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2018 | 부활절 넷째 주일
평안의 인사 (Greetings of Peace)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20:19-23
19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자 무척 기뻐했습니다.
21 다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19 That Sunday evening the disciples were meeting behind locked door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ish leaders. Suddenly, Jesus was standing there among them! "Peace be with you," he said.
20 As he spoke, he showed them the wounds in his hands and his side. They were filled with joy when they saw the Lord!
21 Again he said,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am sending you."
22 Then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
23 If you forgive anyone's sins, they are forgiven. If you do not forgive them, they are not forgiven."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지금도 부활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누신 인사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심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에서 읽은 말씀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평안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글씨로 내가 친히 보내는 편지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18)
제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만, 터키 성지 순례를 갔다가 거기서 거대한 ‘카타콤 (Catacomb)’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원래 ‘카타콤’은 ‘cata (가운데)’라는 말과 ‘tumbas (무덤들)’이라는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공동묘지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박해를 피해 피난 가 있던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공동묘지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터키에 ‘데린구유 (Derinkuyu)’라는 세계 최대의 ‘카타콤’이 있습니다. 지하 55m, 모두 8층으로 되어 있고요. 마구간, 포도주 만드는 틀, 식당, 교실이 있고, 무기고와 묘지도 있습니다. 관광객에게 공개 되는 것은 전체 규모의 10% 정도라고 합니다. 3층과 4층에 교회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격려차 방문했던 베드로가 서서 설교를 했을 지 모릅니다.” ‘데린구유’ 카타콤이 1세기에 만들어졌다면 가능한 얘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300년 경에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베드로가 방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1세기에 베드로가 ‘데린구유’에 피신해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방문했다면,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편지를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고향을 떠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전서 1:1-2) 베드로가 이렇게 인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May God give you more and more grace and peace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화를 넘치게 주시기를 빕니다).” 조국을 떠나서,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모를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평화’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말씀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10:5-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하여라. 만일 평화의 사람이 있으면, 네 평화가 그에게 머무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또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라는 영향력 있는 개신교 신학자가 있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에게 세 가지의 불안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 (the anxiety of death)이고, .둘째는, 공허함과 의미를 상실하는 데서 오는 불안 (the anxiety of meaninglessness)이고, 셋째는 정죄함에서 오는 불안 (the anxiety of condemnation)이라고 했습니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불안 (basic and universal anxiety)이라고 했습니다. 의미를 상실한 데서 오는 불안은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이 불안은 ‘non-being (비존재)’로부터 오는 위협 (threa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실존론적인 불안 (existential anxiety)’이라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죄함에서 오는 불안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틸리히는 이 세 가지 불안 가운데, 우리가 가장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불안은 의미를 상실함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Tillich의 말을 들어 보면 누구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저녁 7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 옵니다. 씻고 식사하고 나면 9시가 넘습니다. 그러면, 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야 합니다. 왜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일을 해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부모를 떠나고 집을 떠나서 이곳 보스턴까지 와서 맘 고생하면서 공부합니까? 나중에 학위를 받아서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대답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Tillich의 말은 이렇게 의미를 상실함에서 오는 공허함과 불안이 제일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서워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먼저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평화를 빌어 주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깐 보류해 두고, 요한복음 14:27에 있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m leaving you with a gift- 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peace of mind and heart’입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 평화,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mind’는 우리의 ‘머리 (head)’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intellect)과 판단을 총괄하는 곳이 ‘mind’ ‘head’입니다. ‘heart’는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heart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 intelligence (지성)를 총괄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지, mind와 heart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모든 과정 속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말로 ‘평화’ ‘평강’ 혹은 ‘평안’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샬롬 (Shalom)’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 봤더니,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헤어질 때도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면서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샬롬’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사해 봤더니, complete¬ness, wholeness, health, peace, welfare, safety, soundness, tranquility, prosperity, perfectness, fullness, rest, harmony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좋은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지금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정상 회담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상회담의 의제(議題) 속에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공격하지 않고, 도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북한과 정상회담이 잘 되어서 ‘평화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어서 어선을 나포하거나, 무장 공비를 보내서 주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하면 그 ‘평화협정’은 한낱 종이조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temporary 평화입니다. permanent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평화’는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I am leaving you with a gift”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 (the peace I give)’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My peace I give you”라고 했습니다. 여기 ‘peace’라고 번역된 말들은 모두 히브리어 ‘shalom’을 번역한 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샬롬’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를 읽어 보세요.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샬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 위기 상황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다 다급한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어떤 때에도 예수님은 ‘샬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샬롬’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요한복음 16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33절)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리 마음에 생기는 근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샬롬’을 받은 사람은 근심을 이기고, 두려움을 넉넉하게 이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샬롬’으로 고난을 이기고, 환난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이 주시는 ‘샬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세 개의 성경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골로새서 3:1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로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And let the peace that comes from Christ rule in your hearts. For as members of one body you are called to live in peace. And always be thankful).”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평화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소유함으로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평화가 네 속에 흘러 들어오도록, 그렇게 해서 그 평화가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말미암아 불안해 하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함께 부름을 받은 지체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또 ‘평안의 끈 (the bond of peace)’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 4:3). 교회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평안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6-7에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저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될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음으로 잃어버리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은혜를 놓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9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Keep putting into practice all you learned and received from me-everything you heard from me and saw me doing. Then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대로, 깨달은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이 말씀대로 실천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말은 내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 (the age of anxiety)’라고 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1918-1990)이 1949년에 작곡한 Symphony No. 2 제목이 ‘The Age of Anxiety’입니다. Bernstein이 보스턴 북쪽에 있는 Lawrence에서 태어났더라고요. 보스턴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던 부모가 여름에 로렌스로 휴가를 갔다가 갑자기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음악 강연자,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번스타인은 오랫동안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그것들을 이기게 하는 ‘평화’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평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평화’의 메신저들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십시오. “이 집에,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