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18 | 사순절 새벽기도를 앞두고 1
거룩한 삶의 비결 (The Secret To Living A Holy Life)
김태환 목사
디모데전서 4:4-5
4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5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쉬운성경)
4 Since everything God created is good, we should not reject any of it but receive it with thanks.
5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①Or made holy (New Living Translation)
4 For every creature of God is good, and nothing is to be refused if it is received with thanksgiving;
for it is sanctifi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NKJV, NASB)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 했던 내용을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 때 디모데의 나이가 30살이 채 안 된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 속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디모데후서 2:22)”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lust’라는 말은 ‘욕망’이라는 말로 번역하면 좋겠습니다. ‘youthful lusts’라고 하면 ‘청년의 때 빠지기 쉬운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companionship’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이런 것들을 청년의 때에 추구할 가치로 알고 이런 가치들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 보면,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좋은 멘토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때 저를 이끌어 줄 좋은 멘토가 곁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한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디모데 같은 사람은 사도 바울을 멘토로 두었으니까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청년의 때에 질문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기심은 얼마나 많습니까? 시행착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열정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열정을 올바로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멘토가 옆에 있다는 것은 정말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모데는 청년의 때에 교회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 때 교회는 지금의 교회하고 많이 다릅니다. 지금 교회들은 제도화 되어 있지만, 그 때 교회들은 타문화권에 신자들 몇 명이 가정에서 모이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된 두루마리 모양의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생활을 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문제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 이런 문제들을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똑 같습니다.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을 때 크리스천들이 먹는 음식까지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제사 지냈던 음식들이 시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크리스천들이 그런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또 하나, 그 당시에 영지주의 (Gnosticism)라는 사상이 유행했습니다. 이 사상은 육적인 것을 경멸하고 영적인 것을 찬양하다 보니, 정력을 증강 시키는 음식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은 영지주의자들이 금하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까? 아니면 먹지 않아야 합니까? 청년 디모데가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잘 다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디모데는 자기 멘토였던 바울에게 이 문제를 질문했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써서 보낸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4-5절)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①Or made holy 라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라고 나와 있습니다. ‘consecrate’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하게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우상숭배에 드려졌던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이해했을 때,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읽어 왔던 이 말씀 속에 이런 뜻이 들어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그 감동이 더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소위 말하는 ‘적용 (appl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 성경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 나의 문제를 해석하고, 내 삶에 이 말씀을 이렇게 실천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적용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개념이긴 합니다만, ‘impl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을 굳이 번역하자면 ‘함축’ 혹은 ‘암시’라고 할까요? “이 말씀 속에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거나 암시되어 있다” 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거나 암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록 어떤 음식이 우상숭배에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거룩해 져서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implication’은 무엇입니까? 사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이 말씀 속에 사람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도 선한 목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삶에 이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창세기 말씀을 읽다가 크게 깨닫고 은혜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18:19 말씀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ve singled him out so that he will direct his sons and their families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what is right and just. Then I will do for Abraham all that I have promised."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고,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들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본 받아서 ‘the way of the Lord (주님의 길)’을 잘 따르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단순히 아브라함의 가정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만드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의 길 (the way of the Lord)’을 잘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냥은 안 되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의 길’을 잘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님의 길’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주님의 길’이 아니라, ‘내 길’, ‘내가 원하는 길’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끔찍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기도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게 해 주십시오 (마태복음 26:39)”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지, ‘나의 길’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내가 원하는 말씀만 눈에 들어 옵니다. 그것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넌 크리스천들 (Non-Christians)’입니까? 성경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우리가 ‘이방인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면,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나의 길’을 고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이런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holy)’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 속에, 바울이 청년 디모데에게 멘토링 했던 말씀 속에 그 길이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다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셨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 이런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에 ‘아멘’하는 사람들은 손에 성경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성경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쏙쏙 들어 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How sweet your words taste to me; they are sweeter than honey., 시편 119:103)” 이렇게 썼던 시편 기자의 고백을 이해하게 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By obeying your word).” (시편 119:9) 이 말씀을 듣고도 성경을 펴서 읽지 않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음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 (communication with God)’ 입니다. 지금은 ‘소통’이라는 단어가 시대적인 화두(話頭)입니다. 어디서나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학생과 교수와의 소통, 세대 간의 소통, 직장에서의 소통, 교회 안에서의 소통, 어디서나 소통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고 청년 목회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청년 목회의 비결도 소통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곳에는 청년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디서나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왜 유독 ‘하나님과의 소통’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통이 잘 되어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과의 소통의 문제는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힘들어 하는지, 다시 말하면, 왜 사람들은 기도를 힘들어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상대방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통에는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 상대방을 보면서 서로 대화를 하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처럼 말씀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은 말이 없는 데, 혼자 10분, 20분, 30분 말을 하려고 하니까 그게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기도를 그렇게 힘들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식 기도를 훈련해야 합니다.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고 나서 “아멘” 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 옆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말씀 드렸습니다만, “나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저에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금방 “아멘” 하고 일어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난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기도에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 귀를 열고 들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이런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극심한 고통 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6)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은 동시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다 이루었다!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상대방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말하는 ‘monologue (독백)’가 아닙니다. 기도는 ‘dialogue (대화)’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2분 기도했으면 2분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기다리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이런 훈련이 쌓여질 때, 기도는 힘든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저 광야같은 세상을 끝 없이 방황 하면서 위태한 길로 나갈 때, 주께서 나를 이끌어 그 보좌 앞에 나아가 큰 은혜 받게 하시네.”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1, 2절) 이 찬송의 영어 가사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Sweet hour of prayer, sweet hour of prayer’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은 이렇게 달콤한 시간입니다.
덮었던 성경을 펴서 읽으세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세요.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acceptable’ 삶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멘토링 했던 길이고, 성경이 제시하는 거룩한 삶의 길입니다. 우리 한 목소리로 오늘 말씀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