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9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V (The Christian Way of Life)
김태환 목사
베드로전서 4:1-6
1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고난을 겪은 사람은 죄와 관계를 끊은 사람입니다.
2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악한 일을 하면서 보내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십시오.
3 이전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방탕하고, 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술 취하고, 흥청망청 떠들며, 우상에게 절하고 경배하였습니다.
4 믿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탕한 생활에 끼어들지 않는 여러분을 이상히 여길 것입니다. 또 경멸하고 비웃기도 할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6 그래서 지금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모든 사람과 똑같이 그들 역시 죽음의 심판을 받을 것이나, 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1 So then, since Christ suffered physical pain, you must arm yourselves with the same attitude he had, and be ready to suffer, too. For if you have suffered physically for Christ, you have finished with sin.
2 You won't spend the rest of your lives chasing your own desires, but you will be anxious to do the will of God.
3 You have had enough in the past of the evil things that godless people enjoy - their immorality and lust, their feasting and drunkenness and wild parties, and their terrible worship of idols.
4 Of course, your former friends are surprised when you no longer plunge into the flood of wild and destructive things they do. So they slander you.
5 But remember that they will have to face God, who will judge everyone,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6 That is why the Good News was preached to those who are now dead - so although they were destined to die like all people, they now live forever with God in the Spirit.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긴 합니다만,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았을 때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김형석 교수님의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안병욱 (1943-2013)) 교수님의 책과 함께 김형석 (1920-현재) 교수님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한참 인생에 대하여 생각이 많았던 때에 그들이 풀어내는 인생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안병욱 교수님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숭전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김형석 교수님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계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로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한국 나이로 99세인데, 여전히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백 년을 살아 보니’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님이 어느 회사 신입 사원 교육 시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대학 시절에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고전을 다섯 권 정도 읽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랬더니,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분 중에 인생에 도움이 될 고전을 세 권 정도 읽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회사에서 과장이 될 때까지는 열심히 앞만 보고 일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곧 이어서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되면 정신적 빈곤을 느끼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의 지도자로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고전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사람이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한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신 세계가 빈곤한 사람이 한 회사나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경우 회사의 최고 경영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뽑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크리스천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이론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이원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문제 아닙니까?
베드로전서를 쓴 베드로는, 이미 2,000년 전에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루 하루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 있든지 간에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지금 살기 힘들고 고단한데,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학생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공부하기 바쁜데, 그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졸업하고 시간이 나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볼께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핑계 대면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반대가 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대부분 내가 생각하는 일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모스는 기원전 800-75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가 살았던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제적 호황이 나라가 곧 멸망할 사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두 사람이 동행할 수 있겠느냐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다르면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는 방향이 같아야 같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과 같지 않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라고, 나를 도와 달라고, 나를 형통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의 삶을 먼저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만들었는지 이런 말씀 카드가 있습니다. 제목이 ‘You Say.......God Says........’입니다. 중요한 것만 몇 개 말씀 드린다면, “너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것은 아무 가치 없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똑똑하지 않아’ 하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지혜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난 할 수 없어’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두려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외로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겠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성공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내 생각이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과연 이런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 하고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경우에는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힘들지만, 내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둘째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때는 과감하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맞아 떨어질 때, 뭔가 가슴 떨리는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이가 들면 안경을 써도 보고 싶은 물체에 초점이 잘 맞지 않습니다. 어느 안경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안경은 특수하게 제작되어 있어서, 안경을 쓴 상태에서 눈과 렌즈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TV에서 그 안경을 광고하는데, 렌즈의 거리를 조절하니까 초점이 맞아서 희미하게 보이던 물체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창조하실 때,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갈 때,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초점이 맞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뜻과 초점이 맞는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을 때 사물이 윤곽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초점이 맞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뮐러 (George Müller, 1805-1898, 독일)는 시편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시편 68:5)’라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씀을 보는 순간, 뮐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내가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뮐러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순간이야 말로, 뮐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뮐러의 생각이 초점이 맞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뮐러가 살았던 시대는 고아들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고아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아들은 버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 우리교회가 세워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186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제가 미국교회 평신도 대표였던 워렌 밀리 (Warren Milly)라는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이 교회를 세운 목적은 하버드 스퀘어와 센트럴 스퀘어에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다른 교회와는 구조가 다릅니다. 본당에 기둥이 하나도 없고 공간이 넓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가 건축한 교회는 아니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 예배당을 사용하면 더 많은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Magazine Street는 ‘Church Street’라고 할 만큼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들이 많았던 이유는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교회마다 교인들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성인들의 회심에 관심이 있었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이 교회가 주일학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나의 삶에서 예배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한 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설교 말씀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 예배의 본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기 쉽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주님이 ‘영적인 예배 (Spiritual Worship)’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영적인 예배’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 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① / ①Or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or This is your reasonable service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로 끝나면 안 되고, 내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삶이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이 예배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나가서 우리 교회 출신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나이가 비교적 어려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저도 얼굴은 익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중에 참석자들 이름을 쓴 리스트를 보고 알았습니다. 이름이 김혜성이었습니다. 지금 아리랑 TV에서 기자 겸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전 케임브리지 교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전 거기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세상에 나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보다 더 귀하고, 이보다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