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2018 | 종려주일 설교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
김태환 목사
베드로전서 2:21-25
21 여러분은 선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22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
23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25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을 살피시는 목자와 보호자의 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21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2 He never sinned, nor ever deceived anyone.① / ①Isa 53.9
23 He did not retaliate when he was insulted, nor threaten revenge when he suffered. He left his case in the hands of God, who always judges fairly.
24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25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
전 주에 우리 교회 성가대에서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참 좋은 찬양입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드디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네
그것은 나의 마음 모두를 주께 드리는 일 속에 있네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속에서
나의 삶을 모두 오직 주님께만 드리리, 오직 주님께만 드리리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한 적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모욕을 당해도 욕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당신 두고 봅시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다고 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꼭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에 ‘화목제물 (ransom)’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두 강도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흠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개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를 기준으로 해서 천 년, 아니 천 오 백 년이 넘는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도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BC 1,000년 혹은 BC 1,500년경이면 우리나라의 고조선 시대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유대나라의 역사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그들은 이미 문자가 있었고, ‘여호와’라는 유일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의 역사가 바로 그 때의 역사입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그 제사 중에 ‘화목 제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때 제물로 드리는 것이 ‘흠 없는 어린 양’ 입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벽한 ‘the sinless and spotless Lamb of God (죄가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베드로전서 1:19)’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 유대인들의 제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전한 화목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은 그만큼 값진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에 써서 보냈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예루살렘에서 크리스천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조국을 떠나 주로 소아시아 지방에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 구원이 값진 구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 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으라 (마가복음 11:9)!”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직 사람을 한번도 태워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합니다. 왜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발견합니다. 혹시 여러분,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을 읽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한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 길입니다. 이 길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길로 들어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2)
새롭게 열린 구원의 길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이미 증언한 길이라고 하잖아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신 구원의 길에, footnote가 달린 것입니다. 학생들이 논문을 쓸 때, 자기 주장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이렇다는 주장을 할 때 아무 근거 없이 그런 주장을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야 합니다. 그것이 footnote 아닙니까? 우리 말로는 ‘관주(貫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누가 다 큰 사람이 나귀 새끼를 타겠습니까? 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스가랴 9:9’ 이라는 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스가랴 (Zechariah)는 기원전 약 500년 경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한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온 백성아, 기뻐하여라. 예루살렘 백성아, 즐거이 외쳐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구원하시는 왕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500년 전에 기록한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구원의 새 길은 이렇게 예언자들이 증언한 길입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 (The Passion Week)’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한 주간을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그는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으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털을 깎이는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이사야 53:7)” 고 했는데, 정말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심문을 하던 총독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길만큼 예수님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14).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만 자기를 변호하면 더 편해 질 수도 있고, 재판이 유리하게 돌아갈 수도 있는데,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복음서 여기 저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십자가 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사형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형이 집행 되는 과정에서도 한번 더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사형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려는 인간적인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5:23)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 어떤 것의 도움을 받지 않으시고 고통을 몸소 다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왜 (Why)?”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1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example’을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요. “A Christian is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받아 들이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우리도 예수님이 남기신 발자국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세상에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앞으로 세상은 기술적으로는 더 발전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나빠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말씀대로 살기를 거절한다면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디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어디 내가 같이 시간을 보내줘야 할 사람은 없는가?” “내가 얘기를 들어줘야 할 외로운 사람은 없는가?” “어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는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없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에게 희망이 생긴다니까요.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죽을 우리 몸에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 있지만 예수님을 위해 항상 몸을 죽음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활동하지만,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 “Through suffering, our bodies continue to share in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seen in our bodies. Yes, we live under constant danger of death because we serve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will be evident in our dying bodies. So we live in the face of death, but this has resulted in eternal life for you.”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당신은 정말 예수님 같이 살고 있네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So we live in the face of death, but this has resulted in eternal life for you”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살아가는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 살면 돼!”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우리교회에 나오는 청년들 중에 이 말씀처럼 살겠다는 청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 청년들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고급 인력들입니다. 어디서나 리더십을 가진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들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요. 이 사람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이 말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라는 말입니다), 의 (the righteousness)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 속에 들어가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We Are The Reason’ 이 노래 가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의 삶에 이런 가슴 벅찬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 죽겠다는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살 이유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목자를 찾아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목자를 잃어 버린 양처럼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고, 영혼의 목자에게 인생의 닻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방황하는 분들 있나요? 어디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인생의 한 과정으로 방황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황은 창조적인 방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방황이라면 끝을 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우리의 영혼들이 영혼의 목자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방황을 계속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합니다 (We have this hope as an anchor for the soul, firm and secure).” 배가 항구에 들어와 닻을 내리면 파도가 쳐도, 바람이 불어도 휩쓸려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닻을 내려야 떠내려 가지 않습니다. 우리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 분,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할 분입니다. 그 분에게 닻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이 ‘frim and secure (견고하고 안전)’해 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있는가?” 하고 질문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