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2025 | 성령강림 스물 세번째 주일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누가복음 23:33~43

오늘 본문은 인류의 가장 어두운 순간 갈보리 언덕의 장면입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예수님이 남긴 첫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무지와 죄를 향한 용서하심 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면 자신들을 구원해 보라고 조롱하는 관원들도, 예수님을 못박았던 군병들도 모두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한사람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를 비방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행악자라고 하는 단어를 레스테스 λστής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반역 정치범을 가리킬때 사용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 행악자는 로마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마음이 강팍해져서 사람을 해치거나 약탈을 자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정치적 폭동에 가담했다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하며 분노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여전히 갈보리 언덕과 같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수많은 죄와 상처들이 우리 삶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원망과 미움 속에 갇혀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대상이 타인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실망과 미움 속에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 깊은 슬픔과 연민에 빠지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잊어버리고 나의 감정에 갇혀 살아가기도 합니다.

 

한편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는 죽음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보았고, 죄가 없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회개하며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영원한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말씀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고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떳떳하게 설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소망이 되심을 모른 채 여전히 '저 사람 때문에', '좋지 않는 이 상황 때문에' 라는 불평과 원망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삶은 영적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았던 가룟유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영원한 절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갔다면, 그의 삶은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잡히시는 날 그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끌려 갈때에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까지하며 부인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죄값을 다 치르시고 부활의 몸으로 다시 찾아가셔서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베드로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크신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명의 근거에는 하나님께 받는 용서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죄 용서가 없이는 인간은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용서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불의한 종의 비유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인간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왕은 일만달란트 부채를 진 종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본질적인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보고, 자신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는 그 사람을 감옥에 갇혀 있게 하였습니다.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본질적인 죄 용서를 받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관계속에서의 잘못을 마땅히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잘하고 있는지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이 평생 드려야 할 기도가 있다면 저희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부채를 당연히 탕감해 주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있게 했습니다일만 달란트는 하루동안 6천만명이 일한 품삯이기에 한 사람이 일한다고 가정하면, 2십만년 동안 일해야 하는 금액입니다. 그에 반해 백데나리온은 한 사람이 백일 일한 품삯 정도입니다. 그러니 그 광경을 지켜본 다른 종들이 기가 막혀, 왕에게로 가서 그 종이 한 짓을 낱낱이 일렀습니다. 왕은 크게 진노했고, 용서해 주었던 그 종을 불러서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도록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매일 용서함을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때 가능해 집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의 삶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지만  20년 후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시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진심으로 회개한 것을 확인한 후에 자신을 드러내며 용서와 회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들이 회개한 그 자리는 용서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용서는 결코 가볍거나 쉬운것이 아니지만 진정한 용서안에서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가 나타납니다.

 

서로를 폄하하고 미워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통과 핍박속에서도 믿음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복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움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어둠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흔들리는 순간에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는 것을 예표합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어린양의 제물로 피를 흘려 자신의 죄의 형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은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믿을때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 지고, 회개를 통하여 묶고 있던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 이전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의 규칙이었다면, 주님은 새 언약을 받은 성도가 따라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5:38 ○ “또 모세의 율법에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쓰여 있습니다. 5:39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똑같이 앙갚음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의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당신의 다른 쪽 뺨도 대주십시오. 5:40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십시오. 5:41 누가 당신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기꺼이 십 리라도 같이 가 주십시오. 5:42 당신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고 하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5:38-42)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 짐 엘리엇이 에콰도르 인디언 지역에 순교한 후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신뢰하고 2년뒤 딸과 함께 남편을 잃은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 선교 사역을 펼쳤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녀의 삶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눈코 뜰 새없이 바빠서 주저앉아 신세 한탄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나를 죽이려는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선물로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절망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붙들린 삶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열여섯 살부터 일기를 써서 자신의 삶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분주하고 지친 삶,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는 삶의 순간에도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중에 언젠가 당신의 강하신 손이 철저히 제가 홀로 서야 하는 곳으로 저를 인도할 것입니다. 홀로, 오직 인자하신 내 사랑 당신을 위해서만. 예수님만 볼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미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은 모르지만 제 영은 당신 안에서 완벽한 집을 봅니다.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지금 제 모든 바람은 당신만을 향해 있습니다. 어디로든 어떻게든 인도해 주십시오. 당신을 믿습니다.”《엘리자베스 엘리엇-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살아가다 보면 관계속에서 아픔과 상처, 실수와 실패가 삶에 쌓여가게 됩니다. 때로는 숨겨진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 조차 어려워 혼자 외롭게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아픔과 실패라도 하나님께 받는 용서함의 은혜는 우리를 삶에서 회복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험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말과 행동에 거침이 있을 수 있지만,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음이 깊어진 삶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성품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고통의 쓴 맛을 아는 사람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끌어 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용서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손에 붙들릴 때, 우리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이 회개한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깨닫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속에서 살아 가야하는 삶은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의 빚을 나누는 삶 뿐입니다. 부르신 자리에서 사랑을 선택하며 용서함 받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시길 축복합니다.


