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2018 | 사순절 32
십자가의 중심부 (The Heart of The Cross)
김태환 목사
마태복음 27:45-54
45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이 어둠에 덮였습니다.
46 오후 3시쯤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47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48 그러자 얼른 한 사람이 뛰어가서 해면을 가져다, 신 포도주를 적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시도록 지팡이에 매달아 주었습니다.
49 나머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가만 놔 두어라. 엘리야가 그를 구원하러 오나 보자.”
50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51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쪼개졌으며,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53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54 예수님을 지키던 백부장과 병사들이, 지진과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고 매우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45 At noon, darkness fell across the whole land until three o'clock.
46 At about three o'clock,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Eli, Eli, lema sabachthani?" 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abandoned me?"
47 Some of the bystanders misunderstood and thought he was calling for the prophet Elijah.
48 One of them ran and filled a sponge with sour wine, holding it up to him on a reed stick so he could drink.
49 But the rest said, "Wait! Let's see whether Elijah comes to save him."
50 Then Jesus shouted out again, and he released his spirit.
51 At that moment the curtain in the sanctuary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The earth shook, rocks split apart,
52 and tombs opened. The bodies of many godly men and women who had died were raised from the dead.
53 They left the cemetery after Jesus' resurrection, went into the holy city of Jerusalem, and appeared to many people.
54 The Roman officer and the other soldiers at the crucifixion were terrified by the earthquake and all that had happened. They said, "This man truly was the Son of God!"
아이작 와츠 (Issac Watts, 1674-1748, 영국)가 쓴 찬송가 중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어릴 때부터 찬송시를 짓는 천재성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하루는 예배 시간에 시편을 인도자와 회중이 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니 어린 아이작 와츠가 시편 교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 온 아버지는 아이작 와츠가 예배 시간에 시편 교독을 하지 않은 이유를 대라고 하면서 아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잘못된 것을 꾸짖었습니다. 그 때 아이작 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 시편에는 음악이 없고 운 (rhyme)도 맞지 않은데, 그런 시편을 굳이 따라 할 이유가 없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아버지는 “네가 다윗보다 다 똑똑하단 말이냐? 그러면 그 시편보다 더 좋은 찬송시를 써 봐라” 하면서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아이작 와츠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아이작 와츠는 14살도 되기 전에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와츠에게 12년 동안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에서 아이작 와츠는 찬송시를 쓰는 데 탁월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찬송가에 아이작 와츠가 쓴 찬송시가 12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가 쓴 대표적인 찬송가 중에 ‘웬 말인가 날 위하여 (143장)’이 있습니다. 그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나” (1절)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2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3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립니다” (4절)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5절)
이 찬송시에 흐르고 있는 은혜와 영성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찬송가 가사처럼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정말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45절).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시간에 밝게 빛나던 해마저 빛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9:4-5)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그 때 해가 빛을 잃었던 것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우주적인 슬픔’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삶은 캄캄한 밤과 같은 어두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매우 어둡고 우울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절규하는 말씀이 나오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지만 우리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시간이고, 소중한 장면입니다. 비록 어둡고 우울한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이 장면은 없어서는 안 될 장면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방법 밖에 없었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생깁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뭔가 꼭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를 볼 때 생기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예수님의 앞을 막은 것은 십자가가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읽어 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a dangerous trap to me.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마태복음 16:22-23) 이 말씀을 바울 버전으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의 삶은 세상적인 혹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항상 이기적이고 불완전합니다. 항상 적을 만들고, 경쟁해야 하고,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방식은 평화를 가져 옵니다. 자기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좋게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불완전합니다. 그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외에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control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control을 벗어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저께 제가 도표를 보여 드렸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또 십자가 아래서 일어났던 일 하나 하나가 이미 구약 성경에 특히 시편 22편에 세밀한 부분까지 예언되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control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God was in control perfectly at the Cross!”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결코 용서하실 수 없는 정의 하나님, 하지만 동시에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무 갈등 없이 완벽하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모두 그 아들에게 전가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의의 하나님께서 만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심으로써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은 힘을 잃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를 짓게 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노예로 살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심으로 사탄은 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완벽하게 패배한 것입니다. 사탄은 무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어저께 아침에 읽었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고린도전서 15:56-57)
마지막으로, 만일 십자가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났다면, 그것 만으로도 훌륭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50-51절 말씀입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두 조각으로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며칠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나마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언약 (The New Covenant)’을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이 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이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던 이 길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길을 ‘새 길 (the new way)’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 (히브리서 10:20).
지금 우리는 이 ‘새 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합니다. 교회 오면 예배 시간에 목사의 인도를 받기는 합니다만,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의미가 다릅니다. 목사 역시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새 길’을 따라 교우들과 같이 하나님께 나가는 성도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새 길’이 우리 앞에 열림으로써 어떤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읽어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우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히브리서 4: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