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4/13/2025 | 종려주일
머릿돌이 되었도다 The Cornerstone
시편 118:1~2, 19~29
본 시편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참 좋아했던 말씀입니다. 루터는 시편 118편을 가장 사랑하는 시편이라고 설교에 자주 인용하곤 했습니다. 특히나 ‘건축자들이 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을 선택했을때 그의 인생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버림 받는 돌이 되었습니다. 1521년 4월 18일 보름스(Worms) 의회 앞에서 카톨릭의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 결정을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루터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이 옳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시를 듣고 있으면, 승리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갈보리산 언덕 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은 결국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심없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옳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때때로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찾아와 주셔서 우리의 삶을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2 이스라엘 백성들아,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다.” 하고 외쳐라…19 그러므로 나를 위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다오. 내가 그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드리리라. 20 이 문은 주님의 문이니, 의인들이 다 그리로 들어가리라.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오르며 할렐시편를 불렀습니다. 이 할렐 시편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시편 118편은 제 1할렐 시편(시편 113~118편)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시인은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달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 감사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다 그리로 들어가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 시편 안에는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셨습니다(요 10:9) 종려주일 왕의 입성이 곧 ‘생명의 문’을 여는 것이었지만 갈보리는 십자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장에서 자신을 가르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시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21:42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소? ‘집 짓는 이가 버린 돌이 이제는 모퉁이를 받치는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이루신 이 일, 우리 눈에 너무나 놀라워라.’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뜻은 부활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교회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예수의 말씀 위에 삶을 세워갑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예수께서 계심을 믿을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밀려온 박해로 인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던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흩어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버려진 것 같은 상황에 떠 밀린 인생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의해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동족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을 죽인 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로 사람들에게 심한 조롱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를 붙드셨고,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난 속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놀라운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어떤 순간에는 버려진 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도 예수를 믿은 이후,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로,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양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이해와 판단을 내려놓게 하심으로 그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인생의 닫혀진 문, 절망의 문, 관계의 깨어짐의 문 앞에 서게 되지만 그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성도가 겪게 되는 외적인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바울의 사역의 핵심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고난은 성도다움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갈때입니다. 그는 익숙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불안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벧엘에서 잠을 자는데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 28장입니다.
“28:13 주께서 그 사닥다리 위에 서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28:14 네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 동서남북 어디로든 네 후손이 퍼져나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8:15 나는 늘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 전에는 내가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익숙한 삶을 떠나 고독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처절한 고독이 없었다면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의 대한 경험입니다. 잠을 깬 야곱은 열린문을 경험하고 두려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기뻐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경의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8:16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다. “주께서 바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몰랐구나.”
28:17 야곱은 두려워하며 말했다. “이곳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 아닌가? 이곳이 바로 하늘로 가는 문이로구나!”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갖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은, 평범한 일상이 주 안에서 거룩해졌음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감사를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하여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번 성찬을 통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예수를 기억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성찬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성찬은 부활의 소망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도록 돕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매일 마주하는 뉴스만 보아도, 세상은 성과중심의 구조 속에서 사람을 상품화하며, 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버려져야 할 존재로 여깁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날에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그것도 며칠후에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정치적 구원자로서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침묵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세상의 능력과 권세를 발휘하는 구원자로 기대했으나, 예수께서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의 뜻에 따라 죽음을 선택하셨고, 그 길은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세상은 쉽게 관계를 끊어내고, 안전이 보장된 길만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절대 쉬운 길이 아니지만 외롭고 고단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십자가 부활의 생명을 발견하게 하실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성도의 삶을 붙들어 주는 힘이 됩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이 문을 통과한 성도는 자기 욕망을 따르던 삶에서 거룩한 성전을 지어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은 슬픔을 안고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존재가 흔들리는 불안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23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니, 우리가 보기에 참으로 놀랍기만 하여라. 23절은 예수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시작하신 것은 사람에 의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24 이 날은 주께서 구별하여 정하신 날이니, 이 날에 우리가 다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25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소서.
