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2018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On The Road to Emmaus)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24:13-27
13 그런데 그 날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14 이들은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15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습니다.
18 그 가운데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다녀오면서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이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게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22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지만
23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24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5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구나.
26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27 예수님께서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를 들어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13 That same day two of Jesus' followers were walking to the village of Emmaus, seven miles① from Jerusalem. / ①Greek 60 stadia [11.1 kilometers]
14 As they walked along they were talking about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15 As they talked and discussed these things, Jesus himself suddenly came and began walking with them.
16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
17 He asked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so intently as you walk along?" They stopped short, sadness written across their faces.
18 Then one of them, Cleopas, replied, "You must be the only person in Jerusalem who hasn't heard about all the things that have happened there the last few days."
19 "What things?" Jesus asked. "The things that happened to Jesus, the man from Nazareth," they said. "He was a prophet who did powerful miracles, and he was a mighty teacher in the eyes of God and all the people.
20 But our leading priests and other religious leaders handed him over to be condemned to death, and they crucified him.
21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rescue Israel. This all happened three days ago.
22 "Then some women from our group of his followers were at his tomb early this morning, and they came back with an amazing report.
23 They said his body was missing, and they had seen angels who told them Jesus is alive!
24 Some of our men ran out to see, and sure enough, his body was gone, just as the women had said."
25 Then Jesus said to them, "You foolish people! You find it so hard to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wrote in the Scriptures.
26 Wasn't it clearly predicted that the Messiah would have to suffer all these things before entering his glory?"
27 Then Jesus took them through the writings of Moses and all the prophets, explaining from all the Scriptures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지 성경 어디를 읽어 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글로바’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꽤 이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로바’의 아내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도망 가고, 제자 ‘요한’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고, 용감한 몇 명의 여자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모든 일들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 19:25).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누구라고 하면 알 정도로 꽤 이름이 있었던 ‘글로바’가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면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매우 침통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같은 방향으로 가던 한 낯선 사람이 두 사람에게 얘기를 겁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이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보면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 보지 못하도록 하셨다., 누가복음 24:16)”이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 같은데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글쎄요. 무슨 일입니까?”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모두들 그 분이 메시아라고 기대 했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오늘로 삼 일째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던 여자들이 하는 말이 무덤이 비어 있었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그 분의 제자들 중에 몇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대로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참 답답하네요. 두 분은 왜 예언자들이 쓴 글을 믿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간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모세가 쓴 글에서부터 예언자들이 쓴 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 이렇게 해서 그 날 저녁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묵게 되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열려 이 분이 예수님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두 사람이 말합니다. “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는가?” (32절) 두 사람은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열 한 제자들과 그 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제자들에게 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오늘의 이 말씀을 화폭에 담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으로 이 말씀에서 느낀 감동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카라바조 (Caravaggio)가 그린 ‘Supper at Emmaus (1602-1603)가 유명하고, 네델란드의 마티아스 스톰 (Matthias Stom)이 그린 ‘Supper at Emmaus with Candlelighted (1633-1639)’도 유명합니다. 또 빛의 화가 렘브란트 (Rembrandt)가 그린 ‘A Supper at Emmaus (1648)’도 많이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들은 모두 두 제자가 식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했던 그 순간을 포착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과 두 제자를 그린 로버트 준트 (Robert Zund)의 ‘The Road to Emmaus (1877)’입니다. 준트는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늦은 오후 길을 예수님과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을 같이 걷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저는 두 가지,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 2차 대전 말기에, 중국 오지의 시골 길을 의심에 잠긴 한 사진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 주님! 주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여 주신다면 저는 믿겠습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에 들려 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런데, 그곳은 눈이 녹으면서 질퍽질퍽한 들판 길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에 따라 말에서 내려 그 질퍽질퍽한 들판 길을 장면을 찍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해 보았더니, 뜻밖에도 온유와 사랑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 사진이 한참 유행했습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리빙 룸에 걸어 놓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 액자에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God is the head of this house, the unseen guest at every meal and the silent listener at every conversation).”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가지고 끼어드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이 끊어지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쉽게 만나게 됩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왜 쉽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까?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Lord, You told me when I decided to follow You, You would walk and talk with me all the way. But I'm aware that during the most troublesome times of my life there is only one set of footprints. I just don't understand why, when I need You most, You leave me." He whisper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ill never leave you, never, ever, during your trials and testings. When you saw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In The Story of The Footprint on The Sand (‘모래 위의 발자국’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Athens)에서 설교했을 때, 제일 먼저 꺼냈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He is not far from any one of us.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사도행전 17:27-28)” 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교리적으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어제 새벽 기도에서 요한일서 5장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심으로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We know that God's children do not make a practice of sinning, for God's Son holds them securely, and the evil one cannot touch them).” (요한일서 5: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둘째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회심 (conversion)’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이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겁지 않았는가?” (누가복음 24:32) 바로 이 마음이 뜨거웠던 그 시간이 이 두 사람에게 ‘회심’이 일어났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전에서 ‘회심 (conversion)’에 대한 정의를 찾아 봤더니,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태도와 감정과 관점(觀點)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회심’에 대한 정의를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에게서 배운 말씀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모두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때 그들이 품었던 열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들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들의 식은 가슴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길에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가슴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런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히 냉소적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 측에서 보면 워낙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한동안 사울을 인정하지 않고 경계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회심’은 사람을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요즘에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놓고, 뉴스에 ‘CVID’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Complete (완전한), Verifiable (검증할 수 있는), Irreversible (되돌릴 수 없는) Dismantlement (해체)’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말이 ‘Irreversible’이란 말이지요. 한자로,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고 합니다. ‘회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불가역적’입니다. 한번 ‘회심’이 일어났으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만일 ‘회심’을 했다고 하면서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회심’이 온전한 ‘회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북한에게 ‘CVID’를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북한의 ‘회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회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번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드렸으면 ‘불가역적’이 되어야 합니다. 한번 내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로 결심했으면, 이것은 내 인생에 ‘불가역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 그랬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만일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6)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갈라디아서 2:2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나는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7-8) 그의 ‘회심’은 일시적인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Complete (완전한), Verifiable (검증할 수 있는), Irreversible (되돌릴 수 없는) Dismantlement (해체)’였습니다. 우리에게 ‘회심’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은 지금의 우리의 삶에 대한 이런 ‘해체’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변에서 '회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회심'한 사람들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회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존 웨슬리 (John Wesley)의 회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우리는 생의 의미와 생의 가치를 상실한 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태국에서 ‘목청(木淸)’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목청’은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나무는 높이가 30-40m 정도 되는 나무도 있고, 무려 50m나 되는 높은 나무도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태국 현지인 한 사람이 50m나 되는 높은 나무에서 꿀을 따고 내려 오면서 너무 높아 무서워서 밑을 내려 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피디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청’은 위험한 일이어서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위험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우리 가슴에 열정을 불어 넣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살 동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회심’함으로써 의미 있고, 가치 있고, 가슴 떨리도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메시지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지금까지 결정한 일 중에 가장 잘한 결정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에 ‘회심’이 일어나도록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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