11/16/2025 | (성령강림 스물 세번째 주일)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누가복음 23:33~43

오늘 본문은 인류의 가장 어두운 순간 갈보리 언덕의 장면입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예수님이 남긴 첫번째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무지와 죄를 향한 용서하심 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면 자신들을 구원해 보라고 조롱하는 관원들도, 예수님을 못박았던 군병들도 모두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한사람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를 비방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행악자라고 하는 단어를 레스테스 λστής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반역 정치범을 가리킬때 사용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 행악자는 로마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투쟁하다가 마음이 강팍해져서 사람을 해치거나 약탈을 자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정치적 폭동에 가담했다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하며 분노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여전히 갈보리 언덕과 같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수많은 죄와 상처들이 우리 삶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원망과 미움 속에 갇혀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대상이 타인만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실망과 미움 속에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 깊은 슬픔과 연민에 빠지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잊어버리고 나의 감정에 갇혀 살아가기도 합니다.

 

한편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는 죽음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보았고, 죄가 없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회개하며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영원한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말씀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고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떳떳하게 설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소망이 되심을 모른 채 여전히 '저 사람 때문에', '좋지 않는 이 상황 때문에' 라는 불평과 원망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삶은 영적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았던 가룟유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영원한 절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갔다면, 그의 삶은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잡히시는 날 그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끌려 갈때에는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까지하며 부인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죄값을 다 치르시고 부활의 몸으로 다시 찾아가셔서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베드로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크신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명의 근거에는 하나님께 받는 용서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죄 용서가 없이는 인간은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기 전까지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용서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불의한 종의 비유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인간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왕은 일만달란트 부채를 진 종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본질적인 죄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보고, 자신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는 그 사람을 감옥에 갇혀 있게 하였습니다.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본질적인 죄 용서를 받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관계속에서의 잘못을 마땅히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잘하고 있는지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이 평생 드려야 할 기도가 있다면 저희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부채를 당연히 탕감해 주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있게 했습니다일만 달란트는 하루동안 6천만명이 일한 품삯이기에 한 사람이 일한다고 가정하면, 2십만년 동안 일해야 하는 금액입니다. 그에 반해 백데나리온은 한 사람이 백일 일한 품삯 정도입니다. 그러니 그 광경을 지켜본 다른 종들이 기가 막혀, 왕에게로 가서 그 종이 한 짓을 낱낱이 일렀습니다. 왕은 크게 진노했고, 용서해 주었던 그 종을 불러서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도록 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매일 용서함을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때 가능해 집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의 삶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 상인에게 팔려갔지만  20년 후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다시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진심으로 회개한 것을 확인한 후에 자신을 드러내며 용서와 회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들이 회개한 그 자리는 용서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용서는 결코 가볍거나 쉬운것이 아니지만 진정한 용서안에서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가 나타납니다.