26 복 되도다, 주의 이름으로 나오는 자들이여! 주의 성전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27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손과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축제의 행렬을 벌여, 다 함께 제단의 뿔로 나아가자!
28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렵니다.
29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분은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마음이 무거운 소식들이 참 많습니다. 끊임없는 사건과 사고의 소식과 분쟁과 갈등의 이야기들, 거기에 인생의 짐까지 더해져 마음이 멈춘듯 어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꿔 주시고, 온갖 죄와 사망을 사랑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날 예배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며 믿음의 흔들림과 내적 갈등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문으로 들어가,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가 하늘로 열린 문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다시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빛을 완전히 잃어 버리는 고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 잃어버린채 살 소망 조차 없는 것 같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어둠을 뚫고 빛으로 오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제 믿는이들이 바라보는 인생의 문제는 돌파 할수 없는 벽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여시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을 잃지 않고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고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지만 그 외침은 어느새 분노와 의심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 죽음의 자리로 향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리도 기대와 실망, 사랑과 미움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나의 삶의 십자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아픔과 고난의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소망이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는 더 큰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간구하실때,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혜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그 문은 이미 열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더 깊이 그 은혜를 느끼며 성찬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한주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느껴 보시고, 말씀을 따라 가는 삶에 축복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4/6/2025 |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마음속 깊이 간직하렵니다 I Have Hidden Your Word in My Heart
시편 119:9-16
하나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말씀이 우리 삶에 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필요합니다. 만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 말씀을 따라가게 되면 원수는 말씀에 의해서 친구가 됩니다. 실례로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이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서 예수를 믿게 한 것은 그분이 말씀을 따를때 임했던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아집과 인간의 본성으로 가득한 현실속에서 말씀에 기록된 사랑과 용서는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을 통하여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청년이 어떻게 일생동안 깨끗하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하고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것은 지혜문학의 전형적인 기법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 오직 그 길뿐이라고 대답합니다.(9절) 어떻게 하면 일생동안 말씀을 지키며 깨끗하고 온전한 삶을 살수 있을까요? 이 기도를 하는 시인은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가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말씀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통해 지금은 희미하게 하나님을 보지만 그때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고전 13:12)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면, 말씀 앞에서는 우리의 연약함도 강팍함도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 입을 옷은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3:15 오직 여러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모시고, 또 여러분이 품고 있는 영생의 소망에 대하여 그 근거를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 어디서든지 답변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되, 3:16 온유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또 언제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만일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 준 마지막 편지라면, 아버지의 말씀은 그 아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둘째 아들은 세상의 방법을 택하고 아버지를 떠나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아버지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고 유산을 미리 요구하며,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던 아들은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먹고 싶었으나,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속에 이르러 다시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때 아버지의 반응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아들을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완전하지 않고 자격없는 부족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고 고백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길이 됩니다.
시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내가 온 마음 다 바쳐 주님을 찾겠사오니,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소서.(10절)라고 고백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의 뉘우침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졌고, 일꾼으로라도 좋으니 아버지 품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돌아옵니다. 세상에 많은 갈래의 길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이들에게는 이처럼 우리의 옛모습이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본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입니다. 히브리어 22개의 알파벳에 따라 배열된 22연의 시입니다. 본 시편을 각 연마다 알파벳 순으로 규칙적으로 짜놓은 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이 시를 쉽게 외우고 노래하도록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적 부터 자녀들이 밀씀을 암송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크게 낭독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글을 몰라도 암송한 말씀은 성장하면서 자녀의 삶에 있어서 큰 깨달음을 줄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책을 먹으라'는 그의 책에서 강아지가 뼈다귀를 물고 음미하며 씹는 것처럼 말씀의 유익함과 즐거움으로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말씀의 뿌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11 내가 주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하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왕의 명령과 이방 문화의 요구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기로 정했습니다. 이 결단은 왕의 명령에 불복하는 위험성과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바벨론 왕 앞에서 그들의 탁월함을 드러내셨습니다.
