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2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trength.)
김태환 목사
시편 59:9-11, 16-17
9 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를 기다립니다. 오 하나님,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10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 가실 것이며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망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나를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11 나의 방패시여, 그들을 죽이지는 마소서. 그렇게 하시면 우리 백성이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주의 힘으로 그들을 흩어지게 하시고 넘어뜨려 주소서.
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할 것입니다. 아침에 내가 주의 사랑을 노래할 것입니다.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어려울 때에 찾아갈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17 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9 You are my strength; I wait for you to rescue me, for you, O God, are my fortress.
10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He will let me look down in triumph on all my enemies.
11 Don’t kill them, for my people soon forget such lessons; stagger them with your power, and bring them to their knees, O Lord our shield.
16 But as for me, I will sing about your power. Each morning I will sing with joy about your unfailing love. For you have been my refuge, a place of safety when I am in distress.
17 O my Strength, to you I sing praises, for you, O God, are my refuge, the God who shows me unfailing love.
오늘은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시리즈 설교 두 번째입니다. 설교 제목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오히려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오늘 설교 말씀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한 부분만 떼어서 읽어도 괜찮은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의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쓰여진 배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1948-present)라는 분이 있는데요. 현재 The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초대 기독교를 강의하시는 분입니다. 요즘에 Thomas Wright의 책들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목사들이 설교할 때 한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설교 본문으로 제시하는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을 수 있도록 충분히 길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분은 짧은 본문은 마치 유리 창으로 비치는 한 장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긴 본문은 그 장면과 함께 배경을 같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한 장면을 잘 보려면 그 장면의 배경도 같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 시편 59편은 다윗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던 시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다윗의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자기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꼭 다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절망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야고보서 5:13)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는 환경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요? 당연히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 보다는 고난의 환경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학기를 맞이하여 보스턴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성숙하게 가져 갈 수 있는 최적(最適)의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전의 어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고난을 주셨으나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을 배울 기회가 되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시편 119:71, 현대어성경) 지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성경을 펴서 읽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만일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성경을 멀리하고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잘나서 모든 것이 순탄한 줄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은 신약시대에 와서 온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항상 ‘사도(使徒)’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사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는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to send (~로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못할 고통이 있었습니다. 원인 모를 통증이 온 몸을 찌르는 것입니다. 이 통증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이 통증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고린도후서 12:9)”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나에게 통증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는 것 아닙니까? 넌 그 아픔 (통증) 때문에 겸손하여 지고, 가 아픔 때문에 나에게 기도하고 있으니, 그 아픔을 통해서 나의 은혜가 너에게 차고 넘치고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항상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성경의 관점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라는 사람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이 위험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은 결코 평범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또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군인들을 시켜 포위하고 있는 사울은 누구입니까? 사울은 왕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첫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은 주변 국가들과 전쟁하면서 연전연승(連戰連勝)했습니다. 그것이 사울을 교만하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사울은 승전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상 15:12).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시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왕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아직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이려고 군인들을 시켜 다윗을 감시하고, 다윗의 집을 에워싼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머지않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위기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혹시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믿음을 키우셔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나의 힘 (9, 17절)’ ‘나의 성벽 (9, 16, 17절)’ ‘나의 사랑 (10, 17절)’ ‘나의 인도자 (10절)’ ‘나의 방패 (11절)’ ‘나의 피난처 (16절)’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사용했던 말들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힘이시라 (You are my strength)”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으시고 피곤해 하지도 않으신다.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약한 사람에게 능력을 넘치도록 주신다. 아이라도 지치고 피곤해 하며, 젊은이라도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0:28-31)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New Living Translation)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에 작은 글씨로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돈을 의지하고,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구가 쓰여진 돈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돈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만, 그 돈에 쓰여진 하나님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신입생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교제 (fellowship)’가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한 팀에 속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찬양하고,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를 하고,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교제 (Christian fellowship)’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the fellowship with God)’도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생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입니다. 영어로, ‘assets’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 (new strength)’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그들은 독수리처럼 높이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새 힘’을 얻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그냥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11절)”이라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은 늘 내 옆에 계십니다” 이런 뜻이지요? 또 17절에는 “for you, the God who shows me unfailing love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변함없는 사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unfailing love)’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failing love’입니다. 꾸준하지 못합니다. 늘 부족한 사랑입니다. 충분하지 못한 사랑입니다. 결핍이 많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입니다. 모자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늘 차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중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좋지 않습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힘이 나지 않습니까?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하나님은 그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내 옆에 계실 것입니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는 승승장구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때였습니다. 언제 집 밖에 있던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신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타주에서 보스턴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 한국에서 보스턴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왜 집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서 이 낯선 도시에 와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이곳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맞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여기 좋은 학교에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뿐이겠습니까? 좀 더 넓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왜 내가 이곳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든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시려고 하는 계획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외로운 도시에 내가 이렇게 와 있는 이유는, 이제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내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 틈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환경 속으로 인도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외롭고 절망적인 환경 속으로 나를 몰아넣으신 것이 아닐까요?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시고, 마침내는 나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 아닐까요?
32년 전에 저를 이곳 보스턴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난 32년 동안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세월 속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도 있었고, 좌절의 시간도 있었고, 외로운 시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어려운 시간들을 이기게 하시고, 지금 이 자리까지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클레아몬트를 떠나 보스턴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저의 꿈과 희망을 내려 놓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꿈을 붙잡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동일하신 하나님과 함께 보스턴의 생활을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