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2019 | 부활절 넷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The Two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김태환 목사
누가복음 24:13-27
13 그런데 그 날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14 이들은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15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습니다.
18 그 가운데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다녀오면서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단 말이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게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1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22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으로 갔지만
23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24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5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구나.
26 그리스도가 이 모든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27 예수님께서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를 들어 예수님에 관한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13 That same day two of Jesus' followers were walking to the village of Emmaus, seven miles① from Jerusalem. / ①Greek 60 stadia [11.1 kilometers]
14 As they walked along they were talking about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15 As they talked and discussed these things, Jesus himself suddenly came and began walking with them.
16 But God kept them from recognizing him.
17 He asked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so intently as you walk along?" They stopped short, sadness written across their faces.
18 Then one of them, Cleopas, replied, "You must be the only person in Jerusalem who hasn't heard about all the things that have happened there the last few days."
19 "What things?" Jesus asked. "The things that happened to Jesus, the man from Nazareth," they said. "He was a prophet who did powerful miracles, and he was a mighty teacher in the eyes of God and all the people.
20 But our leading priests and other religious leaders handed him over to be condemned to death, and they crucified him.
21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rescue Israel. This all happened three days ago.
22 "Then some women from our group of his followers were at his tomb early this morning, and they came back with an amazing report.
23 They said his body was missing, and they had seen angels who told them Jesus is alive!
24 Some of our men ran out to see, and sure enough, his body was gone, just as the women had said."
25 Then Jesus said to them, "You foolish people! You find it so hard to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wrote in the Scriptures.
26 Wasn't it clearly predicted that the Messiah would have to suffer all these things before entering his glory?"
27 Then Jesus took them through the writings of Moses and all the prophets, explaining from all the Scriptures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영어로 하면,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부활절은 이미 끝난 행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날 (that same day)’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그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은 매우 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엠마오’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13절).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명(地名)과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이 이야기의 사실성(事實性, historicity)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던 석양(夕陽, sunset)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들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일 유명한 그림은 로버트 췬트 (Robert Zünd, 1826-1909, 스위스)가 그린 ‘The Road to Emmaus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 해가 저물어 가는, 그 때의 상황을 잘 묘사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뭔가를 손짓을 해 가면서 말씀하시고, 두 사람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는 사방이 적막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Robert Zünd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rescue Israel).” (21절) 이 말에서 그 두 사람의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똑 같은 제자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We have left all we had to follow you).” (누가복음 18:28) “Behold, we have left our own [homes,] and followed You." Homes를 버렸다고 하면 집이나 재산도 포함되지만, 사랑하는 식구들도 포함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었고, 나중에 모든 것을 보상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가졌던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가는 그 때 제자들의 상실감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을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The disciples were grieving and weeping).” (마가복음 16:10)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 때,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다고 했습니다 (They stopped short, sadness written across their faces., 17절). 이 말 속에 두 사람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믿었던 것들이 틀어졌을 때,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영영 떠났을 때, 우리도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내 인생이 모두 끝난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월이 약이라고 합니다. 그냥 살다 보면 다 잊혀진다고 합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금방 죽을 것 같더니 시간이 좀 지나면 진정이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긴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이 찾아 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로 유명한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없어져도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큼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존 뉴톤 목사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의 말씀이 되고, 치유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상실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힌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신 것입니다. 비록 처음부터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 이 말씀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힘들어 할 때, 슬픔과 절망의 시간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 (effective) 할까요? 하고 말고요. 성경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Now these things happened as examples for us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6)
둘째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교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交際, fellowship)’라는 말은 주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아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것,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5-27절).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우리 마음에 불이 붙고,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은 우리의 눈이 새롭게 떠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믿고 있던 Old Paradigm이 무너지고 New Paradigm이 주어졌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바울은 이 경험을 ‘enlightenment (깨달음)’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I pray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 (나는 여러분의 마음이 눈이 밝아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이 이상한 말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구나!” “우리가 길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구나!”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삶이 없으면 끊임없이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교제의 삶이 있으면 그 의심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우리 믿음은 교제의 삶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견고해집니다.
셋째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personal encounter)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내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어떻게 내가 용서 받는 것이 됩니까? 오늘 여러분 중에도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가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열매가 있을 것 아닙니까? 바울은 23절에서 ‘those who belong to Christ (NIV, NLT)’ ‘those who are Christ's (NKJV)’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를 용서 받고,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세요. 슬픔과 절망으로 고향으로 내려 가던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에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아직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걷던 사람들이 동터 오는 새벽 길을 달려갑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상상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 (epistles)에 그의 뛰어난 신학적인 상상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2-5이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 (New Living Translation)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공식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절망할 때, 그 자리에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곧 주님께서 나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문제를 만나고 시련을 만날 때 절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 문제를 통해서 나를 단련 시키시는구나. 이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더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 시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이고, 크리스천의 삶의 공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저물어가는 석양 길을 걷지 않고 동터 오는 새벽길을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