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자 (Kowing God's Point Of View)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8:31-33
31 예수님께서, 인자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고, 삼 일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32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33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나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치 않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31 Then Jesus began to tell them that the Son of Man① must suffer many terrible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the leading priests, and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He would be killed, but three days later he would rise from the dead. / ①"Son of Man" is a title Jesus used for himself
32 As he talked about this openly with his disciple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primand him for saying such things①. / ①Or began to correct him
33 Jesus turned around and looked at his disciples, then reprimanded Peter. "Get away from me, Satan!" he said.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오늘 말씀의 요절(要節)은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는구나).”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이란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했더라면 그 같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갖게 되는 관점으로, '성경의 관점 (a point of the Bible)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도 제자들은 딴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보다 앞서서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9:51)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뒤따라 가던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울 정도였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0:32).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he talked about this openly with his disciple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primand him for saying such things①.” / ①Or began to correct him ‘reprimand’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견책하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사전에는 이 말에 ‘to reprove or rebuke severely, especially in a formal way (공식적으로 심하게 꾸짖다)’라는 뜻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압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제자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야, 베드로, 역시 너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고맙다,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그렇지? 꼭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제자의 만류를 사탄의 유혹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 (바울)의 행동에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그럴듯한 스펙 (specification)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또 그 집안 (부모)은 어떤 집안입니까? 그가 남긴 업적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책 한 권도 제대로 쓰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지 30-40년이 흐른 후에 그의 제자들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변두리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갈릴리 부랑배들을 끌고 다니면서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닙니다. 사울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총대를 메기를 자청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도행전 8:3)
이런 사람이, 관점이 바뀌니까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4-8)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관점이 바뀌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박해자 (persecutor)였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사람 (apologist)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사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서 핍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대에 사울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쓸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드라마틱하게도 사울 같은 사람을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 (instrument)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15). 여러분이 좋아하는 시편 중에 42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절) 시편은 시(時)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라의 자손들 (the descendants of Korah)입니다. 고라는 광야생활 중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땅이 갈라져 빠져 죽은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민수기 26:11). 드라마틱하게도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Brooks Atkinson 이란 사람이 관점이 바뀌는 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ost fatal illusion is the settled point of view. Since life is growth and motion, a fixed point of view kills anybody who has one (가장 치명적인 환상은 고정된 관점이다. 우리의 삶은 유동적이며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은 누구든 그것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또, Toba Beta라는 사람은 “We begin to learn wisely when we're willing to see world from other people's perspective (우리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세상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지혜롭게 배울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Understanding is not absolutely final. What's now right could be wrong later (이해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옳은 것이라도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더니 전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은 노력을 통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는 일을 성경에서는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conversion’입니다. 사전에는 ‘conversion’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무관심, 불신, 반대로부터 수용, 믿음, 열성적인 후원으로 태도, 감정, 혹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사울이 회심해서 관점이 바뀌는 말씀이 사도행전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관점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심으로 일어났습니다. 2018년 1월 4일 밤에 눈보라가 치고 강풍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뾰족탑 (steeple, 종탑)이 강풍에 흔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안전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이 뾰족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Local TV에서는 이 뉴스를 ‘Divine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상황을 아시고 미리 큰 사고를 막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Divine Intervention’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게 해 주신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Divine Intervention’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만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관점’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빌립,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그 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데나리온은 약 20,000불 정도 되는 큰 돈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빌립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의견을 따랐다면 5,000명을 먹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19년 한 해를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읽어가면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빌립을 떠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6)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은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인간적인 관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는 (overcome)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믿는 사람들은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마태복음 19:26)”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케임브리지에 있는 Museum of Science의 마케팅 슬로건 “Museum of Science, where your horizons broaden (뮤지엄 오브 사이언스, 당신의 시야(視野)가 넓어집니다)”였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선물이요,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