바울도 로마감옥에 2차로 투옥되어 순교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제자 디모데에 편지를 쓰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고난의 시기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믿음 안에서 굳게 서서 사역을 해나가야 된다고 편지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과 16절,17절입니다. "1 디모데여, 그대는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말세에 고난의 시기가 올 것입니다.....16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으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책망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게 하고, 또 의로써 훈련시키기에 아주 유익한 책입니다. 17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온전히 준비시켜 줍니다."
바울은 말세의 시기에 넘쳐나는 세상의 풍조들을 열거하고 난 후에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고난임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럴때 일수록 말씀을 굳게 믿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기준과 내 삶의 편안함을 넘어서 우릴 위해서 죽으신 주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면 우리의 삶이 구별되어 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잡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가치관이 분별되어 집니다.
2024년 빛과 소금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입니다. 지금처럼 모바일을 이용한 인터넷은 상상도 못하던 느린 랜선의 초기 인터넷 시대였는데, 숙소 예약 하나 없이 배낭 하나 달랑 들고 런던 히스로 공항으로 입국하여 숙소도 찾지 않고 처음 방문한 곳은 바로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내셔널 갤러리’였습니다. 의대 공부로 바쁜 시간에도 틈나는 대로 미술사에 대한 뼈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베데스다 연못’ 그림을 보며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이후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하며 QT 중에 같은 본문을 묵상하며 주님께 이러한 환자를 보내주신다면 주의 뜻으로 알고 깊이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놀랍게도 그날 한 38세 남성이 근긴장이상증으로 진료실을 찾았고, 마침 요청하지도 않은 보툴리늄톡신 주사가 제약회사로부터 기부되었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시술했고, 일주일 후 환자의 손이 기적처럼 펴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진료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이 바로 혈기 마른 병자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손이 마치 자신에게 다시 내미시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라는 말씀 한구절의 깨달음은 그를 다시 일어나 걸으라고, 네 걸음이 네 능력이 아닌 내가 준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듯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주의 교훈과 율례를 따르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큰 재물을 얻는 기쁨보다 더 크다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으로 살던 바울에게 율법 자체는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지키면서 기쁨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삶에 눈을 뜨고 난 뒤에 그의 순종과 겸손은 기쁨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으로 내어 주는 삶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가 고난을 자기 죽음의 기회로 삼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섬김의 길로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마시는 순간 그 잔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는 자기 십자가는 우리의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멍에를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될수록 주님이 함께계심을 더 깊이 깨닫고 부활의 기쁨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참으로 주님의 교훈을 배우고 따르는 이 기쁨은 큰 재물을 얻는 기쁨보다 더욱 큽니다. 15 내가 주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주님의 법도를 깊이 살펴보렵니다. 16 오직 주님의 율례를 나의 기쁨으로 삼고,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안하고 평탄한 길을 원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하기 보다는 익숙한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걷는 길 낯선 길을 걸을 때 만나는 인생의 일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도록 붙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도전하며 꿈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때때로 외롭고 고된 시간이겠지만 그때마다 시인처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말씀 안에서 답을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들때, 불안하고 두려울때 말씀을 붙드는 은혜를 깊이 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순종할때에 말씀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교훈을 전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정교하게 지어졌지만, 마지막 절은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내가 길 잃은 양처럼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사오니, 주께서 오셔서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나는 주님의 계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시 119:176)
시편의 기자처럼 우리도 때때로 길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친히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라고 고백할때에 책망하시기 보다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인생에서 마음이 닫혀 있고 차가운 바람이 불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흔드는 말에 집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말씀의 힘이 느껴지지 않고 무겁고 낯선 시간이 그저 버겁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삶의 기쁨도 느껴지지 않고 불평의 언어들이 삶에 채워지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말씀을 품고 기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내 삶의 가장 연약한 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의 인생 길을 열어 가십니다. 길 잃은 양과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갈 2:20) 하나님 안에서 새생명을 부여받고 말씀을 따라갈때에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오늘의 양식의 말씀 구절을 필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암송하다 보면,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고 어느날 내게 다가온 말씀 한 구절이 믿음의 여정에서의 방향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매 순간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셨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주 동안도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보시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 깊이 담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언어가 되고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되어 말씀을 삶속에서 지키고 살아 간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변화 될 것입니다.
