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019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I) (If God Is For Me)
김태환 목사
시편 46:1-7
1 <택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고라 자손의 시. 알라못에 맞춰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힘이십니다. 어려울 때에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2 그래서 우리는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려도
3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셀라)
가장 높으신 분이 사시는 성소, 하나님의 성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시내가 하나 있습니다.
5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6 나라들이 떨며 왕국들마다 흔들거립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시자, 땅이 녹아 내립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셀라)
1 [For the choir director: A song of the descendants of Korah, to be sung by soprano voices①.]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 ①Hebrew according to alamoth
2 So we will not fear when earthquakes come and the mountains crumble into the sea.
3 Let the oceans roar and foam. Let the mountains tremble as the waters surge! Interlude
4 A river brings joy to the city of our God, the sacred home of the Most High.
5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6 The nations are in chaos, and their kingdoms crumble! God's voice thunders, and the earth melts!
7 The LORD of Heaven's Armies is here among us; the God of Israel is our fortress. Interlude
오늘 아직 Boston의 Commonwealth Avenue나 Allston의 Harvard Avenue에 나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차들로 붐빌 것입니다. 매년 이 때가 그렇습니다. 오늘은 9월 1일이니까 딱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날이네요. 여기 저기 이삿짐을 실은 유 홀 (U haul)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운전자들이 운전이 서툴고, 또 길을 잘 모르니까 차가 많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986년에 보스턴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그 전에 LA에서 2년 반 정도 살았습니다. 클레아몬트 신학교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에서 공부하다가 보스턴 신학학교로 transfer해서 왔습니다. 클레아몬트에서 아직 석사 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지만, 바로 박사과정으로 받아 주고, 학점도 인정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보스턴 신학교로 온 것입니다. 그 때가 8월 중순이 조금 넘은 때였습니다. 제 시계를 보니 아직 낮인데, 보스턴은 벌써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제 시계가 LA 시간으로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모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턴 사람들은 날이 추운지 벌써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보스턴 시간으로 오후 6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내가 공부할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학교부터 가봤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스턴대학 정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스턴 대학은 정문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학교 캠퍼스도 딱히 캠퍼스라고 할 게 없고 길 가에 있는 우중충한 건물들이 학교 건물이고 강의실들이었습니다. “야, 보스턴대학은 정문도 없는 학교로 구나. 클레아몬트 신학교는 정문도 있고, 캠퍼스도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학교를 잘못 온 것 같다. 그냥 클레아몬트에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보스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타주에서 온 학생들은 33년 전에 제가 생각했던 같이 벌써 보스턴에 잘못 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를 마치면 제 사무실에서 그 날 새로 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교회를 소개해 드리고, 새로 오신 분들과 기념 사진도 찍습니다. 그 방에서 저와 함께 교회 새로 오신 분들을 영접하는 일을 맡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이 그 집사님에게 보스턴 생활에 대하여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한달에 아파트 렌트비는 얼마나 되고, 생활비는 얼마나 드는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고, 어쩌다가 보스턴으로 오셨어요? 보스턴은 렌트비가 비싸고, 물가는 아마 미국에서 제일 비쌀 겁니다. 또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굉장히 춥습니다. 잘못 오셨어요.”
