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2018 | 사순절 13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김태환 목사
고린도후서 7:8-12
8 지난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9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 아파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아파함으로써 회개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슬퍼하였으므로 우리 때문에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10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11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이 여러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더 진지해졌고, 자신의 무죄를 더 증명하게 되었고, 어떤 것에 대해 더욱 분노를 느끼게 되었으며, 경각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간절히 바라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점에 있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죄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전에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는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함을 당한 사람들을 겨냥하여 쓴 것이 아닙니다. 그 편지는 우리를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분명히 알려 주기 위해 쓴 것이었습니다.
8 I am not sorry that I sent that severe letter to you, though I was sorry at first, for I know it was painful to you for a little while.
9 Now I am glad I sent it, not because it hurt you, but because the pain caused you to repent and change your ways. It was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his people to have, so you were not harmed by us in any way.
10 For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to experience leads us away from sin and results in salvation. There’s no regret for that kind of sorrow.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11 Just see what this godly sorrow produced in you! Such earnestness, such concern to clear yourselves, such indignation, such alarm, such longing to see me, such zeal, and such a readiness to punish wrong. You showed that you have done everything necessary to make things right.
12 My purpose, then, was not to write about who did the wrong or who was wronged. I wrote to you so that in the sight of God you could see for yourselves how loyal you are to us.
오늘 요절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godly sorrow)’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 (worldly sorrow)’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슬픔은 ‘세상의 슬픔’인데요. 무슨 슬픔일까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슬픔, 억울한 일을 당한 슬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슬픔, 이런 슬픔들이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을 가져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읽은 한 토막만 떼서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오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교회들은 거의 모두 바울이 세운 교회들입니다. 교회들마다 그 교들의 독특한 역사가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선교 전략지역으로 여기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무 예외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본 이유는 환상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will attack and harm you, for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사도행전 18:10)”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선교 방식에 있어서도 고린도 선교는 특별했습니다. 바울은 ‘tent-making mission (천막제조 선교)’이라는 독특한 선교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바울의 선교방식을 따르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즉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기서 평생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그들 부부는 나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을 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들 부부에게 감사합니다).” (로마서 16:3)
이상이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대충 요약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용 면에 있어서 고린도 선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8-9 상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라니요? 그것이 무슨 편지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고린도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보낸 또 하나의 편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A. D. 56년 경에 디도를 통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한 실랄한 책망과 충고,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그 편지를 보내 놓고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강하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혹시라도 이 편지가 문제가 되어서 오히려 교회 문제가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내 편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을 돌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졌던 슬픔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
오늘 우리에게는 잘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냥 덮어 주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용서가 어떤 용서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 눈 감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덮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셨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 죄를 자기의 아들에게 전가 (imputation) 시켰겠습니까?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 공동체 속한 모두에게 큰 아픔을 줍니다.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꺼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초기 단계에서 빨리 수술을 했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을,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려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힘든 치료 과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술을 해야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7:10에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to experience leads us away from sin and results in salvation. There’s no regret for that kind of sorrow.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우리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국 뉴스를 봤더니 또 한 사람이 자신이 연극인이라고 하면서 실명으로 TV 인터뷰에 나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실명으로 나를 밝히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여자인 제가 실명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문제를 자꾸 말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드러내서 회개해야 할 문제인데, 그냥 덮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선자 (hypo¬crites)’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덮지 말고 입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그런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자신에 대하여 진진한 반성이 없었지 않습니까? 한번도 입을 열어 진지하게 회개의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1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진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의를 갖게 되었으며, 내가 지적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도움을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서 죄지은 사람을 처벌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현대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