3/30/2025 | 사순절 네번째 주일
죄 사함의 복 Blessing of Forgiveness
시편 32:1-11
우리는 흔히 '복' 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결과적인 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재물을 많이 가졌어도, 원하는 것을 다 이뤘다고 해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 성경은 다른 관점의 복을 제시합니다. 죄 사함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2편은 "복되도다!"라는 선언과 그 복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성경은 본래 인간의 상태를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체질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한구절씩만 살펴보면, 시편 51편 5절입니다. "51:5 진실로 이 몸은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갈 때, 안개가 덮혀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것만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들어오면 막연했던 삶의 길 위에서도 인도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시작할 새힘을 주십니다. 죄를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죄는 우리를 깊은 어둠의 웅덩이에 빠뜨려 고통과 절망 속에서 희망 없이 머물게 만듭니다. 양 손과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그 짐을 내려 놓았을때의 가벼움과 홀가분함은 이루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죄 사함의 복은 이처럼 죄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회복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인생의 짐과 무게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평안과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이상 우리를 불안과 어둠 속에 갇히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양심 안에 죄에 대해 민감성을 지니게 됩니다. 죄의 뿌리가 끊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막혀있던 죄와 사망에서 풀려나 예수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주 안에서 내 것을 내어주기 위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구원의 복은 자기중심적 삶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견디고 참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살면 됩니다.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약의 제사를 통해 이 죄사함의 복을 가르쳐 주셨고,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배우며 살아갑니다. 고난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마음을 평생을 통해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시편 32편은 참회시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다윗이 밧세바 간음 사건 이후 참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숨겼을때의 고백입니다. 죄로 인해서 나의 마음이 온종일 괴롭고, 뼈 마디마디가 녹아 내렸습니다. 죄가 밤낮으로 이 몸을 무겁게 짖눌러서, 마치 여름 뙤약볕에 물이 말라 버리듯 기력이 모조리 빠지는 것처럼 힘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바울도 자신 안에 이 죄성을 자각하고 로마서 7장에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탄식합니다.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전혀 다른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와 사망의 힘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절망감 속에 죽어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때 부터 '내가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 너는 내 아들이란다. 넘어져도 괜찮으니 다시 회복하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며 일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는 400년을 기다리며 일하셨고, 수천년에 걸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기백성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은 우리가 한 만큼 받는 복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승자가 되면 박수를 받고 상을 받는 세상의 기준에서의 복이 아닙니다.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이 은혜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함께 아파하며 내것을 나눠 주는 것이 복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모두가 복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신앙의 세계는 예수 안에서 누군가 죽어져야 지체들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는 이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하도록 부름받는 사람들입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 ~ 1737)는 현악기를 제조하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제작한 악기들은 엄청난 가격에 팔렸습니다. 2006년 영국에서는 바이올린이 대략 43억원에 낙찰되었고, 2011년에는 바이올린이 대략 190억원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가 만든 현악기들은 긴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소리를 냈기 때문입니다. 소리의 비결은 장인의 인내와 탁월한 솜씨이며, 그가 사용했던 악기의 재료입니다. 혹독한 겨울 바람을 견뎌낸 나무의 재료가 악기의 품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 겁니다. 성도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인생의 무거운 십자가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때에 아름다운 찬양이 될것입니다.