 

서로를 폄하하고 미워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통과 핍박속에서도 믿음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복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움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어둠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흔들리는 순간에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구약성경이 묘사하는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는 것을 예표합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어린양의 제물로 피를 흘려 자신의 죄의 형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은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믿을때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 지고, 회개를 통하여 묶고 있던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 이전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의 규칙이었다면, 주님은 새 언약을 받은 성도가 따라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5:38 ○ “또 모세의 율법에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쓰여 있습니다. 5:39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똑같이 앙갚음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의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당신의 다른 쪽 뺨도 대주십시오. 5:40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십시오. 5:41 누가 당신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기꺼이 십 리라도 같이 가 주십시오. 5:42 당신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고 하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5:38-42)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 짐 엘리엇이 에콰도르 인디언 지역에 순교한 후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신뢰하고 2년뒤 딸과 함께 남편을 잃은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 선교 사역을 펼쳤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 앞에서도 하나님은 그녀의 삶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눈코 뜰 새없이 바빠서 주저앉아 신세 한탄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나를 죽이려는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선물로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절망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붙들린 삶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열여섯 살부터 일기를 써서 자신의 삶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분주하고 지친 삶,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는 삶의 순간에도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중에 언젠가 당신의 강하신 손이 철저히 제가 홀로 서야 하는 곳으로 저를 인도할 것입니다. 홀로, 오직 인자하신 내 사랑 당신을 위해서만. 예수님만 볼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미래를 위한 당신의 계획은 모르지만 제 영은 당신 안에서 완벽한 집을 봅니다.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지금 제 모든 바람은 당신만을 향해 있습니다. 어디로든 어떻게든 인도해 주십시오. 당신을 믿습니다.”《엘리자베스 엘리엇-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살아가다 보면 관계속에서 아픔과 상처, 실수와 실패가 삶에 쌓여가게 됩니다. 때로는 숨겨진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 조차 어려워 혼자 외롭게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아픔과 실패라도 하나님께 받는 용서함의 은혜는 우리를 삶에서 회복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험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말과 행동에 거침이 있을 수 있지만,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음이 깊어진 삶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성품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고통의 쓴 맛을 아는 사람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끌어 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용서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손에 붙들릴 때, 우리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이 회개한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깨닫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속에서 살아 가야하는 삶은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의 빚을 나누는 삶 뿐입니다. 부르신 자리에서 사랑을 선택하며 용서함 받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시길 축복합니다.


11/9/2025 | 성령강림 스물 두번째 주일

네가 나를 믿느냐 Do You Believe This?

누가복음 20:27~38

요즘처럼 많은 것을 예측할 있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통제할 없는 현실은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내가 결정하고 관리하여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상황이 불안해 지면 믿음도 흔들리게 됩니다. 언제까지 버티고 견뎌야 하나' 라는 불편이 현실을 버거워 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요약하면 여자가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지 못한 남편이 죽자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의 형제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일곱 형제에게까지 반복되고 결국 여자도 죽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제 부활이 있다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곤욕스런 질문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없는 상황을 전제로 질문을 것이기도 하고, 가족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모세법을 이용해서 부활 교리의 모순을 지적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의 진리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유대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사장 가문의 귀족층이었습니다. 그들은 풍족한 현실의 삶에 만족했기 때문에 부활을 바라보지도 믿지도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믿음을 세상의 차원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 나라는 다른 차원이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의 때에는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일이 없다', ' 이상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비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죽음 이후 삶이 정말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죽음 이후에 영원한 죽음이 있고 죽음의 세력이 손댈 조차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의 삶과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의 삶의 목적은 같을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땅에서 믿음이 흔들릴 ,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팀켈러는 왕의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포기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하셨다. 먼저 약한 인간이 되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달리셨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우리도 약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돌아와 우리를 회복된 세상으로 데려가실 사랑이 미움을 완전히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이길 것이다.”《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십자가는 주님 없이 살수 없는 믿는 자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도 우리 없이는 살수 없기에 죽음의 고통을 견디신 것입니다. 사람의 출생은 세상에 나와 출세하는 삶이 목적이라면 주안에서의 탄생은 하나님과 내가 끊어질 없는 관계가 것입니다.

