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4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2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김태환 목사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비로써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 I plead with you to give your bodies to God because of all he has done for you. Let them be a living and holy sacrifice - the kind he will find acceptable. This is truly the way to worship him.① / ①Or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or This is your reasonable service
2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하나님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예배자, ‘the true worshiper’에게 호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고 하는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the true wor-shiper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 (the true worship)’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에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나오는 이 말은 바울이 독창적으로 만든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입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4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4: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time is coming - indeed it's here now -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참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게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과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과연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를 ‘the true worship (참된 예배)’라고도 할 수 있고, ‘a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요? 저는 ‘영적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4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영적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 말씀이 ‘영적예배’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놓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인 당신네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나, 우리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예배합니다. 그것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22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버지 (the Father)’께 예배드릴 때가 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the Father)’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Abba, Father, 마가복음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바 (Abba)’는 아람어로 ‘아빠 (dad)’라는 뜻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때 가지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의 감정, 그리고 의존(依存)의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예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예배를 잘 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요한복음 10:15)”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True Christian worship addresses God, not merely as Creator and Preserver, or as the great Lord of the Universe, but as one who is very near of kin to us, our Father, beloved of our souls (참된 크리스천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단순히 창조주, 보호자 혹은 우주의 주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매우 가까운 분, 우리의 영혼의 사랑을 받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사용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예배’는 예배 드리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곧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은 ‘영 (Spirit)’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엄청난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in spirit and in truth’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을 모아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금 송아지를 경배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모세는 들고 있던 십계명 돌 판을 던져서 금송아지를 깨뜨려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3,000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송아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35)”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죽은 것도 큰 일이지만, 이보다 더 큰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 이상 동행(同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을 테니, 너희끼리 가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잘못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영과 진리 (in spirit and in truth)’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쉬운 말로 ‘진정으로’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진정으로’ 혹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Charles Spurgeon은 ‘영으로’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To worship God spiritually, a man must give up his sins, must overcome his pride and lust, and his evil concupiscence must be cast out of him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포기해야 하고 교만과 욕망을 이겨야만 하고, 성에 대한 욕망을 내쫓아야만 합니다).” “True worship lies in your heart paying reverence to him, your soul obeying him, and your inner nature coming into conformity to his own nature, by the work of his Spirit in your soul (참된 예배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존경을 드리고,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당신의 내면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진실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3-24)”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서 ‘몸’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Expanded Bible에서는 이 말씀을 “I beg you to offer your lives as a living sacrifice to him (내가 권합니다. 당신의 삶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 방식은 짐승을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대속물(代贖物, ransom)’로 드리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짐승의 목숨이 어떻게 나의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배가 형식적으로 되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 마리 양을 기뻐하실까? 강줄기 만 개를 채울 만한 기름을 기뻐하실까?” (미가 6:7) “이 사람아,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미가 6:8)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이제는 짐승이 아니라 예배자 자신이 제물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의지, 나의 생각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리라는 (굴복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living sacrifice (산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Let all that I am praise the Lord; with my whole heart, I will praise his holy name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1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O my soul; all my inmost being, praise his holy name (오, 나의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의 모든 속에 있는 것들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읽을 때 “네 모든 마음과 (with all your heart)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마태복음 22:37)”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예배’는 예배와 삶이 일치(一致)되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2) 저는 이 말씀을 예배자의 삶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자의 삶입니다.
끝으로,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9-407)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크리소스톰이 자기 교구 내에 있는 동 떨어진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예배를 인도할 사제가 없어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농부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킨 다음 사제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잘못 사제의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이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짧은 설교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열광적으로 빛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 크리소스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말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 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무식한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