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2019 |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제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I Have Seen The Lord)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20:11-18
11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12 마리아는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두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천사는 머리 쪽에, 다른 천사는 발 쪽에 있었습니다.
13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소?”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어디론가 가져갔는데,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14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 관리인인 줄로 생각하고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라고 말했습니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몸을 돌려 아람어로 “랍오니”라고 외쳤습니다(이 말은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너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님을 보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1 Mary was standing outside the tomb crying, and as she wept, she stooped and looked in.
12 She saw two white-robed angels, one sitting at the head and the other at the foot of the place where the body of Jesus had been lying.
13 "Dear woman, why are you crying?" the angels asked her. "Because they have taken away my Lord," she replied, "and I don't know where they have put him."
14 She turned to leave and saw someone standing there. It was Jesus, but she didn't recognize him.
15 "Dear woman, why are you crying?" Jesus asked her. "Who are you looking for?" She thought he was the gardener. "Sir," she said, "if you have taken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put him, and I will go and get him."
16 "Mary!" Jesus said. She turned to him and cried out, "Rabboni!" (which is Hebrew for "Teacher").
17 "Don't cling to me," Jesus said, "for I haven't yet ascended to the Father. But go find my brothers and tell them, `I am ascending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to my God and your God.'"
18 Mary Magdalene found the disciples and told them, "I have seen the Lord!" Then she gave them his message.
제가 대학교 시절에 윌리엄 버클리 (William Barclay, 1907-1978)라는 영국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 분은 목사이면서 학자이고,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방송에 나가서 신약성경 이야기를 오랫동안 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하도 인기가 좋아서 그 때 강연했던 것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 유명한 ‘버클리 주석 (William Barcaly’s Daily Study Bible)’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은 책입니다. 이 분은 그 외에도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기억에 남는 책은 ‘The Mind of Jesus (예수님의 생각)’과 ‘The Mind of St. Paul (사도 바울의 생각)’이라는 책입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아주 잘 쓴 책입니다. 이분은 청각이 좋지 않아 나이가 들어서는 거의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집 앞을 지나다니는 마을 사람들은 매일 저녁 늦게까지 그의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치는 타이프 소리를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버클리 목사님이 ‘The Mind of Jesu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경우를 대체로 7개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이고, 둘째로, 슬퍼하며 회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경우, 셋째로, 예수님이 죽은 후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경우, 넷째로, 절망과 공포에 싸인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경우, 다섯째로,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경우, 여섯째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경우, 마지막으로,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이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버클리 목사님이 분류한 첫 번째 카테고리에 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은 ‘막달라에 살고 있는 마리아 (Mary Magdalene)’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마리아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도 마리아인데. 다른 마리아와 구별하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동정녀라는 말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결혼은 했지만 서로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은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 (virgin Mary)’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에는 그녀의 과거의 삶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후에 예수님께서 여러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악한 영과 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신하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8:1-3)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후원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esus took his twelve disciples with him, along with some women who had been cured of evil spirits and diseases. Among them were Mary Magdalene, from whom he had cast out seven demons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악한 영과 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 명의 여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인데, 예수님께서 쫓아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런 말씀이 마가복음 16:9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일 주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신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그냥 읽고 지나갈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제자들이 아니고, 베드로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마가가 기록한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우리 눈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보셨습니까? 작년에 나온 영화인데요. 제가 보기엔 괜찮게 만든 영화인데,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남자들 밖에 없는 제자 그룹에 합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넌 나의 증인이야 (Mary, you are my witness)!”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결국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 못박혀 죽습니다. 충격과 절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한 곳에 숨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영화 장면은 성경 말씀하고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찾아 와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왜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느냐?” 하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 관리인일 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무덤 앞에서 슬픔에 지쳐 잠이 들었던 마리아가 동이 터오는 새벽에 일어나 무덤 앞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다가 간 것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무슨 말씀을 주고 받았는지 영화에는 그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지금까지 무덤을 지켰느냐고 마리아를 맞아 줍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마지막까지요. 그런데 해가 뜰 무렵에 그분을 봤습니다. 그분이 거기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건 네가 꿈을 꾼 거야!” 하면서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꿈이 아니라 그분은 거기 게셨어요!” 하면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틀림 없다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기분이 상했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 대로 그분이 부활했는지 몰라.) 하지만 그분이 우리보다 널 먼저 선택했다고 우리에게 말하려고 온 것은.....그분이 너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마리아, 넌 우리를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어.” 마리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이 내 말을 듣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어! 너희가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기를 기도할 뿐이야! 난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제자들과 헤어집니다. 이것이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윌리엄 버클리 목사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마리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 감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이번 사순절 마가복음 강해설교 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Once you have seen what God can do for you, it’s time to see what He can do through you (한번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바디매오에게서 이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삶에서도 이것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사랑을 오해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에게 새 삶을 주신 예수님을 떠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에게 이 사랑이 있었기에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을 때도 끝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마가복음 16:10에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 소식을 가지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울음은 어쩌면 마리아의 울음과 의미가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울음은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진 데서 온 슬픔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삼 년이나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울음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예수님과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고 헤어져야 한다는 데서 오는 울음이 아니었을까요? 버클리는 사람이 너무 슬퍼하다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볼 것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리아의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울고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다시 이번에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그 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 그 목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Heinrich Hofmann (1824-1911)이 그린 ‘The Rich Young Ruler’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눈빛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이 압권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던 그 음성은 세상의 그 음성보다 다 따뜻한 음성이 아니었을까요? 동시에 그 음성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렀던 목소리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금방 몸을 돌려 ‘랍오니 (Rabboni)’ 하고 예수님을 알아 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마리아를 만나 주신 것은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I will not stay and be silent)!”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내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우리가 뭐가 되냐?” “마리아, 넌 우리 남자들을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어!” 이런 비난이 있더라도 나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젠 우리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는 처음부터 이기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복음은 선포하는 것이었고, 복음은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시대에 와서 복음은 이기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이기적인 성향이 개인주의를 만나면서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믿는 것이 음악회에 원하면 가고 원하지 않으면 안 가는 것과 같습니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이런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안 믿는 것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해야 합니다. “난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I will not stay and be sil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