 

내가 통제할 없는 현실 앞에서 찬송 곡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어 다시 있게 일어 서게도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은 인생의 방황속에서도 방향이 되어 주시고,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기도 합니다. 부활은 논리로 설명되거나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면, 복음도 믿음도 헛되고 죄사함도 없으며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은 영원히 죽는 것이며, 영원한 희망이 없다면 크리스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저마다 달라도 마지막 운명은 같습니다. 죽음 이후 우리는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부활 진리를 믿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삶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한 삶이 무엇입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논쟁으로 갖고 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답하셨습니다. 자녀는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관계에서 살아갑니다. 중심에는 사랑과 신뢰가 있기에 주어진 삶이 자유해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라, 하지말라 가르침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해주지만 구원을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꾸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함의 완성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현재는 주님을 따르며, 주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장차 부활의 때에 완전히 변화될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질상 허물과 가운데 죽었던 존재였지만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것입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경험을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허벅지 관절은 삶을 영위할 있는 힘의 상징이고 삶의 기초였습니다. 평생 붙들고 살았던 야곱이 의지하던 힘을 하나님께서 꺾어지게 하셨습니다. 이후로 일평생 절뚝거리는 다리로 살아야 했지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흔적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잊지 않도록 하는 부활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 버리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근심과 걱정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 죽음 이후를 한번 걱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흔적으로 인해 근심하고 탄식해 사람은 죽음의 고통으로 죄를 이기신 주님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근심과 걱정의 끝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절망하십시요. 근심과 걱정으로 인하여 주님께 소망을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로 향하는 도구가 것입니다. 근심 중에 붙잡은 자국 주의 손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후회함이 없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유익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불에 타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를 언급하시며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안에 어떤 착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없어지지 않는 불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인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체되어 있고, 막다른 길목에 있는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안에 있습니다. 상처로 마음이 지치고, 답답하고 막막하여 잃어 버린 시간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유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3.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알고 있는 모세오경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말씀을 트집 잡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익숙한 구절로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깨닫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감동(感動) 문자 그대로 느끼고() 움직이게()하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을 지닐 세상을 변화시킬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도전하게 하고, 현실속에서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기에 100세에 얻었던 이삭을 제단에 드리기 위한 순종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어린양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지금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땅의 일에만 관심을 지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필립시먼스가 소멸의 아름다움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루게릭 병을 앓았지만 자신의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았습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넘어짐을 배우다입니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삶을 아름답다고 고백할 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책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조언을 주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해결해야 문젯거리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다.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문제를 인지하고 자전거를 조립하는 지침서처럼 순서대로 질서정연하게 해결책을 늘어 놓고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다….우리의 잘못이 여기에 있다. 인생은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문젯거리가 아니라 신비이기 때문이다.” 《필립시먼스의 소멸의 아름다움》

 

성도들이 사랑하는 족들을 하나님 곁으로 보내 드리며 하늘의 소망을 고백하는 간증들을 종종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소망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모세 앞에서 지금도 교제하는 산자라로 부르셨습니다. 생전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로 부르셨고, 현재 우리 앞에 이삭과 야곱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살아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났던 생생한 기록이 담긴 성경을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살아 있는 자로 계셨습니다. 약속은 죽음 너머까지도 지속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믿으냐?"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네가 믿느냐? " "네가 너와 함께 영원토록 있음을 믿느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에겐 믿음의 자녀들이 필요합니다. 영생을 주신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삶의 어려움 앞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지 말아라.' '나의 사랑으로 견뎌내라' 말씀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에서 부활의 삶을 드러내시면 됩니다. 믿음의 선택이 죽어 있던 사회를 깨우고 멈춰 있던 우리의 신앙을 살리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것입니다.


11/2/2025 | 성령강림 스물 한번째 주일

내 삶에 찾아오신 주님 The Lord Who Comes to My Life

누가복음 19:1~10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편안한 길로만 안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들으면서도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보는 편안함을 등지고 불편함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절정이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수군거림 속에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라는 타인을 향한 불완전한 자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그 불편함도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절실한 마음에 매일 찾아오십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캐내며 묵상하다 보면, 각자의 상황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거룩함으로 살아갈 힘이 됩니다.