오늘 보스턴에 새로 오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보스턴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누가 보스턴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말 듣지 마십시오. 비록 학교 정문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학교들입니다. 그리고, 렌트비가 좀 비싸고, 물가가 싸지는 않지만, 살아보면 다 살아집니다. 보스턴이 처음에는 정이 안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드는 도시가 보스턴입니다. 제가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뷰엔나 팍 (Buena Park)에도 잠깐 살았고, 대부분은 클레아몬트 (Claremont)에서 살았습니다. 모두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지금은 보스턴이 훨씬 좋습니다. 보스턴 사람들을 ‘보스토니안 (Bostonian)’이라고 부르는데, 여러분도 곧 보스턴을 사랑하는 ‘보스토니안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보스턴에 왔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보스턴에 왔든지, 또 새로운 직장을 찾아 보스턴에 왔든지 모두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보스턴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을까? 보스턴 사람들은 다 똑똑하다는데 당해낼 수 있을까? 지도 교수는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 이곳의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이런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온 사람들에게만 불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을 경험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입니다. 시편 사미스트 (psalmist)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42:5, 11, 43:5)”하고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싸인 얼굴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같구나. 여기 머물러 있으라.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7-38)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까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 독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었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 당했습니다. 다행이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교수직을 제의 받고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후 하바드 신학교와 시카고 신학교에서 강의했습니다. 하바드 신학교 도서관에 가면 폴 틸리히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폴 틸리히는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불안에 대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The basic anxiety, the anxiety of a finite being about the threat of non-being, cannot be eliminated. It belongs to existence itself.” “기본적인 불안 즉 비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제한된 존재로서 느끼는 불안은 제거될 수 없다. 이런 불안은 존재 자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non-being (비 존재)’이라는 것은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은 비존재의 위협입니다. 죽으면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거나 실패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절망하고 삶이 망가지는 것도 비존재의 위협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나는 원래 되려고 했던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스턴에 꿈을 가지고 찾아 왔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불안의 이유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 존재의 위협’ 아닐까요? “내가 실패해서 내 인생이 여기서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이 낯선 곳에서 내가 가졌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을까?” 이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비 존재의 위협 (the threat of non-being)’입니다.
틸리히는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The courage to be is rooted in the God who appears when God has disappeared in the anxiety of doubt.” “존재에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이 낯선 땅에서 실패하여 철저하게 곤두박질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용기를 낸 것은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존재에의 용기 (the courage to be)’입니다. ‘존재에의 용기’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I will put my hope in God!” (5절, New Living Translation) “Why am I so sad? Why am I so troubled? I will put my hope in God.” (Good News Translation) 이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 시편 46편은 같은 저자가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려도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지키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God dwells in that city.”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면 “God dwells in me”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It cannot be destroyed”라고 했습니다. 결코 내 삶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많은 스승을 찾아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고행도 하고, 수도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네 옆에 계시는구나!” “예?” 깜짝 놀란 젊은 수도사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가 물었습니다. “제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젊은 수도사의 말에 스승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지 아는가? 왜 술 취한 사람이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지 아는가?” 젊은 수도사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스승이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먼저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어라. 취하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느니라!”
선문답(禪問答) 같기도 하고, 우스운 말 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취하다’는 말은 어디에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할 때 ‘-aholic’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alcoholic’은 술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workaholic’은 일에 빠져 일 밖에 모르는, 일에 중독된 사람을 말합니다. ‘shopaholic’은 물건을 마구 사 들이면서 돈을 낭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공부에 빠진 사람은 뭐라고 하나요? ‘공부홀릭’이라고 하나요?
저는 우리교회가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유학생이나 여기 거주해서 사시는 분들이나,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디아스포라 (diaspora)’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도 클레아몬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주말이면 주로 밤 시간에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작은 폭포가 있어서 큰 소리로 기도해도 괜찮았습니다.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찬송을 부르다 보면 어느 새 찬송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공부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부에 빠지지는 않아야 합니다. ‘공부홀릭’이 되면 하나님 잃어버립니다. 교회에 안 가고 그 시간에 공부하고, 예배 드리야 하는 시간에 페이퍼 쓰고 이러다가는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브로니 웨어 (Bronnie Ware)라는 연명 치료사가 ‘죽기 전에 하는 후회 5가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연명 치료사는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 5가지 중에 하나가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 (I wish I didn't work so hard)”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 일에 매달렸는데, 그러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훗날 유학생활을 회상하면서 똑 같은 말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죽자고 공부에 매달릴 필요 없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더 중요한 하나님을 잃어버렸거든요.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 말씀을 여러분의 책상 머리에 써 붙여 두고 힘들 때마다 읽으세요. 이 말씀을 읽고 힘을 얻으세요. 원래 이 말씀은 ‘A song to be sung by soprano voices (소프라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여러분의 귓전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를 듣고 힘을 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항상 도와 주시니, 땅이 마구 뒤흔들려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산 저 산이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바다에 마구 폭풍이 몰아치고 미친 듯이 날뛴다 해도, 그 물이 넘쳐 언덕들이 마구 요동을 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하나도 무섭지 않아.” (셀라) (현대어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