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2018 | 사순절 34
십자가 후에 (After The Cross)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14:16-19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고, 그분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을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너희 안에 계시고 너희는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고 너희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①, who will never leave you. / ①Or Comforter, or Encourager, or Counselor. Greek reads Paraclete
17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18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19 Soon the world will no longer see me, but you will see me. Since I live, you also will live.
성령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금방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요한복음 16:7)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됩니까?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지 않으면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고 ‘보혜사’께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보혜사 (16절)’라는 말입니다. 본래 ‘보혜사’라는 말은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하는데요. ‘곁으로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번역하다 보니까 ‘Advocate (대변자)’ ‘Comforter (위로자)’ ‘Encourager (격려자)’ ‘Counselor (상담자)’ 등 여러가지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 (16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쉽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자기는 하나님께로 가지만, 내가 너희를 버려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18절)”고 하시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지만, 사실은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혹은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17절).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2:10).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때로는 대변자로, 때로는 위로자로, 격려자로, 상담자로 우리 곁에 계시는 그분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을 잘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깨달으면, 우리는 믿음생활을 바른 길을 따라 잘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 ‘보혜사’의 인도를 잘 받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일 많이 하는 오해는 성령을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영어에서 성령을 말한 때는 언제나 ‘He’라고 남성 명사로 표현합니다. 절대로 ‘it’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는 명사에 성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παράκλητος’는 남성 명사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대명사로 표현하려면 ‘그분’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격이 있으시다는 말은 성령께서 감정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면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지 않으면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성령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니까 우리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영이시니까 우리의 영의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꽉 차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내 속에 성령이 꽉 차 있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부흥사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아멘, 아멘”합니다.
성경에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셨다.” (누가복음 4:1)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사도행전 4:8)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사도행전 6:3)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사도행전 11:24)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은 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꽉 찬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이미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3 말씀을 쉽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즉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 그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이미 내 안에 온전하게 들어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많고 적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지배하셨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해 지배하신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성령 충만한 삶 (The Spirit Filled Life)’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가 작은 차이라고 생각 되시나요?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생활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양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많이 넘어집니다. 사탄이 그런 사람을 공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그런 때에 전혀 working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내가 구원 받았을 때 그때부터 이미 성령은 내 안에 계셨어요. 조금 계시고 많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많이 지배하느냐, 적게 지배하느냐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은 제자들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잘 이해한 사람은 믿음생활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 생활에서 승리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서 working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성령 충만’을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양의 많고 적음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부터 성령에 대한 오해가 시작됩니다. 성령은 처음부터 우리 안에 온전히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유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얼마나 소유하는지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소유하시면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소유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보세요. 성령께서 나를 소유하신다고 생각하면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되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일을 하다가 시험에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주 시험에 걸려 넘어집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성령께서 일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일하는 것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즉 ‘십자가의 죽음 후에’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줍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아 가십시오. 잘못 배운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배운 지식이라야 우리의 삶에서 working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working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격려자가 되시고, 상담자가 되시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