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2018 | 성탄절 메시지 1
인카네이션 (Incarnation)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1:9-14
9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10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11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3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계획이나 바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9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10 He came into the very world he created, but the world didn't recognize him.
11 He came to his own people, and even they rejected him.
12 But to all who believed him and accepted hi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3 They are reborn?not with a physical birth resulting from human passion or plan, but a birth that comes from God.
14 So the Word became human① and made his home among us.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②. An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Father's one and only Son. / ①Greek became flesh ②Or grace and truth; also in 1.17
설교 시작 전에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일까요?” 보기를 드립니다. (1) 요한복음 (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4)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한번 정답을 맞춰 보십시오.
성서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후에 기록될수록 문장도 세련되고, 등장하는 용어들도 다양합니다. 그 때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가 사용했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기를 원했던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도 이미 기원전 300년경에 그리스어로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역 (Septuagint)’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벌써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의 2세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00년에 걸쳐 번역 작업을 완성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2명의 권위있는 유대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대표 학자들을 파견했기 때문에 모두 72명의 학자들이 번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과감하게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빼고, 이렇게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4)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로고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로고스’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로고스’ 사상을 잠시 빌려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지만, 정작 요한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14절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Word became human① and made his home among us.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②. An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Father's one and only Son. / ①Greek became flesh ②Or grace and truth 직역하면,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로스’ 사상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번역합니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거 재미있는데?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들은 생소하게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이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카네이션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carn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in’은 ‘into’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caro’는 ‘육체 (flesh)’를 가리킵니다. ‘육체로 태어나셨다 (to make flesh)’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집을 지으신 (made his home among us)’ 것입니다. 이 말씀이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with us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재미있는 번역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그가 번역한 The Message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말씀이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개의 사인 (sings)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가나 (Cana)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1) 이 말씀에 나오는 ‘그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영광을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 (sign)’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인을 보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셨다 (And Christ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on earth among us, Living Bible)”는 ‘인카네이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이 주는 교훈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겸손 (humility)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대우, 더 좋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전 아닙니다. 전 성공적인 삶을 원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에서도 어떻게 하면 정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성경적인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아, 예,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굽실거리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South Africa)가 말한 것처럼 바닥에 쏟아진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제일 낮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고이는 것처럼, 겸손이란 제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내 속에 영광을 채우고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공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람인데요.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 1932-1996, Netherlands)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 신학대학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정말 잘 나가는 교수였습니다. 아무 일 없이 보장된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 질문은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살아야 하는 최선의 삶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L’Arche Daybreak)’라는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는 하바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바드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던 것들을 장애인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죽은 후에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기서 경험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By giving words to these intimate experiences I can make my life available to others.” ‘Nouwen Society’에 속한 사람들은 나우엔이 보여준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downward mobility (하향 이동성)’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성)’의 삶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사회적인 지위나 조건을 더 높은 레벨로 끌어 올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downward mobility’의 삶은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사회적인 레벨을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갈까 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 놓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그랬습니다. ‘upward mobility’의 삶을 내려 놓고,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선택했더니, 그가 죽고 나서 ‘Henri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의 삶을 흠모하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우엔이 ‘L’Arche Daybreak’에서 경험했고 발견했던 것들을 책으로 펴 냈는데, 그가 쓴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모두 39권의 책을 썼는데요. 모두 800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책이 28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인카네이션’의 삶은 겸손과 내려 놓음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공을 지향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어느 삶이 더 가치 있는지, 어느 삶을 내가 선택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후회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1-12절) 이 말씀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qualification)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o believe and to accept Him (그를 믿고 받아들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해 보고 싶은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무심코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의 의미를 밝혀서 책으로 내는 일입니다. 이 일은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생활이 되고, 믿음생활에 변화가 없고, 믿음생활에 능력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全人的)인 결단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감정적인, 의지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holistic commitment’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전인적인 commitment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을 선포했고, 또 그런 설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질 것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출현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holistic commitment’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 곧 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같은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카네이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식)’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downward mobility (하향이동식)’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