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2018 | 사순절 35
우리의 큰 구원 (Our Great Salvation)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7:44-48
44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보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쉬지 않았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이는 이 여자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가 용서되었다.”
44 Then he turned toward the woman and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came into your house. You did not give me any water for my feet, but she wet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45 You did not give me a kiss, but this woman, from the time I entered, has not stopped kissing my feet.
46 You did not put oil on my head, but she has poured perfume on my feet.
47 Therefore, I tell you,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has been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48 Then Jesus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 됩니다. 그리고 사순절도 이번 토요일로 끝이 납니다. 처음부터 출석하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번 사순절에 부어주신 은혜가 많은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곤 했지만, 여전히 저에게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미스터리입니다. 미스터리라는 말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도 이해 가 안 되고, 이성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감정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평생 가도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과 예수님의 인격과 삶 전체를 통해서,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지금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다. 또한 지금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 (누가복음 10: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when they were alone, he turned to the disciples and said, "Blessed are the eyes that see what you have seen. I tell you, many prophets and kings longed to see what you see, but they didn't see it. And they longed to hear what you hear, but they didn't hear it."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예언자들도, 왕들도 그렇게 보고 싶어 했고 듣고 싶어했지만,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미처 잘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예언자들도, 왕들도,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왕이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었던 솔로몬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언자들이, 솔로몬 같은 지혜가 많았던 왕이 그렇게 듣고 싶어 했고, 보고 싶어했던 것들을 지금 우리는 매일 듣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누가복음 말씀을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살던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향유병을 들고 그 집에 갔습니다. 이 여자는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성경에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을 했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 대로 이 여자는 몸을 파는 prostitute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누가 말릴 겨들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 시몬은 이 광경을 보면서 매우 불쾌했을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집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어떤 집인데, 너 같은 여자가 들어 와?” 하면서 매우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 예수라는 사람이 예언자라면 저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저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예언자가 아닌 것이 틀림 없어! ”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셨는지 예수님께서 시몬을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 그것은 이 여자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47절) “A person who is forgiven little shows only little love, a person who is forgiven much loves much.”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5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빚을 갚을 길이 없었는데, 주인이 두 사람 모두 빚을 탕감해 줬다면, 누가 더 주인을 사랑했겠느냐?” 이 질문에 시몬은 “그야, 500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 더 주인을 사랑했겠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대로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적게 탕감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주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적게 용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얼마나 형편 없는 삶을 살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 알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큰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니, 이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가사를 쓴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John Newton 목사는 한 때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유럽 시장에 파는 노예선의 선원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자리까지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전해 주는 책 한 권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그 책 이름이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1471, 독일)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입니다. John Newton이 그의 고백을 담은 찬송시를 들어 보십시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자신을 구원한 것은 ‘the precious blood of Jesus’라고 고백하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그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가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전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8)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포인트는,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엄청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들이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죄의 값으로 지불 하고서야 용서 받을 수 있을 만큼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보통 제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아는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 (디모데전서 1:15)’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큰 죄를 용서 받은 사실을 안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완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일대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5:23). 이 말은 그가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더 넓은 곳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복음에 대한 열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큰 죄를 용서하셨다는 깨달음이 있는 자리가 곧 크리스천의 삶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감사의 자리이고, 사명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았는지를 깨달은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 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찬송가 151장)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어서 내 몸을 바쳐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2: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 위에 있는 그분의 보좌 곁에 우리를 앉혀 주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God made us alive together with Christ, and made us sit together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so that in the ages to come He might show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 in His kindness toward us in Christ Je-sus).” (NKJV)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넘치는 부요함 (풍성함)’ 아닙니까? 어떤 성경에서는 ‘exceeding’이라는 말 대신 ‘surpass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무튼 영어의 표현이 참 구체적이고 디테일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를 보여 주시려고 하시는데요. ‘in the ages to com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오고 오는 세대에’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시려고 하는데, 얼마나 그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 지, 제대로 보여 주려면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보여 줘도 다 못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십자가 위에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넘치도록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하나님의 ‘the exceeding riches of His grace’를 갚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