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2018 | 송년예배 메시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13:1-9
1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가 저희의 드릴 희생 제물과 뒤범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5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자신의 포도밭에 심었다. 그는 이 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왔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7 그 사람이 포도원을 돌보는 종에게 말했다. ‘내가 삼 년 동안,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나무를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차지하게 하느냐?’
8 종이 주인에게 대답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놔 두십시오. 제가 나무 주위에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만일 내년에 열매를 맺으면 놔 두시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 버리십시오.’”
1 About this time Jesus was informed that Pilate had murdered some people from Galilee as they were offering sacrifices at the Temple.
2 "Do you think those Galileans were worse sinners than all the other people from Galilee?" Jesus asked. "Is that why they suffered?
3 Not at all! And you will perish, too, unless you repent of your sins and turn to God.
4 And what about the eighteen people who died when the tower in Siloam fell on them? Were they the worst sinners in Jerusalem?
5 No, and I tell you again that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too."
6 Then Jesus told this story: "A man planted a fig tree in his garden and came again and again to see if there was any fruit on it, but he was always disappointed.
7 Finally, he said to his gardener, `I've waited three years, and there hasn't been a single fig! Cut it down. It's just taking up space in the garden.'
8 "The gardener answered, `Sir, give it one more chance. Leave it another year, and I'll give it special attention and plenty of fertilizer.
9 If we get figs next year, fine. If not, then you can cut it down.'"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본문 말씀을 문맥(文脈)의 상황(context)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세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는 섬찟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실로암 타워가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포도원에 옮겨 심었는데, 삼 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않아 주인이 실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가 각각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3, 5절)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선동적 (煽動的)인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릴리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본보기로 갈릴리 사람 몇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때 희생된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실로암의 타워가 갑자기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도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tsunami)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 엄청난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재난이 2004년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어났습니다. 수마트라 앞 바다에서 쓰나미 (tsunami)가 일어나 인도양 연안의 여러 나라에 밀어닥쳐서 무려 십 육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 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크리스마스를 경건하게 지내지 않고, 휴양지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쾌락을 좇던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렇게 이런 말을 했다가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다!” (2, 4절) “No, and I tell you again that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too (그렇지 않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엄청난 재난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과연 지금 식으로 이렇게 살아가면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반면교사 (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compassion을 가짐과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Then Jesus told this story.” (5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이야기 역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이 사람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을까요? 몇 년 전에 유행하던 “당연하지!” 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은 “당연하지!”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를 심어야지.” “당연하지!” “그러면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당연하지!” “이 사람은 무화과 열매를 기대했을 텐데?” “당연하지!”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삼 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그 사람이 화가 났겠네?” “당연하지!” “이 이야기가 한 해를 보내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지 않을까?” “당연하지!”
무화과나무는 보통은 그냥 길 가에 심겨 있는 나무입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에 된 것은 그 포도원 농장 주인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같은 목사님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라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한 때는 노예선의 선원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존 뉴톤 목사님이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 목사님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존 뉴톤 목사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영국의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국 국회에서 노예제도법을 철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윌버포스가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사람이 바로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존 뉴톤 목사님은 이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데 공헌했습니다.
그냥 길거리 아무 데서나 자라야 할 그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으로 옮겨 심긴 것처럼, 오늘 우리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5:2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주인은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A man planted a fig tree in his garden and came again and again to see if there was any fruit on it, but he was always disappointed (자기 정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은 이 사람은 열매가 열렸는지 보려고 여러 번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실망했습니다).” (6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0-21)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열매를 맺고 안 맺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 책임(責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맡겨진 임무나 의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sponsibility’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응답할 수 있는 (respond) 능력 (ability)’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응답하는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16편에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찬송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How can I repay the LORD for all his goodness to me)?” (12절) 하나님의 은혜를 이만큼 받았으면 그 은혜에 respond (응답)하고, 그 은혜에 repay (보답)하는 사람, 이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respond하지 못하고, 올바로 repay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5:5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다 (Master, we'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n't caught anything.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시몬 (베드로)이라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응답했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오랜 그의 경험에서 나온 어부의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날 아침에 자기의 경험을 송두리 채 뒤엎어 버렸습니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말씀하시는 그 분 앞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경험과 지식을 송두리 채 부정(否定)해 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발명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착상에서 나오는데, 이런 아이디어는 기존의 발상을 깨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상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창의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해왔던 대로, 늘 자기가 믿음생활 해 왔던 방식대로, 그렇게 믿음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만일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상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but (그러나, 하지만)’ 이 한마디로 자기를 부정했을 때, 베드로는 자기 앞에 서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기 방식을 내려 놓지 않는 사람은 결코 창의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믿어왔던 방식대로 믿음생활 고집한다면, 또 다시 우리는 열매 없는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창의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실망한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베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7절) 우리 말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단순히 무용지물이 아닙니다. 그냥 쓸모가 없는 나무가 아니라 자리만 차지하고, 땅만 버리는 해를 끼치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나무입니다. 한번은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The most searching question we can be asked is, ‘Of what use were you in this world?')." ‘searching question’이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묻는 중요한 질문을 말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나는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두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하나는 사해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습니다. 그 바다에 많은 고기가 삽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두 바다의 차이점은 한가지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끊임없이 물을 받아 아래로 흘려 보냅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지형상 물이 흘러 나갈 수 없는 바다입니다. 그 결과 하나는 생명의 바다가 되고, 하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책임 있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열매가 맺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놔 두십시오. 제가 나무 주위에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만일 내년에 열매를 맺으면 놔 두시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 버리십시오.” (8-9절) 이 과원지기 덕분에 이 무화과 나무는 다시 일년 동안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중보 하시는 (intercede) 분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울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Re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의 시 ‘엄숙한 시간 (Ernste Stunde)’이 바로 그런 시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한 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시간,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한 해 동안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기도 덕분에 또 한 해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식으로 계속 살지 않겠다는,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