에 더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당시에도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에 도착했으나, 출산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밤은 어둠에 묻힌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오심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절망과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위로 그 영광의 빛이 비쳤도다. 농부들이 추수할 때 기뻐하듯이,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누듯이,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이 예언은 구원의 빛이 백성들에게 비춰질 날이 올 것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6절은 더욱 자세히 말합니다. "보라,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태어났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아들을 주셨도다." 여러분, 여기서 ‘태어난 아기’와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한 아들’이라는 두 표현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1531년 12월 24일, 종교개혁의 중심지인 비텐베르크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라는 제목으로 설교합니다. 한날 2번의 걸친 설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이 단지 역사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태어났다는 확신을 갖고 루터는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의 설교문을 보면 “이 아기는 내게 주어진 10굴덴 금화처럼,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며, 이 아기가 바로 우리의 구세주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당시 10굴덴는 독일에서 사용되던 금화로, 그만큼 확고하고 깊은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16세기 초 독일에서 노동자는 대개 한 달에 1에서 3 굴덴 정도를 벌었으므로, 10 굴덴은 한 사람의 수개월 또는 1년 치 급여에 해당할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하지만 주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의 수준이 아니라 그 보화를 온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태어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사야는 이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에게 4가지 이름을 부여합니다.
그 아기가 장차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니, 그분의 이름은 ‘기묘하신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불릴 것이다.
‘기묘하신 모사(Wonderful Counselor)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신성의 표현입니다. 예수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주어진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순간에도 우리의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확신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흔들릴 때에도 신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절실히 느낄수록, 주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기는 본래 연약한 존재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데,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칭호는 한 아기로 오신 것과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탄의 신비 가운데 참사람이자 참하나님이신 그분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친밀함과 훈계가 우리를 성숙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직접 찾아 오신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며 빛을 창조하셨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이 사실은 성탄에 담긴 가장 분명한 은혜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심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셨고, 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깨 위에 세상의 죄와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어깨 위에 놓인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치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은 모두가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분의 의의 옷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빛을 잃고, 잠시의 치장에 불과합니다.
기드온이 살던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두운 암흑기였고,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시기였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전쟁을 위해 선발된 300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은 지극히 초라한 숫자였습니다.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상대하려면 한 명의 군사라도 더 있어야 할 텐데, 하나님은 불필요한 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오직 믿음으로 남은 300명만을 선발하셨습니다. 이 숫자는 세상의 방법과 승리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단단한 마음도 부드럽게 변화됩니다. 인생이 평생을 짊어지는 고통과 수고라면, 주 안에서 우리는 그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내어주고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회복의 과정입니다.
오늘 성탄예배를 맞이하여, 5명의 아기들이 유아세례를 받게 됩니다. 유아세례는 부모와 교회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할 것을 결단하며 책임을 지겠다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듯, 세례를 통해 이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로 자라도록 인도할 것을 다짐하게됩니다. 부모는 태어난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아이와 마주하는 순간 순간을 소중히 다루며 사랑을 전합니다. 아이가 아플 때에는 내 살이 아픈 듯 느끼고, 아이가 성장하여 마주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부모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이를 맡기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불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빛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그 빛을 비추는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성탄절은 단지 우리만의 기쁨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해져야 할 기쁜 소식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비추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어둠에 묻힌 밤에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십시요. 평화를 애쓰는 그곳에서 성탄의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12/15/2024 | (대림절 셋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41 "분주한 세상 속에서 찾는 기쁨과 너그러움" Finding Joy and Consideration in a Busy World
빌립보서 4:4~9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잘 알면서도, 때때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상처로 인해 잠 못 자며 뒤척이기도 하고,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내면 깊은 곳을 밝혀 주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지난주 Emmanuel Gospel Center에서 열린 목회 연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인 2세 사역자가 북미 신앙 공동체를 연구하고 신앙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내용들을 의미있게 나누었습니다. 이민교회 안에서 1세대와 2세대가 동일한 말씀을 들음에도, 문화적 차이로 인해 동일한 단어 조차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어, ‘commitment’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한인 2세대는 개인의 의지적인 결정과 헌신, 자기결정을 중시하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반면, 1세대 들은 ‘commitment’가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에 대한 이러한 이해 차이로 인해 공동체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서로 다른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열려진 복음, 즉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통해 구별됨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이면서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며, 더 넓은 차원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첫째,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연결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참여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세기를 살아 내시고 현재 100세를 넘기신 김형석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교회 밖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의 일부입니다.
