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2018 | 부활절 셋째 주일
요한복음 10:10 (John 10:10)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10:7-15
7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다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양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
13 그 사람은 단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양을 돌보지 않는다.”
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7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8 All who ever came before me we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sheep did not listen to them.
9 I am the gate; whoever enters through me will be saved. He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
10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12 The hired hand is not the shepherd who owns the sheep. So when he sees the wolf coming, he abandons the sheep and runs away. Then the wolf attacks the flock and scatters it.
13 The man runs away because he is a hired hand and cares nothing for the sheep.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sheep and my sheep know me--
15 just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Third Sunday of Easter’입니다. 보통은 교회력에서 이런 경우 ‘of’대신에 ‘after’를 씁니다. 그런데, 부활절만큼은 ‘after’를 쓰지 않고 ‘of’를 씁니다. ‘of’라는 전치사가 ‘~에 속해 있다’ 혹은 ‘연관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 하잖아요? 지금은 부활절 지난 후 세 번째 맞는 주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부활절에 속해 있고, 부활절과 연관되어 있는 주일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한번의 행사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력을 표시하는 방법에서도 부활절의 의미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교회력을 만드신 분들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풍성한 생명 (the abundant life)’에 대한 말씀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만,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진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1, 15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없을 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나는 정말 세상 사람들이 왜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쯤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 말을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자기 생활에 만족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만족스럽지만 “사는 게 다 이렇지”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충만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 (thirst)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대화(對話)의 주제가 바로 ‘충만한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우물이 될 것이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뭐라고 응답합니까? “선생님, 저에게 그런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을 뿐더러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이렇게 대답하잖아요? 이 여자의 내면에 ‘충만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목마름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있고,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풍성한 생명’이란 어떤 생명을 말할까요?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NIV) 우리 말 성경의 ‘풍성한’이란 말이 ‘to the ful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I have come (so) that they may have it to the full’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생명을 충분히, 충만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라는 뜻입니다. ‘충만한 (to the full or abundant)’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페리숀 (περισσών)’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exceedingly, very highly, beyond measure, more, superfluous’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넘쳐서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넘치는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즘 새벽기도에서 골로새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 목요일 새벽에 골로새서 2:9-10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 (deity)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느니라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and you have been given fullness in Christ, who is the head over every power and authority).” 전에 골로새서를 많이 읽었지만, 그 날 아침에 이 말씀이 전혀 새로운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있다는 말씀은 알았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주어진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 즉 ‘하나님의 신성 (deity)’이 하나도 빠짐 없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The fullness of God)’ 속에 ‘풍성한 생명’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생활 속에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귀하게 여기세요. 기분나는 대로, 감정에 따라 치우치는 믿음생활 하지 마세요. 진실한 마음으로 믿음생활 하세요. 우리의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금이나 은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산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주일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귀하여 여기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풍성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힘쓰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감춰진 ‘풍성한 생명’을 발견합니다.
둘째로,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발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늘 피곤하고, 지쳐 있는 이유는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목사님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입니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식사도 하고, 소식도 주고 받으면서 교제를 합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목회의 고달픔을 호소하셨습니다. 주일이 다가 오면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교회 건물이 보이면 가슴이 내려 앉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서 자기도 동감(同感)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이 다가 오면 저도 가슴이 뜁니다. 교회 건물이 멀리서 보이면 저도 가슴이 뜁니다. 그러나, 제가 가슴이 뛰는 이유는 가슴이 내려 앉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하는 것이 좋고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는 이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다가 오면 저의 가슴이 뜁니다. 저에게는 목회(牧會)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저에게는 목회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을 때 우리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풍성한 생명’은 분명히 삶의 의미와 그리고 삶의 이유, 삶의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행복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7-8)” 이렇게 자기의 삶을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지치지 않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의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의 삶의 의미가 있었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문제는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목적을 발견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일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와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단순히 “so that we may have life” 라고 말하지 않고, “so that we may have life to the full”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를 살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풍성한 삶’의 비결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비밀을 발견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셋째로, ‘풍성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a relationship with God)’ 속에서 발견됩니다. ‘풍성한 생명’은 물질적인 넉넉함이나 조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끔 성경에 ‘동행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표현으로 하면 ‘to walk with God’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에 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이런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누가복음 12:15) 주님의 말씀입니다. “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이 말씀 끝에 들려 오는 울림이 있습니다. “but life is measured by a relationship with God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 볼까요?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나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 성경에 참 놀라운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이 말씀도 대단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런 선언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물질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든지, 넉넉하든지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자유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이 선언과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좌우하는 것도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을 좌우하는 것도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이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좀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북한의 김정은이 국제 무대로 나오기를 희망하는 이유도 결국 경제적인 논리에 굴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북한이 그렇게 핵무기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도 결국은 국제 무대로 나오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경제적인 문제도 극복하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잖아요? ‘풍성한 생명’은 죽지 못해서 살아 있는 피곤하고 지친 생명이 아니라, ‘life to the full’이라고요. 삶의 목적이 주어지고, 삶의 의미와 이유가 분명한 삶이라고요. ‘풍성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모든 문제를 이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깁니다. 어떤 삶의 고난도 이깁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7-9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 (the gate for the sheep)’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과 양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목자가 자기 양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후, 양들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른다.” (3-4절)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두가지 채널 외에 다른 채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지나고, 주난 주간 지나고, 부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풍성한 생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요한복음 10:10) 그래서 오늘 설교 말씀 제목이 ‘요한복음 10:10’입니다. 사방에서 불어 오는 싱그러운 봄바람과 이 바람을 맞고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살아나듯이,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분명한 삶을 찾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관계는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더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이 이 봄철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