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3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X (To Believe God’s Care For His Children)
김태환 목사
베드로전서 5:7-11
7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8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9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온 세상의 모든 성도들도 여러분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힘든 고난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뒤에서 받쳐 주시고 든든하게 세워 주셔서, 결코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여러분을 친히 부르셨으니, 그 영광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11 모든 능력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7 Give all your worries and cares to God, for he cares about you.
8 Stay alert! Watch out for your great enemy, the devil. He prowls around like a roaring lion, looking for someone to devour.
9 Stand firm against him, and be strong in your faith. Remember that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① all over the world are going through the same kind of suffering you are. / ①Greek your brothers
10 In his kindness God called you to share in his eternal glory by means of Christ Jesus. So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he will restore, support, and strengthen you, and he will place you on a firm foundation.
11 All power to him forever! Amen.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로서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를 마칩니다. 저 자신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고난의 삶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모습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에게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대하고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만, 제가 기대했던 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걱정과 근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자녀들의 문제로, 어떤 사람들은 부부 간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로, 어떤 사람은 생의 의욕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서, 어떤 사람은 학업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직장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하고 있는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아서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는 걱정이고 근심인데, 성경은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마태복음 6:30) 예수님은 염려와 근심이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들에 핀 들꽃이나 들풀들,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들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눈에 하찮아 보이는 존재들이지만,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얼마나 동의하시나요?
다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웬만한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염려가 없겠습니까? 이 사람들에게 근심이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언제 붙잡혀 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6절)”라고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불안해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우리는 베드로가 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 동일한 믿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으니까 그 때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성경 속에 나오는 하나님과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똑같으십니다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가 믿었던 하나님은 삶의 매순간마다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히 방향만 알려 주는 오늘날의 내비게이션과 달랐습니다. 낮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은 광야의 뜨거운 태양빛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보호했고, 밤에 나타났던 불기둥은 자기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나요?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과 같이 너는 로마에서도 나를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23:11)”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때까지 바울을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루터가 믿었던 하나님은 루터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맡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루터는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이 자랄 때까지는 부모가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감동적인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편 33: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has chosen as His own inheritance., NKJV).” 다윗이 쓴 시편 144:15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아예 하나님을 자기의 소유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았으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없습니다.
토마스 브룩스 (Thomas Brooks, 1608-1680)라는 청교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시편 33:12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소망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참된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행복의 기증자이시고, 모든 참된 행복의 지지자이시며, 그것의 중심이 되신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소유한 사람, 그리고 그분을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말씀은 곧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으니까 문제이지, 이 믿음만 가지고 산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에 기므라 간조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웅장한 폭포를 보면서 감격하여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느 미국인이 깔보는 태도로 “당신 나라에도 이런 폭포가 있소?” 하고 으스대면서 물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그러면 당신은 이 폭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야 절반은 캐나다 것이고, 절반은 미국 것이 아니겠소?”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당신 틀렸소. 이 폭포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이 폭포 주인의 아들이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당신 크리스천이오?” 하고 묻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은 자기는 목사라고 하면서 신분을 밝혔습니다. 이 미국인은 자기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이 미국인이 숙소의 전화 번화를 가지고 갔는데, 저녁에 그 미국인이 나가는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냐?” 고 묻더니, 이번 주일에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요청하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주일날 그 교회를 찾아가는데, 길거리에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 와서 설교를 합니다!” 이런 포스터들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날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꽉 채웠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방식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고 근심할 때 똑 같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 중에도 염려와 근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으면 누가 그의 자녀들을 돌보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마태복음 6:32)”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7-9)
재미있는 것은 배고픈 마귀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마귀가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겠습니까? 마귀의 ‘스킴 (scheme)’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염려와 근심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염려와 근심으로 꽉 찬 사람들은 마귀가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관계만 분명하게 확인한다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사정을 아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라 (9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tand firm against him, and be strong in your faith (그를 대항하여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게 되십시오).” 도대체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33)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열심히 구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걱정거리가 들어옵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고난을 이해하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든 고난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10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he will restore, support, and strengthen you, and he will place you on a firm foundation.” 우리가 ‘잠깐 동안”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금방 회복시켜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굳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a little while’이란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달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고, 5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그 시간은 ‘잠깐’에 지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지만, 우리는 고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의 고난에 힘들어 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이 고난이 언제나 끝이 날까?” 하면서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들이 두루마리를 읽는 그 시간에 베드로가 쓴 위로의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들렸을 것입니다. 연약한 마음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희망을 다시 찾았을 것입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염려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심령들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