"1962년 봄학기에 하버드 대학에 가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라인홀드 니버가 와 있었습니다. 그분의 강의를 들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선조나 선배들 덕분에 세계 최고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것을 다 우리 것이라 여기고 우리끼리만 행복하고 즐겁게 누린다면 미국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선조들이 물려 준 부를 못살고 힘없는 나라들에 나눠 주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보내고 아시아에도 보내 그 나라들이 잘 살게 되면 미국은 더 잘살게 되어 있습니다. 나눠주지 않고 움켜 쥐려고 하면 위험합니다."
62년 전, 라인홀드 니버는 하버드 강의에서, 부유함을 독점하려는 위험성과 나눔의 가치를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현재 미국과 한국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신앙 공동체가 주변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탐구하면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유형을 구분하는 작업을 통해 후대에 탁월한 고전을 남겼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너그러움은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참된 기쁨이 있어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너그러운 태도가 흘러 나오게 됩니다. 너그러운 태도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인식하고 있을 때 비롯되는 행동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과 너그러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우리의 마음을 걱정거리에 두다 보면, 마음 안에 더 큰 염려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의 어려운 문제 앞에서 주님의 기쁨을 잃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신앙 생활이 세상이 만들어낸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들에 영향을 받아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든 걱정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걱정과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구하면, 모든 인간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1611-1691)가 쓴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그 당시 16세기 프랑스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엄청나게 불안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니콜라 에르망(Nicholas Herman)인데, 그가 어느날 수도원에서 평수사로 생활하며 '로렌스 형제'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에서 주방 일과 신발 수선을 하던 그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경건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수도원에서 주방일은 가장 힘든 곳이었는데 그로 인해 수도원에서 주방이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깨졌습니다. 그는 부엌일이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될때에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름도 없이 평범한 일상에서 실천한 하나님의 임재 연습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뛰어난 글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실천했던 그의 연습들이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당시 모든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의 영적침체의 책에 실린 구세군 교회의 대장으로 섬겼던 존 조지 카펜터(John George Carpente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과 아내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던 딸, 동양의 선교사로 청춘을 바친 사랑하는 딸을 어떻게 잃었는지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딸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부부는 당연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면 이 아이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적극적으로 고쳐달라고 하지 못하고 원하시면 고치실 수 있습니다' 라고만 했습니다. 그 이상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는 6주동안 기도했고 어여쁜 딸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딸이 죽던 날 아침 존 카펜터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정말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하네. 아내는 자신도 그렇다고 하면서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평강이예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평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어버린 슬픔속에서 느껴지는 평강은 어떤 것일까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평강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평강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이해를 넘어서 도저히 이성적으로 납득할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이 부부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기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당시 헬라 문화에서 중요시되었던 덕목들을 생각하면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거룩한 것, 사랑스러운 것과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무슨 덕이나 칭송이 있든지 모쪼록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영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도 칭송받는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우선시 하면서도 세상속에서 덕을 쌓는 삶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를 염두 해 둔 표현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을 삶에 녹여내는 것은 세상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삶의 간격을 줄여가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이 아니라 평생 추구해야 할 거룩함입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 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기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자족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9:22-23)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책임은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여전히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십니다. 희망이 위태로워지는 사회 속에서, 교회는 등불을 밝혀 하나님의 빛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세상의 소망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사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일생을 바쳐 훈련해야 할 일입니다. 두려움과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날 자신에게 없는 평안과 기쁨을 가득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주의 깊게 보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과 너그러움을 실천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의 삶에 하나님의 평강이 풍성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