2절은 죄사함을 받는 자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거짓됨이 없어, 주께서 그 죄를 묻지 않는 사람들이 복되도다” 암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렵지 않습니까? 치료받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누워야 합니다. 두렵더라도 치료받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 의사의 손길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환자가 자신의 옷을 그대로 입고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 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죄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자가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6 ○ 그러므로 주를 믿는 경건한 자들이여,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주께 간절히 기도하여라.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칠지라도, 그들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모든 상황이 주를 만날 기회가 됩니다. 마음이 답답할때, 고난이 홍수처럼 밀어닥칠때, 하나님은 믿는자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주어진 상황을 통과하여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의 승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홍수가 나면 모든 것을 휩쓸고 갑니다. 노아의 홍수를 떠올려 보세요. 하나님은 죄로 인한 결과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방주를 만들고 피할 길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방주를 짓는 노아를 조롱했습니다. 비가 온다고? 홍수가 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길을 걷는 노아는 비난을 사랑으로 견디며 방주를 지었습니다. 말씀을 믿고 배를 짓는 동안 사람들의 조롱을 인내로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지속적으로 실천 할때 노아에게 사람의 소리들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이기신 사랑입니다. 이 구원의 복이 다윗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피난처가 되시고(7절),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목자가 되어 주심을 고백합니다.(8절)
7 주는 나의 피난처, 모든 재난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 그러므로 내가 소리 높여 주의 구원을 노래하리라. (셀라) 8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내가 몸소 너희에게 가르쳐 주리라. 너희에게서 나의 두 눈을 항상 떼지 않고,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리라.
9 그러니 너희는 재갈이나 굴레를 씌워야만 붙잡아둘 수 있는 분별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아라.” 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자유가 있습니다. 재갈이나 굴레를 씌워야만 길들여지는 말이나 노새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환경에 놓여져 있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양심의 가책을 주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때 깨닫게도 하십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서도 돌이키게 하시지만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평안과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한 것, 자랑할 만한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10 진실로 악인들에게는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주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다윗의 참회시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11 올바르게 살아가는 너희 의로운 자들아,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을 올곧게 먹은 너희 정직한 자들아, 다 함께 기쁨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라. 죄 사함의 은혜는 슬픔으로 그치지 않고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충신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한 그는 결코 완벽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언급합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행 13:22)
죄사함의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지닌 소중한 특권입니다. 다윗의 참회의 간증이 우리의 노래가 되고, 주를 믿는 모든 성도의 노래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예배를 마치고 성전을 떠나기 전 내안에 숨겨진 죄와 마음을 짓누르는 삶의 짐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고백해 보시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87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시는 19세기 아일랜드 출신의 조셉 스크라이븐(Joseph Scriven 1819~1886)에 의해 작사되었습니다. 젊어서 두번이나 사랑했던 약혼자를 잃고 평생을 혼자 살며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쓰며 쓴 시라는 유래도 있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중병에 걸린 후 낙심했던 스크라이븐이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작사한 것으로 보는 유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삶속에서 경험된 신앙의 고백이요. 주님께 드리는 찬송시입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죄사함의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한 사람으로 준비시켜 가실 것이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소망이 되어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한주도 일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기쁨을 나누시고 사랑을 실천해 보시길 소망합니다.
3/23/2025 | 사순절 세번째 주일
광야의 은혜 Grace in the Wilderness
시편 63:1-8
사순절 4주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의 실존은 메마른 땅에 내몰린 광야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광야로 직접 찾아오셨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새벽기도를 함께 드리며 40일 동안 내면의 광야로 들어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 시간을 통하여 부활의 소망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피곤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에 귀한 은혜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광야 같은 현실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시며 성령에 이끌려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 물이 없어서 모세에게 불평하고 다툼을 벌였던 경험도 있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는 자리이자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이 물없이 견딜수 있는 시간이 3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광야의 시간이 지속되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본 시편을 쓴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으로 자신을 죽이려 하자 그 칼을 피하여 유다 광야에서 도망 다녔습니다. 아들의 배신으로 아버지가 느꼈을 슬픔의 감정은 사실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을 것이고, 정신적 충격도 컸을 것입니다.
