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3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 (Listening And Practicing The Word)
김태환 목사
야고보서 1:19-27
1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다른 사람의 말은 빨리 듣고, 자신의 말은 천천히 하십시오. 쉽게 화를 내지 말기 바랍니다.
20 화를 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21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악한 것과 잘못된 일은 모두 없애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르침입니다.
22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하십시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앉아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 버립니다.
25 그러나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살피는 사람은 들은 것을 잊어 버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19 Understand this,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You must all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get angry.
20 Human anger① does not produce the righteousness② God desires. / ①Greek A man's anger ②Or the justice
21 So get rid of all the filth and evil in your lives, and humbly accept the word God has planted in your hearts, for it has the power to save your souls.
22 But don't just listen to God's word. You must do what it says. Otherwise, you are only fooling yourselves.
23 For if you listen to the word and don't obey, it is like glancing at your face in a mirror.
24 You see yourself, walk away, and forget what you look like.
25 But if you look carefully into the perfect law that sets you free, and if you do what it says and don't forget what you heard, then God will bless you for doing it.
26 If you claim to be religious but don't control your tongue, you are fooling yourself, and your religion is worthless.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씀에서 많은 은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4:22에 있는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믿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2,000년 전에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했다는 말입니다. 같은 뜻으로, 고린도후서 2: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른 허다한 사람들처럼 복음을 적당히 왜곡시켜 팔고 다니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현대어성경)
요즘엔 Online로 물건을 살 때가 많습니다. 잘 알려진 Online Store에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어떤 곳에서는 물건 값을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물건 값이 싼 것처럼 보이는데, 마지막에 돈을 낼 때는 처음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이트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취소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어서 곤란을 겪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건 값이 싼 것처럼 보이지만, 잘 눈에 띄지 않는 hidden cost가 붙어서 값이 비싸 집니다. 바울은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파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처음부터 고난에 대한 말씀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가르칠 때 처음부터 ‘행함’ ‘실천’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마치 믿음생활에 ‘초급반’이 있고, ‘중급반’이 있고, ‘상급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칩니까? ‘초급반’하고, ‘중급반’에서는 말씀만 배우고, ‘상급반’에 가서 실천에 대하여 배우는 것처럼, 왜 그런 식으로 가르칩니까?
여러분, 성경 말씀을 잘 보세요.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7:21)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마태복음 7:24-26)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고 실천하는 일이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실천하는 일이 두가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잘못 읽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1:3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고 이 책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He blesses all who listen to its message and obey what it says).”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listening and obeying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일)’ 이 일이 두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시편 1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1-3절) 어느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새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부임해서 먼저 그 교회의 교인들을 심방 했습니다. 어느 집에 심방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한 장로님에게 그 집에 심방을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결국 그 장로님과 심방을 같이 갔는데, 그 장로님이 심방 내내 똑 바로 앉지 않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심방을 마치고 오는 길에 “장로님, 왜 그렇게 삐딱하게 앉아 있었습니까?” 하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장로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에 죄인의 길에 서지도 말고, 죄인의 자리에 앉지도 말하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대답이 시편 1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묵상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따르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They are thinking about ways to follow him more closely)”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곧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운 좋게 그것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 엘리엇 (Jim Elliott, 1927-1956)의 말이 생각납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어차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1949년 10월 28일, 엘리엇이 휘튼 칼리지 (Wheaton College) 4학년 때 누가복음 16:9 말씀을 묵상하고 발견한 생각을 적어 놓은 일기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한 청년이 남긴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남긴 일기책의 구절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인생의 참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은 참 행복을 얻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중에 성경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MIT 학생은 성경의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 말씀인지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되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웃음이 많고 착한 학생이었었습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집에 가 보면 성경공부 교재들이 많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 중에 참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조심해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버립니다.” (23-24절) 예전에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쳐다보더랍니다. 그래서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쳐다보면서 킥킥거리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 마자 거울을 보았더니, 얼굴에 온통 머리카락 투성이더랍니다. 이발을 하고, 머리를 감지 않았고 대충 털었는데,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쳐 보면 자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모두 보입니다. 잘못된 것이 보이면 즉시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지켜야 하지?” 마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우리는 그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야고보서 말씀에서 두 가지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umbly accept the word God has planted in your hearts, for it has the power to save your souls.”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 속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 (Elisha)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서 많은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강국이었던 시리아에 나아만 (Naaman)이라는 국방부 장관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실질적인 권력을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에게 문둥병 (leprosy)이 걸렸습니다. 그 때는, 완치가 불가능한 악성 피부병이었습니다. 이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병을 낫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왔습니다. 올 때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만큼 이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요단강을 만나면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를 만나주지도 않은 것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그 때 나아만의 종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이보다 더한 말을 했어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그 정도도 못하시겠습니까?” 이 종의 말을 들은 나아만은 크게 깨닫고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십니까? “나아만의 살결이 마치 어린아이의 살결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아만의 병이 나았습니다.” (열왕기하 5:14)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나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히브리서 4:2)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경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경건’이라는 말을 여러가지로 쓸 수 있지만 영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은 ‘godliness’라는 말입니다. 형용사는 ‘godly’입니다. ‘conforming to the laws and wishes of God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따르는)’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읽은 야고보서 말씀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십니다.” (26-27절) ‘경건’이라는 것이 단순히 악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경건’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그것이 ‘경건’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이 없으면 그 ‘경건’은 ‘죽은 경건’입니다. 2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Pure and genuine religion in the sight of God the Father means caring for orphans and widows in their distress).” 참된 ‘경건’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골방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나와서 고아와 과부를 돌봄으로써 성취됩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각기 살기에 바빠서 아무도 고아들을 돌보지 않고, 아무도 과부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조국을 떠나서 낯선 외국 땅에 피신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경건의 삶을 추구한들 그 경건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편지를 쓰는 야고보의 머리 속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이사야 58:6-7)
맞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행동이 없는 경건도 죽은 경건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일은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은 곧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