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18 | 사순절 6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 (Why Pray?)
김태환 목사
마태복음 6:9-15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10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12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3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아버지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멘)
14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15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9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10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11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13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14 For if you forgive men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15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여러분은 간혹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왜 기도해야 하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기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기도는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교회를 거쳐 간 사람 중에 한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년 안식년으로 와 있는 바람에 우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서울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꽤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부인은 방송국에서 스크립트를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남편은 교회를 나오지 않고요. 부인만 교회를 나왔는데, 이분이 새벽 기도를 나오는 것입니다. 올 때는 다른 분이 라이드를 주시고, 집에 돌아갈 때는 제가 라이드를 드렸습니다. 자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래요. “저 아마도 내일부터 새벽기도 못 나올 것 같아요 남편이 새벽기도 못 나가게 해요. 전 어쩌면 좋아요?” 그 말을 듣고 저도 난감했습니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강하게 말하세요. 난 새벽기도 꼭 나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내려 드렸는데, 그 다음 날 이 분이 새벽기도를 나온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살며시 침대를 빠져 나오려고 하는데, 남편이 발목을 꽉 잡더랍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충분히 당신 힘으로 살 수 있어!”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남편 얼굴을 똑바로 보고 “당신이 내 인생 책임 질 수 있어?” 그랬더니, 남편이 “아니!” “그럼 나 새벽기도 나가는 것 막지 마!” 그래서 다시 새벽 기도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까? 그 서울대학 교수는 기도는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꼭 그들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성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삶의 공허함 (the emptiness of life)’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공허함을 하나님께서 채워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전도서 3: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우리 마음 속에 심겨진 ‘eternity’가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a point of contact’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막히면 우리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소통의 채널이 열리면 우리는 ‘충만함’을 느낍니다.
또,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합니까? 과거 어느 때도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직장을 찾아 헤맵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어려운 공부를 마쳐도 나를 환영하는 곳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uncer¬tainty)’이 이처럼 우리를 힘들게 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전도서 3:11에 있는 말씀을 계속 읽어 보세요.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사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시대의 ‘불확실성’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우리에게 삶의 충만함을 얻게 하고,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불안을 이기고, 초조함을 이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태복음 6장 본문 말씀을 볼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9-10절)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한번 돌아 보십시오. 살기 바쁩니다. 조금만큼도 마음의 여유들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수업 듣고 페이퍼 쓰고, 숙제하기 바쁩니다.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이들 기르고, 가사 일을 하기에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여러분의 마음을 집중하고 이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고 하시면서 삶에 찌들어 있고, 불안하고, 초조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삶의 focus’를 옮겨 주십니다. 맞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를 이기게 합니다. 불안을 이기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1절)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니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먹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삽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요? 굶어야지요. 돈을 못 벌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입니다. 기도는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필요한 것이 없는 상황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God’s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하심)’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intervention’이 있으면 단번에 상황이 역전(逆轉)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두 번 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12-13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죄의 고백,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시는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죄를 범했을 때, 죄의식으로 괴로워할 때, 아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나를 받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1:9) 기도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