본 시편의 표제어는 유다 광야에 있을때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는 탄원과 슬픔보다 성소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고백이 가득합니다. 관계의 상실감과 배신에 대한 쓰라린 고통 가운데 구원의 기쁨과 소망을 바라 보는 다윗이 참 대단합니다. 다윗은 목마름으로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한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속에서 드리는 기도는 깨어있는 기도요. 절박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63:1 오 하나님,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간절히 찾아 헤매고, 내 육체가 주님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하나님 보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현실의 상황들이 거대해 보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것만 같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으로 부터 면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은 것처럼,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도 죽음의 고통 속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인해 수천만명이 사망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극한의 고통을 겪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의 기도드렸습니다. 1절은 병이 시작될 때의 고백이고, 2절은 투병 중의 고난 가운데 기도이며 3절은 회복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나의 주님 도와 주세요. 죽음이 문 앞에 왔어요. 당신께 부르짖어요. 이것이 당신의 뜻인지요. 저를 죽이려 하는 이 화살을 빼 주시기를. 제가 살 여유도 없으니 저에게 안식을......통증과 압박이 내 영혼과 육체를 사로 잡습니다....제 혀는 침묵하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합니다. 온몸엔 감각이 거의 마비됐어요... ..주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주세요. 다시 회복하는 것 같아요. 이 땅에서 다시는.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입술로 당신을 찬양합니다......오직 당신의 도움으로 완전해 질 수 있을 뿐입니다."
쯔빙글리는 죽음의 병중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상황을 목마름으로 표현하지만 실제 상황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상황에서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그리워 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감기로 인해 뒤척이는 아이 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돌보아 줄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며 기도도 해 줍니다. 자녀에게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지만,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 가운데서도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더욱 더 갈망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이진희 목사님이 쓰신 '광야를 살다'라는 책이 있는데, 부제는 ‘광야의 삶을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언급하며 다양한 종류의 광야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 인간은 농사를 지어야만 살 수 있게 되었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인생의 광야를 살아간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자신의 도시를 만듭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시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세운 도시는 하나님에 의한 홍수로 인하여 사라집니다. 이후 인간은 다시 바벨이라는 도시 안에 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중단이 된 것입니다.
또 다른 광야가 나옵니다. 기다림의 광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후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25년이라는 긴 기다림의 광야를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가능성이 없을 때, 사라가 자녀 생산의 능력이 끊어졌을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다림의 광야에서 약속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다윗에게 광야는 어떤 장소였습니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억하는 장소였습니다
3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생명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기에, 내 입술이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4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목숨이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고, 내가 나의 두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권세 보다 강하고 죽음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사랑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 사랑이 더 소중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광야의 현실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는 힘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주의 사랑에 눈을 뜬 것입니다. 생명을 스스로 보존할 수 없는 그 장소에서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도망자의 신세였는데, 무슨 음식을 먹어서 만족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은 듯 내 영혼이 아주 충만하고 만족하니, 내가 입술을 크게 열어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다윗은 죽음의 공포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영혼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하루 아침에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만나는 자리를 통하여 신앙도 한뼘 더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영혼의 밥상입니다. 한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시며 영혼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다윗의 예배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간절했던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 목숨을 다하도록 주를 찬양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다윗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주님만을 생각하고 밤을 새며 주님을 그리워했습니다. 6 내가 잠자리에 누워서도 주님만을 생각하고,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도 주님만을 그리워합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언제 자신을 급습할지 모르는 상황에 편안한 잠을 잘수가 없었을 겁니다. 잠을 자는 시간은 무방비 상태이니까 다윗은 밤 깊은 시간에도 대적들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정말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고는 수많은 의심과 불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 들어옵니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믿음의 생각을 허무는 감정들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구하는 절박한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8 내 영혼이 주님께 매달리니, 주께서는 권능의 오른손으로 이 몸을 굳게 붙들어 주십니다.
다윗은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주님의 손은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개역개정은 '매달리다'를 주를 '가까이 따르다'로 번역했습니다. 종종 찰스강 근처에서 새끼 오리들이 어미 오리를 줄지어 따라가는 것을 보곤합니다. 새끼 오리들은 어미오리를 의지하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곳이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를 위한 가장 확실한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마다 하나님과 연결 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절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께 매달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더 깊숙이 연결되어 믿음의 뿌리가 더 깊어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며, 완성으로 가는 여정을 걷고 있는 미숙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불안과 두려움의 자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며 우리는 더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안에 인간적인 생각을 걸러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걸러낼수록 은혜의 생수가 길러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질 때에 나쁜 생각은 사라지고,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사순절은 마음을 돌이키는 절기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의 습관들, 몸과 마음에 가득한 악한 마음으로 부터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찢긴 옷을 입은 채 주께 나오면 주님은 우리에게 새옷을 입혀 주십니다. 아프고 상한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손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찾아내시고 건져 내십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광야를 경험하며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율례를 배우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캄캄한 길에 비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은 우리 마음 안에 어둠을 몰아 내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십니다.