 

여리고 성읍에 살던 삭개오는 키가 작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일에 대한 열심으로 재력을 쌓고 세리장까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라는 직업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족들의 세금을 빼앗고 로마사회를 위해 일하던 세리를 '허가받은 도둑'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도 삶의 관심이 재물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적지 않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외로웠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정죄감도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은 삭개오를 더 악착같이 현실을 살도록 했을 것이며, 더 깊은 어둠으로 밀어 넣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할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주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일행들을 앞질러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기질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시고 "어서 내려 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집에서 묵어야 하겠소" 말씀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크게 기뻐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결단하고 남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삶의 목적을 변화 시켰을까요? 삶의 관심이 달라지면 실제적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18장에 율법을 잘 지키던 부자 관리와 예수님의 대화를 염두에 둔다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온 부자 관리에게 그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와서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소유와 영생을 바꿀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받던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부를 축적하던 삶을 내려놓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나누고, 속여 빼앗은 것은 네배로 갚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부자 관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영생의 주님을 만난 믿음의 반응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서 구원의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을 찾아가시자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방식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입니다. 예수님은 수군거림을 넘어 삭개오의 집을 찾아 가셨습니다. 18장에 35절도 보면, 여리고에 가까이 도착했을때, 한 소경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을 향한 마음의 절박함입니다. 이때에도 주변의 사람들은 소경을 향해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소경은 사람들의 시선과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나아간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주님의 구원을 증거해야 할 교회가 마치 스스로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하는 연약함에서 비롯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볼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비롯되며, 구원의 결과는 성도의 삶속에 나눔과 섬김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교회를 평가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그 모든 판단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1-2)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세상의 관점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며, 성경의 기준대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며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믿음과 세상의 즐거움 사이에서 적당히 믿고 살아가고 있고, 미움과 분열, 갈등의 마음 앞에서도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세상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의 기쁨을 온전히 구하지도 못한 채 여전히 주님과 세상과의 경계에서 예수님을 멀리에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기준과 틀을 넘어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삭개오 본문에서 2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으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수군거림은 다름이 이해되어 지지 않을때 찾아오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런 인간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옛사람이 살아 있는 본성으로 인하여 불편함을 마주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길로 걷게 하시고 믿음의 용기를 내도록 이끄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죄인 중의 죄인인 삭개오를  엄하게 꾸짖고 심판하고 정죄하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가운데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불편함이 찾아올때 무의식적으로 불평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를 믿는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지불하시고 다 갚아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될때 자신에게도 새로운 삶이 열려집니다. 하나님 주시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되고 서로를 향한 지지와 응원은 공동체를 놀라운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세상은 치열하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지만 예수님은 말씀에 길들여 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케 하여 매일 빚으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삶의 다른 차원의 목적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시지요?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열두번째 대표선수가 되어 한마음으로 응원했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가치가 같아서 응원한 것이 아니라 한 민족으로의 지지와 응원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렇게 구름 떼처럼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오늘날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들과 쉽사리 얽혀들게 하는 모든 죄악을 다 떨쳐 버리고,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끝까지 참고 견디며 달려갑시다."(히 12:1) 믿음의 성도는 홀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앞서간 수많은 증인들이 이미 승리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불편함은 잠시이지만 구원은 변하지 않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앞에 보이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온갖 모욕과 수치와 조롱까지 참으시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끝이없고 보장된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이 땅에 왔소.

 

삭개오의 집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 오십니다. 기쁨을 잃고 삶에 지친 마음, 세상의 수군거림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 외로움에 갇힌 마음, 나만이 아는 완악한 불평의 마음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마음안에 구원을 향한 절박함을 보시고, 그의 집에 머물러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죄인의 집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순간 거룩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영생이 보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나의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무 위에 있었던 삭개오를 내려오게 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귀한 것을 되찾아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의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도 살피시는 주님께 우리에게 숨겨진 어둠까지도 거룩하고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아 주시기 위해서 말씀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은 순간은 아들 이삭을 바쳐야 했던 모리아 제단에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자리에서 미리 예비하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시험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어둠속 혼돈, 불신과 수군거림은 우리를 어두운 밤으로 인도하지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때 성도들은 가장 안전합니다.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라는 찬양의 가사입니다.

 

"내 아버지 그 품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주 손길로 내 삶을 안으시니 그 평강이 나를 덮습니다.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주 내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주 약속 안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 나 신뢰해 두려움 다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해 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안전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주의 성전이 되게 하시며 주님의 약속 안에서 평강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내 힘으로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책임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받은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아침의 공기를 마실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삶과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수많은 문화와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책임있는 성도로 살아가는 힘을 주님 안에서 얻어야 합니다. 새 삶은 단순한 자유나 권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말씀 앞에 설때 주시는 깨달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거룩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번 한주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깨달음이 있기를 소망합니.


