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018 | 부활주일 설교
갈릴리에서 만나자! (You Will See Him in Galilee!)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6:1-8
1 안식일이 지나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께 바르려고 향료를 샀습니다.
2 일 주일이 시작되는 첫째 날 매우 이른 시간, 해가 뜰 무렵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3 이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 주겠는가?”
4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커다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5 무덤에 들어가자, 하얀 옷을 입은 한 젊은 사람이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매우 무서웠습니다.
6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고 있군요.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여기가 예수님을 모셨던 곳입니다.
7 자, 이제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입니다”
8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1 Saturday evening, when the Sabbath ended, Mary Magdalene,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went out and purchased burial spices so they could anoint Jesus' body.
2 Very early on Sunday morning①, just at sunrise, they went to the tomb. / ①Greek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3 On the way they were asking each other, "Who will roll away the stone for us from the entrance to the tomb?"
4 But as they arrived, they looked up and saw that the stone, which was very large, had already been rolled aside.
5 When they entered the tomb, they saw a young man clothed in a white robe sitting on the right side. The women were shocked,
6 but the angel said, "Don't be alarmed. You are looking for Jesus of Nazareth, who was crucified. He isn't here! He is risen from the dead! Look, this is where they laid his body.
7 Now go and tell his disciples, including Peter, that Jesus is going ahead of you to Galilee. You will see him there, just as he told you before he died."
8 The women fled from the tomb, trembling and bewildered, and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too frightened.
역사적인 예수가 언제 출생했느냐 하는데는 약간 다른 이론들이 있습니다만, 브리태니카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esus, also called Jesus Christ, Jesus of Galilee, or Jesus of Nazareth was born in c. 6–4 B.C. in Bethlehem and died c. 30 A.D. in Jerusalem (예수, 혹은 예수 그리스도, 갈릴리의 예수, 나사렛 예수라고도 불리는데, 기원전 6-4년 경에 베들레헴에서 출생했고, 서기 30년 경에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1988년 전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에 실명(實名)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 세 여자들이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사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매우 이른 시간, 해가 뜰 무렵이었습니다. 가면서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은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 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갔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커다란 돌은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무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한 젊은 사람이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자들은 매우 무서웠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고 있지요?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여기가 예수님을 모셨던 곳입니다. 이제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소위 가장 많이 얘기되고 있는 ‘빈 무덤 (The Empty Tomb)’에 대한 성경의 오리지널 텍스트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 아이로닉한 것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을 헛된 것이라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all our preaching is useless, and your faith is useless)”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4). 부활에 대한 조그만 의심이라고 있으신 분들은 조만간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한국 신문을 읽다가 “예수는 신일까요?” 이런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사가 아니라 광고였습니다. 일반적인 광고가 아니라 전문적인 논문 형태의 광고 기사였습니다. pdf file로 다운로드를 받게 되어 있더라고도요. 매우 긴 글이 10개의 제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출처를 찾아 봤더니 예수님을 변증하는 (apologize) 사이트의 글을 번역해서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 글 속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이몬 그린리프 (Simon Greenleaf, 1783-1853)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바드 법대를 세운 전설적인 인물인데요. ‘증거의 법칙에 대한 논문 (A Treatise on the Law of Ev¬i¬dence)’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모두 3권으로 출판된 책입니다.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걸작으로 알려진 책이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의 재판제도는 아직도 그린리프가 구성한 증거의 규칙에 의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이몬 그린리프에 대하여 과연 이 말이 사실인지 알아 봤더니,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가 하바드 재직 시절 수업 시간에 어쩌다가 예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을 합니다. 무신론자 (atheist)였던 그는 당연히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던 학생들 중 세 명이 “교수님의 ‘증거의 규칙’을 예수의 부활에 적용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그럼 자기가 세운 규칙을 따라 부활에 대한 증거를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조사를 시작합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의 이론을 따라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는 예수가 실제로 무덤에서 살아 나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그를 가장 당황하게 한 것은 예수가 죽은 후 벌어진 극적인 변화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자들의 삶과 행동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어떻게 한 두 명도 아니고, 제자들 모두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증거의 규칙’을 적용해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린리프 교수는, 반대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조사의 결과를 ‘전도자들의 증언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The Gospels Examined by the Rules of Evidence)’이라는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들’이란 사 복음서의 저자들을 말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는지, 그가 수집한 증거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증거를 부정할 수 없어 결국 크리스천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편견을 갖지 않고 법정에서처럼 정직하게 증거를 검토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부활의 진리를 믿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경로가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다시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women fled from the tomb, trembling and bewildered, and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too frightened.”