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8:5-16

5 "내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여호와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대답하시고 나를 풀어 주셨습니다.
6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7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 나는 승리 가운데서 나의 적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8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9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10 모든 나라들이 나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11 그들이 사방에서 나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12 그들은 벌 떼처럼 내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불타는 가시덤불처럼 빠르게 죽어갔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13 나는 뒤로 밀려나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습니다.
14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15 기쁨과 승리의 외침들이 의로운 자들의 동네에 울려 퍼집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16 여호와께서 오른손을 높이 드셨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5 In my distress I prayed to the Lord, and the Lord answered me and set me free.
6 The Lord is for me, so I will have no fear. What can mere people do to me?
7 Yes, the Lord is for me; he will help me. I will look in triumph at those who hate me.
8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9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10 Though hostile nations surrounded me, I destroyed them all with the authority of the Lord.
11 Yes, they surrounded and attacked me, but I destroyed them all with the authority of the Lord.
12 They swarmed around me like bees; they blazed against me like a crackling fire. But I destroyed them all with the authority of the Lord.
13 My enemies did their best to kill me, but the Lord rescued me.
14 The Lord is my strength and my song; he has given me victory.
15 Songs of joy and victory are sung in the camp of the godly. The strong right arm of the Lord has done glorious things!
16 The strong right arm of the Lord is raised in triumph. The strong right arm of the Lord has done glorious things!

오늘은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시리즈 설교 일곱 번째로,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잠언 3장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할 것입니다. 잠언 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슬기를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마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Don’t be impressed with your own wisdom. Instead, fear the Lord and turn away from evil).” (5-7절)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 말씀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 것 같은데, 이게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신뢰하기는 쉬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국에서 사용하는 동전이나 지폐 뒷면에 작은 글씨로 “In God, we trust”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돈에 그런 글이 쓰여 있다는 것이 참 아이로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입니다. 돈의 가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의 김영철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미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북한도 핵무기를 폐기하면 이렇게 미국처럼 잘 살 수 있다고 회유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북한은 밤에 전력 사정이 나빠 불을 켤 수조차 없는데, 한 밤 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 숲 (skyscraper)을 보면서 북한의 실력자 김영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미국의 자본주의의 힘을 목격하면서 자기 조국은 언제 이렇게 살게 되나 싶어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요? 이런 미국에서 사용하는 돈에 “우리는 돈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글이 쓰여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위에 나라를 건설했던 미국의 건국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돈의 힘을 믿고, 지식의 힘을 믿고, 권력의 힘을 믿는 것은 쉽습니다. 이런 시대의 조류 속에서 이런 것들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이제 이런 주장은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을 법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나를 신뢰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냐?” 저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신뢰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과 지식과 명예와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trust in’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acknowledge’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acknowledge’라는 말은 앞의 ‘ac’이란 말과 뒤에 ‘knowledge’라는 말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knowledge’라는 말은 ‘know (알다)’라는 동사에서 ‘knowledge (지식)’이라는 명사가 파생되었습니다. 앞에 나오는 ‘ac’이라는 말은 ‘accord’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accord’라는 말은 ‘조화를 이루다’ ‘합의하다’ ‘동의하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상상력을 동원해서 설명한다면, ‘acknowledge’라는 말은 내가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어 사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동의(同意)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계시(啓示, revelation)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오류(誤謬, error)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그들의 예배는 희극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만든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7: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29:13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는 약 700년이 시간적인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신 것을 보면 700년 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700년이면 세상이 변해도 몇 번이 변했을 기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700년 동안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런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아 측은하게 여기셨다 (마태복음 9:36, 마가복음 6:34)”는 말씀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잘못하면 ‘farce (코미디, 희극)’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는 모든 행위가 진실되지 못한 종교적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웃기는 일’이 되고, ‘코미디’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사님들이 아무리 강단에서 사람을 (나를)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설교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으레 목사들이 그런 설교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 아무 effect가 없습니다.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나오면서도,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차피 하나님이 누군지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나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들의 믿음생활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118편 말씀을 볼까요? 이 시편은 누가 쓴 것인지 저자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저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이 시편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나를 풀어주셨습니다.” (5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6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 나는 승리 가운데서 나의 적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7절) 재미 있는 것은, 사도 바울도 어렵고 힘든 읽을 겪을 때 이 시편을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세요. 그가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선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로마서 8:31)
 
여러분, 시편 118편이나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되는 지식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하나님께서 대한 심오한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이 실제적인 지식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고, 시편 118편의 자자도 그렇고, 그들은 하나님을 책에서 읽고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그들은 즉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In my distress I prayed to the Lord, and the Lord answered me and set me free. The Lord is for me, so I will have no fear. What can mere people do to me?” (5-6절,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신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10년 후에, 아니 20년 후에,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여러분의 예배와 기도가 ‘farce (코미디, 희극)’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Religion doesn’t save you, change you, heal you, or set you free. Jesus does (종교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고, 치유하지 못하고, 당신을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 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 (the way)”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J. I. Packer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청년들을 보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또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기도하는 청년들을 보는 것입니다. 몇 년 전까지 J. I. Packer의 책이 많이 유행했었는데, 이제는 이 책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 말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잘 번역되어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시편 118:8-9)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왕자들을 찾아갑니다. 개역성경에는 ‘왕자들’이라는 말을 ‘고관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을 ‘고관들’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을 쓴 저자는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을 더 신뢰하고 고관들을 더 신뢰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더 신뢰합니다. 시편 118편의 저자와 우리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이론적인,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적인 지식이었습니다. 머리 속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에 적용되는 지식이었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Dave Willis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Faith isn’t a feeling. It’s a choice to trust God even when the road ahead seems uncertain (믿음이란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앞에 놓여 있는 길이 불확실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선택입니다).” ‘모든 일에 (in everything you do)’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길에 ‘certainty (확실성)’가 보일 때도, ‘uncertainty (불확실성)’가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의 저자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