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018 | 부활절 둘 째 주일
성령의 바람 (The Wind of The Holy Spirit)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3:1-8
1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공의회 의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2 어느 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이미 나이가 많아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태 안에 다시 들어가 두 번씩이나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5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다.
7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너무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제 맘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1 There was a man named Nicodemus, a Jewish religious leader who was a Pharisee.
2 After dark one evening, he came to speak with Jesus. "Rabbi," he said, "we all know that God has sent you to teach us. Your miraculous signs are evidence that God is with you."
3 Jesus replied, "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are born again①, you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 ①Or born from above; also in 3.7
4 "What do you mean?" exclaimed Nicodemus. "How can an old man go back into his mother's womb and be born again?"
5 Jesus replied, "I assure you, no one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out being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6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7 So don't be surprised when I say, `You must be born again.'
8 The wind blows wherever it wants. Just as you can hear the wind but can'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you can't explain how people are born of the Spirit."
지난 금요일 저녁에 ‘Quotes About The Resurrection of Jesus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들)’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부활에 대하여 어떤 말들을 했는지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많은 말들을 했는데, 내 말은 누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웃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 오는데, 한 교우가 제게 와서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도 기억하고 있는 걸요. 집에 가서 제가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내 드릴께요” 그래서 설마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그 교우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래서 읽어 봤더니, 제가 한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정말 멋있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부활절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 들이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특별한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제 생애 가운데 일하시는 놀라운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눈부신 봄 날입니다. 겨우 내 얼어 붙었던 대지(大地)가 녹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고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새롭게 움트기를 바랍니다.” (2010년 4월 4일 설교에서)
보스턴의 4월은 바람이 많이 붑니다. 예상치 않게 바람의 방향이 자주 바뀝니다. 쌀쌀한 날씨가 더욱 차게 느껴지지만, 불어 오는 바람을 맞으면 겨우 내 막혔던 가슴이 시원해 집니다. 저는 4월의 바람을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을 지나고, 부활절을 지나고 불어오는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이 바람은 성령의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겨우 내 죽었던 것을 살리는 생명의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에도 바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람은 제 맘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8절) “The wind blows wherever it wants. Just as you can hear the wind but can'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you can't explain how people are born of the Spirit." 예수님은 제멋대로 부는 바람을 예로 들면서 그 바람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럼,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 사람이 거듭났는지 그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니고데모 (Nicodemus)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1절) 또 10절에도 니고데모에 대하여 이런 말도 나옵니다. “He was a respected Jewish teacher.”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의 규정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사람들입니다. 또 그는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70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존경 받는 선생 (랍비)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그가 살아왔던 배경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율법 교육을 받고,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왔지만, 막상 그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니고데모는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省察)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성경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성을 정복하는 자보다 낫다 (Better to be patient than powerful; better to have self-control than to conquer a city., 잠언 16:32)”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implication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성찰하는 일이 자기 밖의 일들을 다스리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시대에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받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니고데모 외에 누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고,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올라간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듭나야 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인간성이 어떻게 변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니고데모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워지는 삶의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human life를 반복해서 만들어낼 뿐입니다. 첫째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아도 우리가 낳는 것은 ‘human life’입니다. 또 우리의 아들들와 딸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여전히 ‘human life’를 reproduce할 뿐입니다. 여기서 ‘human life’라는 말은 죄된 인간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하지만, 성령께서는영적인 생명을 낳습니다).” 여기서 ‘spiritual life’라는 말은 ‘human life’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인간성이 변화된 ‘영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오늘 단 위에서 설교하고 있는 저도 그렇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는 일은 오직 성령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이 성령으로 변화된 삶의 ‘examples’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 (Christ-centered life)’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아예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갈라디아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인 삶 (self-centered life)’을 삽니다. 원래 ‘human life’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때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빌립보서 2:21) 바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원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의 죄된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Nominal Christian이 있고, Devout Christian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고, 후자는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평생 Nominal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Devout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역사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들어 볼 수 없습니다. 예전 크리스천들에게는 죄, 회개, 거듭남,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 체험, 천국, 지옥, 이런 말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듣기 좋아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교회를 채웠습니다.
둘째로, 사도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 (the living witnesses)’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사람들은 그렇게 변화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법정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 (ordinary men)’ 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평범한 사람들을 비범한 사람들로 변화 시킨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증언한 말들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 중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We cannot stop telling about everything we have seen and heard).” (사도행전 4:19-20)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위증 죄’로 고발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군인 복장을 하고 국회에 나와서 증언한 것들이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말처럼 진짜의 빛은 찬란하지 않은 법입니다. 진실의 힘이 있으니까 굳이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정말처럼 보이려고 하니까 군인 복장을 하고 말도 또박또박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예,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예,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렇게 국회에서 증언했던 말이 모두 사전에 다른 사람들과 말을 맞춘 거짓말로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증인’이라는 말은 물론 법정 용어입니다만, 희랍어로 증인을 ‘마르투스 (μαρτυς)’라고 합니다. 영어로 ‘martyr’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증인’이라는 말 속에 ‘순교’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We cannot stop telling about everything we have seen and heard!”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일들을 보고 들었으니까 그 일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순교의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평범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를 각오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을까요? 사람을 이렇게 변화 시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까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Human life를 spiritual life로 변화 시키는 일은 오직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일을 희생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맣이 내려 놓고, 많이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았고, 행복을 찾았습니다. 성경 말씀 하나 읽어 볼까요?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내게서 들은 가르침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답게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군사는 자신의 지휘관을 따라 그를 기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작은 일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습니다. 경기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 농부가 첫 번째로 수확되는 곡식을 먼저 얻는 것이 당연합니다.” (디모데후서 2:1-6)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한 말입니다.
‘Paul, the Apostle of Christ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영화가 AMC 극장에서 상영 중입니다. 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이 나는데, 그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순교하지만, 순교하기 직전에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읽는 목소리가 오버랩됩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서 끝이 나느냐 아니면, 우리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게 복음이 전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가 결정되고, 기독교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전 세대 사람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스턴에 불고 있는 이 바람이 나에게 주시는 ‘성령의 바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겁 많고, 용기 없는 사람들이 ‘복음의 증인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한 ‘Devout Christians’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내려 놓아야 합니다. 보다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집중력이 생기고 열정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