다윗에게 압살롬과의 갈등은 신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노년에 그는 광야에서 쫓기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8:5절에 보면,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내전으로 전쟁하게 되었을때 다윗은 군대를 지휘하는 요압과 아비새, 잇대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대들은 나를 보아서라도 어린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 주시오. 이처럼 왕이 압살롬에 대해 지휘관들에게 특별히 당부하는 말을 다윗의 군사들이 모두 들었다." 그러나 결국 압살롬은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큰 소리로 울부 짖었습니다. “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아!”
아들의 반역에도 이처럼 통곡하는 마음은 광야의 시간을 통하여 다윗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깊이 깨달은 자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어진 증거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3/16/2025 | 사순절 두번째 주일
전능자의 그늘 아래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시편 91:1-2, 9-16
솔로몬 왕이 사랑했던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골짜기 백합화에 비유했습니다. 골짜기 백합화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장소에 핀 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백합화는 여러 들꽃들을 부르는 총칭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백합화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식물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순결함을 간직한 꽃입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라도 하나님께서 들꽃을 자라게 하시듯, 성도들을 보실때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일까요? 오늘 우리는 시편 91편을 통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쉼을 얻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시인은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에서 편히 쉬게 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라는 표현이 어떤 뜻일까요? 개역개정 성경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라고 번역했습니다. 은밀한 곳은 하나님과 아주 깊고도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 장소입니다. 쉬운 성경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장소로, 메시지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앉은 그분의 그늘 아래서 밤을 보내는 그대라고 번역했습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소이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요?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간절히 사모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기도들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오 하나님, 진실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간절히 찾아 헤매고, 내 육체가 주님을 애타게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시 63:1) 믿음생활 가운데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자를 알수 없는 본 시편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세상 그 어느 장소보다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고, 어떤 세력도 침범할 수 없는 완전하게 보호받는 장소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던 다윗도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 4)라고 고백했습니다.
계속되는 시편의 구절을 보면, 시인의 신뢰는 평탄한 삶에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자신의 상황을 묘사한 은유적 표현들을 보면, 사냥꾼의 덫, 한 밤중에 갑자기 닥치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들, 밤에 다니는 사나운 늑대, 방향도 알수 없는 낮에 날아드는 화살, 어둠속을 배회하는 질병, 한낮에 일어나는 재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죽어 나가는 것과 같은 공포와 두려움의 환경이어도 네 곁으로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 이르지 못하리라 표현합니다. 이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보호와 쉼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91:3 진실로 주께서는 너를 새 사냥꾼의 덫에서 건져주시고, 죽음의 질병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91:4 주께서 너를 그의 깃털로 덮어주시리니, 너는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라. 그리하면, 주님의 신실하심이 너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되고 성벽이 되어 줄 것이다. 91:5 그러므로 너는 한밤중에 갑자기 위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대낮에 화살이 날아올지라도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91:6 어둠 속에서 괴상한 질병이 퍼진다 해도, 대낮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너는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으리라. 91:7 너의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너의 오른쪽에서 일만 명이 쓰러진다 해도, 네 곁으로는 어떤 재앙도 가까이 이르지 못하리라. 91:8 그때에 오직 너는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고꾸라지는 모습을 너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길이란 고난을 마주할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삶입니다. 이사야 43:2절의 하나님의 약속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도록 지켜 주겠다. 네가 불 속으로 걸어가더라도 네가 불에 타지 않도록, 불꽃이 너를 조금도 태우지 못하도록 내가 보살펴 주겠다."