10/26/2025 | 성령강림 스무번째 주일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 Standing in Prayer Before God

누가복음 18:1~14

요즘은 모든 것이 빠르게 답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물건을 주문하면 다음날 배송이 됩니다. 한국에는 로켓배송과 새벽배송이 있어서 필요한 물건을 아주 빠르고 편하게 받아보게 됩니다. 내 물건이 어디쯤 왔는지 검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알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인내하고 버텨내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통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굳게 서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두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18:9-14) 두개의 비유는 기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하나님의 응답을 끝까지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는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도록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비유는 지금까지 의심치 않고 지켜온 기도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교훈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몇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평가하고 비판하며 깨어진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대와 기쁨 보다는 불안과 의심이 쌓여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혼돈과 불안 속에서도 힘차게 다가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불의한 세상을 구원하셨고, 지금도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다만 그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간구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응답했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조율하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실리가 없습니다. 끈질긴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선택할 힘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주의 자녀들에게 주신 즐거움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낙심될 자리 상심할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은 기도의 결과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미에 반전의 말씀을 하시며 믿음에 대해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모든 성도는 인자가 다시 오는 날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며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 그날은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누구도 알수 없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는 불의한 일들이 사라지고 정의와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불의와 혼란은 천년이 하루처럼 정말 잠시 스쳐가는 고난일 뿐입니다. 낙심되는 일을 만나 기도가 힘을 잃어 버릴때마다 기도의 방향을 점검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힘이 부족할 때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간절히 호소하던 과부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완전히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1:6)

둘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두번째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신앙적인 일들을 행하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경건함의 상징인 금식을 일주일에 두번이나 했다는 기도에서는 한해 동안 104일을 금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며 경건함을 지켰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역할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뇌물을 받고, 자기 민족의 세금으로 부를 축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당연히 바리새인이 더 의롭다고 생각했을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는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감사를 드리며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지만 그 마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였습니다. 금식은 마음을 깨끗히 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는 시간인데, 바리새인의 금식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을 높이는데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 상황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그분께 마음을 내어 맡기면, 모든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도》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교만은 무너지고 불안한 삶의 이유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낮아진 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고 싶었던 바리새인과 자신을 낮춘 세리의 기도의 차이는 단 하나 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 앞에 서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무의식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이쯤이면 선하다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내 안에 교만한 마음이 보일때마다 작은 불의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타인을 향해서는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며 형식적인 신앙에 갇히지 않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의지적으로 기도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 이후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리는 당시 흔한 행동이 아닌 가슴을 치며 기도드리고 있었음을 묘사합니다. 구원을 이뤄가는 여정에서 성도는 끊임없는 자기점검과 영적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드는 고백입니다.

과부는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그녀는 흔들림 속에서도 끝까지 기도하며 호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응답을 받은 결과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 삶도 불안과 의심으로 흔들리지만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믿음으로 확신을 갖으며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성도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 불의한 일들이 가득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이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십니다. 결국엔 진리가 승리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을 다 마친 그때에 내려 놓는 것이 허무함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충성된 자에게 허락해 주시는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앉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번째 복음 안에서 겸손한 회개의 삶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육신의 죄를 따르려 하지만,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의로워 질 수도 없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본문속 과부의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끝까지 신뢰하며 인내할때,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의 논리와 권력, 평가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집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생명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정의로움도 지나치면 생명을 해치는 행동이 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우리도 어느 순간 마음이 안일해져 겉으로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듯하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그 기도 속에 자기의 의가 담겨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 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15:8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도 '인자가 다시 돌아올 때, 과연 세상에서 이 같은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는지, 그것이 걱정이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개의 비유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를 비추는 영적인 거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기에는 일상의 즐거움과 분주함이 더 큰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주안에 있는 참된 보물을 발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단순히 쉽고 편안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책임과 헌신, 사랑과 겸손한 회개로 날마다 믿음의 길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그 사랑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신실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의 풍성한 은혜와 진리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 부터 자유케 된 길을 따라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