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두려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주려고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마태복음 28:10)”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외진 땅입니다. 성경에 갈릴리를 가리켜 “스블론과 납달리 땅,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마태복음 4:15-16)” 라고 한 것을 보면, 갈릴리는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요. 유대지방과 달리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 되었던 지역인 것이 분명합니다. 역사가들이 갈릴리에서 폭동이 많이 일어났었다고 쓴 것을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갈릴리가 대부분의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베드로 형제가 그렇고, 요한 형제가 그렇고요. 빌립과 나다나엘도 성경에 ‘벳새다 (Bethsaida, 요한복음 1:45)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두 사람도 어부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나사렛에서 성장했는데요.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한 마을입니다. 갈릴리에 ‘가버나움 (Capernaum)’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부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가버나움’에서 일루어졌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만, 제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가버나움’에 가 봤습니다. 마을 입구에 ‘Gapernaum, The Town Of Jesus’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는 말씀을 들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끌려갈 때부터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까지 모두 미리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은 흩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4:27, 마태복음 26:31) 바로 구약성경 스가랴 13:7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버리실 때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흩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오직 예수님 홀로 다 짊어지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자기 제자들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요. NASB에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gifts and the calling of God are irrevocable.” 로마서 11:2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irrevocable’이란 말은 ‘취소되는’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부르셨으면 그 부르심은 영원합니다. 결코 흐지부지 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습니다. 잠깐 그 부르심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잖아요.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장소로 예수님께나 제자들에게나 그들이 처음 만났던 갈릴리 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미션 (mission)’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션’은 ‘사명(使命)’입니다. 일상적인 말로는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미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걱정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그것이잖아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 밑바닥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불안감 이 있습니다. 물론 이 걱정이 ‘직업’하고도 연결되어 있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에 집중(集中, concentration)할 수 있습니다. 내 힘을 다른 일에 낭비하지 않고 모두 그 일이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삶의 열정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를 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확인하신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 (Feed my lamb, 요한복음 21:15, 16, 17)”라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은 베드로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질문이고,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다시 주신 ‘미션’입니다. 이 일을 하기에 갈릴리 해변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정해 주시려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어제 새벽에 사순절 마지막 설교에서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접속사 ‘into’에 세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toward or in the direction of (~을 향하여)’라는 뜻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향성을 가리켜 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의 삶의 방향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이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보자고 하셨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부활 (The Resurrection)’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갈릴리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로마의 호민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제자들을 따라 붙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미션’을 가지고 뿔뿔히 흩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동행했던 로마의 호민관도 자기의 길을 갑니다. 가다가 어느 주막에 들려 차를 한 잔 마십니다. 차를 다 마시고는 찻 값으로 호민관 반지를 빼서 책상에 ‘탁’ 하고 내 놓습니다. 호민관의 반지를 본 찻 집 주인이 깜짝 놀라면서 “호민관님, 정말 이걸 다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때 호민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믿어. 예전과 같이 살 수는 없지!” 이렇게 말하고 길을 떠나는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습니다.
히브리서 13:10-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십자가라는 제단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율법에 매달려서 구원을 찾으려는 사람은 이 제단에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제도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죽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몸은 성밖에서 불에 태워 버립니다. 예수께서 성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이러한 희생을 뜻합니다. 이 성밖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문 밖으로 나아갑시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든, 그들이 멸시를 하든, 상관하지 말고 예수께서 겪으신 수치와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분이 계신 곳으로 나아갑시다 (And so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께서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치과 고난을 나누려면 성 안에 있지 말고 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크리스천의 삶의 방향이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안은 예루살렘이고, 성 밖은 갈릴리입니다. 소외된 지역, 소외된 사람들을 사는 곳으로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메시지를 주시려고 자기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