크리스챤 타임지에 실린 존파이퍼 (John Stephen Piper:1946-현재) 목사님의 컬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56년 1월 8일 에콰도르의 쿠라레이 강가, '팜비치'(Palm Beach)라고 부르던 모래톱에서 짐 엘리엇(Jim Elliot),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에드 맥컬리(Ed McCully), 피터 플레밍(Peter Flemming), 로저 유더리언(Roger Youderian)이 창에 찔려 죽었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와오라니(Huairani) 인디언에게 전하려 하던 중이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이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기렸다. 이 책의 제목은 시편 91편 1절에서 따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잃고 2년 후에 자신의 책 제목을 정하면서 이 가슴 아픈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짐이 죽었을 때 엘리엇 부부는 결혼한 지 3년 되었고 10개월짜리 딸이 하나 있었다. 다섯 선교사들의 순교에 얽힌 정황을 조사하자,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손이 드러났다. 1996년 9월에 발행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순교한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의 기사가 한편 실렸다... 이는 살해당한 선교사의 아들이 쓴 문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경이롭다.... 어째서 이 다섯 젊은이들이 죽었고 수천 명에게 감동을 주는 유산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설명밖에 없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내 유익을 위해 정하시는 일만 일어난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그분의 주권은 바로 이런 것이다.”
3절로 8절은 전능자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복의 1차 선언이고, 9절로 14절은 지존자를 거처로 삼은 자들이 누리는 복에 대한 2차 선언이라 할수 있습니다.
91:9 네가 주님을 너의 피난처로 삼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거처로 삼았으니, 91:10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겠고, 어떤 재앙도 네 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리라. 91:11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천사를 명하여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리니, 91:12 너의 발이 혹시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 천사들이 두 손으로 너를 굳게 붙들어 줄 것이다. 91:13 그리하여 도리어 너는 사자와 코브라를 짓밟고,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발로 짓누르리라.
시인은 여호와가 나만의 피난처가 아니라 너의 피난처 말씀을 믿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인칭을 바꾸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관계속에서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을 주고 베푼 만큼 마음의 기대도 커지게 됩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으로 섬기고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나의 기대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은 알수 없는 길, 우리의 뜻과는 다른길처럼 보일수 있어도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 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것을 기억하면, 모든 것이 감사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겠고, 어떤 재앙도 네 집 가까이에 이르지 못하리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천사를 명하여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리니, 너의 발이 혹시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 천사들이 두 손으로 너를 굳게 붙들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도리어 너는 사자와 코브라를 짓밟고, 사자 새끼와 살모사를 발로 짓누르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단의 시험이 참으로 그럴듯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91편 11절, 12절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보호하시지 않겠느냐?고 시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으시고 물리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처로 삼는 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14절로 16절은 전능자의 그늘아래 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가 나를 사랑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알고 받아들이니, 내가 그를 보호하고 높여 주리라.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내가 곁에 함께 있어 주리라. 내가 그를 건져주겠고, 내가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오래 오래 살게 해주고,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라” 성도가 받게 된 최고의 복은 구원입니다.
어린 나이에 순교한 짐 엘리엇이 대학생때 썼던 일기 속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 그의 일기에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기 보다 전능자의 그늘아래 머물기를 훈련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영원한 복을 바라보며 순교의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생각납니다. 그가 순교를 선택할때에 하늘에서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드린 기도와 유사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 받는 우리의 삶에는 슬픔도 있고 수고로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우리는 그날에 주님 앞에 서야 할 한 형제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쉼이 필요해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피곤과 피로가 쌓인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때 집이 가장 편하다는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은 내가 늘 머무는 곳,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이지요.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일을 만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과 평안은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이 당장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고 마음을 주께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고난은 예기치 않고 찾아 오기에 두려운 것이고, 홀로 있으면 외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친히 풀어 가시지 않겠습니까?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영문도 모른채 휘 몰아치는 고난의 한복판 복음이 애타게 울려 퍼진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상한 마음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전부라면 하나님은 그 드림을 멸시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어느 것도 헛되지 않는다.” 챕터 한장 한장에 쓰여진 그녀의 고백은 마치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과도 같습니다.
그녀는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의 더 깊은 품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린 전능자의 그늘아래의 친밀한 일들을 우리도 선택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보호와 위로는 변함이 없기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고, 세상이 줄수 없는 것들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한주 동안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며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