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4
크리스천의 차별의식 (Favoritism in The Community of Faith)
김태환 목사
야고보서 2:1-13
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기 바랍니다.
2 만일 한 사람은 좋은 옷에 금반지를 끼고 교회에 나왔고,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는 “이리로 와서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저기에 서 있든지 내 발 밑에 앉으시오”라고 말한다면,
4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악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백성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주셨습니다.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인데도 말입니다.
7 그들은 여러분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8 모든 법 위에 우선되는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만일 여러분이 이 율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며, 이 율법에 따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10 누구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한 가지 계명을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긴 자가 됩니다.
11 “간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해도 살인을 저질렀다면, 율법 전체를 어긴 셈입니다.
12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법에 의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늘 이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3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심판하실 때, 여러분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었던 자는 후에 아무 두려움 없이 심판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you claim to have faith in our glorious Lord Jesus Chris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2 For example, suppose someone comes into your meeting dressed in fancy clothes and expensive jewelry, and another comes in who is poor and dressed in dirty clothes.
3 If you give special attention and a good seat to the rich person, but you say to the poor one, "You can stand over there, or else sit on the floor" - well,
4 doesn't this discrimination show that your judgments are guided by evil motives?
5 Listen to me, dear brothers and sisters. Hasn't God chosen the poor in this world to be rich in faith? Aren't they the ones who will inherit the Kingdom he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6 But you dishonor the poor! Isn't it the rich who oppress you and drag you into court?
7 Aren't they the ones who slander Jesus Christ, whose noble name you bear?
8 Yes indeed, it is good when you obey the royal law as found in the Scripture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9 Bu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you are committing a sin. You are guilty of breaking the law.
10 For the person who keeps all of the laws except one is as guilty as a person who has broken all of God's laws.
11 For the same God who said, "You must not commit adultery," also said, "You must not murder." So if you murder someone but do not commit adultery, you have still broken the law.
12 So whatever you say or whatever you do, remember that you will be judged by the law that sets you free.
13 There will be no mercy for those who have not shown mercy to others. But if you have been merciful, God will be merciful when he judges you.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다.” (5절),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6절), “주인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7절), “모든 법 위에 우선 되는 법이 있습니다.” (8절), “한 가지 계명을 어기게 되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긴 것입니다.” (9절)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자비를 베푼 사람은 후에 아무 두려움 없이 심판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절) 이런 말씀들이 모두 중요한 말씀들이고,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저에게는 다른 어떤 말씀보다 1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you claim to have faith in our glorious Lord Jesus Christ if you favor some people over others?” 직역하면,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favor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뜻이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로마서 8:29에는 예수님은 ‘많은 형제 중 하나님의 맏아들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한 형제 자매를 차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좋은 옷에 값비싼 반지를 끼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때, 옷을 잘 입은 사람에게는 “이리 와서 여기에 앉으십시오”하면서 좋은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힐끗 쳐다보면서 어디 앉든지 말든지 자리에 앉혀 주지도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 옷에 대한 말씀이 나왔으니까, 옷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배 때 나오는 옷차림은 검소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소박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은 내가 입은 옷으로 나의 신분을 자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같이 무더운 여름에는 자칫하면 예배자의 복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옷을 입기 쉽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라운드 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오면 시원하고 좋기는 하겠지만, 예배자의 복장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 복장은 좀 격식이 있는 레스토랑에는 입장도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한국 갔다 오면서 양복을 한 벌 샀습니다. 그 양복을 입고 교회에 왔습니다. 입던 양복이 아니니까 말끔하고 단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몇 분들이 눈치를 채고 “목사님, 양복을 해 입으셨군요.” “목사님, 새 양복이 멋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와서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요. 그래서 “아, 예....” 하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똑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뭐라고 대답할 지 몰라서 “아, 예.....” 하고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한번 더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 양복 비싼 것 아닙니다. 요즘에 비싼 것은 천이 반짝 반짝 빛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왜 이러세요? 이 양복 비싼 것 아닌 것 알아요. 싼 데서 샀습니다” 그랬더니 훌쩍 사무실을 나가더라고요. 그 양복 볼 때마다 그 때 그분이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인간의 3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주 (衣食住)’라고 합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사는 집입니다. 옛날에는 하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입는 것과 먹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조금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주변에 헐벗은 사람들이 많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여전이 집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잘 곳이 없어서 밖에서 자야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고,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주변에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처럼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식주’가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됩니다. 옷을 입어도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밥을 먹어도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집에 살아도 어떤 집에 사느냐 하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쓰여진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느냐? 그런 사람을 보려면 왕궁에 가 보아라.” (누가복음 7:25)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그 시대의 지도자들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러분이 옷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여러분은 악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4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n't this discrimination show that your judgments are guided by evil motives (그렇다면 이 차별은 여러분의 판단이 악한 동기에 의해서 내려졌다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악한 생각’ ‘악한 동기’ ‘evil motives’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교회에는 내가 친할 사람이 없어.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나하고 수준이 맞는 것 같아! 저 사람하고 친구를 해야 하겠어!” 이런 생각은 아닐까요?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서 편을 가르는 마음이 아닐까요?
전 주에도 같은 말씀드렸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의 삶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고, 입는 것도 허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차별 받는 이유가 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6-7절)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을 나와 아무 상관없는 말씀으로 읽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편을 가르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으로 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5절)
한국에 손봉호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분 중 한 분입니다.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제가 그분의 책 중에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평신도로서 자기가 설교한 것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그 분은 신학을 공부했지만, 목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의 성경 해석은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한 데가 있습니다. 그분이 잠언 22:22-23 말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들을 법정에서 절대로 짓누르지 말아라.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찾아올 때 이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다 들어 주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신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기도하면 큰 일 납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 놀랍게도 그 사람의 외모나 그 사람이 가진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오류(誤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Abraham)의 아내 사라 (Sarah)는 대단한 미인이었었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사라의 미모(美貌)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불려갈 정도였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 (Rebekah)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내가 둘이었는데, 야곱은 두 아내 중에 미모가 뛰어난 라헬 (Rachel)을 더 사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도 아내를 선택할 때 미모를 먼저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라같은 여자는 미모는 뛰어났을 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누구도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교인들을 대하면서도 지금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People judge by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사무엘상 16: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준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 (Saul)을 버리고, 이새 (Jesse)의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사무엘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을 본 사무엘은 키 크고, 잘 생긴 엘리압 (Eliab)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같은 영적인 사람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appearance)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같은 사람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만일 사무엘이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더라면,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사무엘은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윗 (David)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 이탈리아)의 대표작 가운데 ‘다윗 (David, 1504)’이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명작입니다. 다윗이 손에 돌멩이를 들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는 순간을 포착해서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윗을 잘 생긴 미남으로, 이상적인 비율로 균형미가 넘치는 남성으로 조각했습니다. ‘다윗’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그런 사람으로 조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윗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발견하고 고쳐 나가야 합니다. 내 속에 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잣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교묘한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쉽습니다. 이 사탄의 음성을 듣게 되면,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편을 만들게 됩니다. 결국 우리 주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 (God’s family)’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기준을 추방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어렵지만,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부터 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를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