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2018 | 사순절 28
십자가의 메시지 (The Message of The Cross)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5:35-39
35 서 있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말했습니다. “보시오!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습니다.”
36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신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 막대기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마시게 하며 말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십자가에서 내려 주는지 봅시다.”
37 그러자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38 그 때, 성전에 있던 휘장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39 예수님 바로 앞에 서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35 Some of the bystanders misunderstood and thought he was calling for the prophet Elijah.
36 One of them ran and filled a sponge with sour wine, holding it up to him on a reed stick so he could drink. "Wait!" he said. "Let's see whether Elijah comes to take him down!"
37 Then Jesus uttered another loud cry and breathed his last.
38 And the curtain in the sanctuary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39 When the Roman officer who stood facing him saw how he had died, he exclaimed,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로마서 5:2에서 바울이 선언한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이전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로마서 3:23). 십자가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잘 읽어 보세요.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아무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단지 십자가의 메시지를 듣고 받아 들인 것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종교나 사상은 없습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 (ran-som)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위대한 것은 그 대가를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Yahweh-Yireh, 창세기 22:14)’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2:14).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For God bought you with a high price. So you must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전서 6:20)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몸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3) 예전에 살았던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1-1226, 이탈리아)는 ‘평화의 기도 (Prayer of Peace)’로 유명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이 기도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우리 영혼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나도 나의 삶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드리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삶을 도구로 드린다는 것은 이 세상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나를 위한 이기적인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림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리고, 탐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살았다 감으로 조금도 인류의 삶을 진전 시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느 루트로 정상에 올랐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비유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극수수의 사람이 정상에 올라가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로 아래도 내려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정상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정상으로 올라가는 종교로 본 것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느 길로 올라가든 정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든 종교가 다 같다는 주장을 합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어느 수준에 오른 등산가라면 남이 아직 오르지 못한 험난한 루트를 개발하고, 그 루트로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남이 오르지 못한 루트를 통해 정상을 정복하고 쾌감을 느낍니다. 정상에 오는 루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 주신 루트는 나만 알고 나만 오를 수 있는 험난한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쉽고 편한 루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우리의 ‘몸 값 (ransom)’으로 내 주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이렇게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진리의 전부입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요즘은 물건을 살 때 우편 주문을 많이 합니다. 우편 주문을 할 때 값이 싸다고 덜컥 주문 했다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그냥 15불 이라고 해서 싼 줄 알고 주문 했는데, 몇 가지 물어 보는 것들이 있길래 yes라고 한 두 번 눌렀는데, 마지막 결재할 때 금액은 26불입니다. 이것을 hidden cost라고 하잖아요? 우편 주문을 할 때는 hidden cost가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는 hidden cost가 없습니다. 쉬운 줄 알고 발을 들여놨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렇게 구원의 길이 어렵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 들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잖아요? 깨어진 관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회복된 관계에는 사람에게 평안 (peace)을 줍니다.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로마서 5:1-2)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말씀인가요? 이 말씀에서 복음의 영광의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얼굴이 상상이 됩니다. 그의 얼굴은 복음의 영광의 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이유가 오늘 읽은 37-3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에 있던 휘장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이렇게 선언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좍!"하고 찢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에, 그 지성소 안을 비추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밖으로 새어 나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앞에 구원의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바로 밑에서 형을 집행하던 장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역사적인 장면의 participant, 아니 목격자가 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exclaimed,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39절) 감정에 북받친 백부장의 입에서 이 소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마다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을 즐겁게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