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2018 | 사순절 22
십자가의 싸인 (The Sign Of The Cross)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36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37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가 주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선생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허락해 주십시오.”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들은 정해 놓은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41 이 말을 듣고,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35 Then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came over and spoke to him. "Teacher," they said, "we want you to do us a favor."
36 "What is your request?" he asked.
37 They replied, "When you sit on your glorious throne, we want to sit in places of honor next to you, one on your right and the other on your left."
38 But Jesus said to them,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Are you able to drink from the bitter cup of suffering I am about to drink? Are you able to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suffering I must be baptized with?"
39 "Oh yes," they replied, "we are able!" Then Jesus told them, "You will indeed drink from my bitter cup and be baptized with my baptism of suffering.
40 But I have no right to say who will sit on my right or my left. God has prepared those places for the ones he has chosen."
41 When the ten other disciples heard what James and John had asked, they were indignant.
42 So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in this world lord it over their people, and officials flaunt their authority over those under them.
43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44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5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오늘 말씀 제목은 ‘십자가의 싸인’입니다. 제가 어떤 문서를 작성하고 마지막에 싸인을 하면 그 문서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은 제가 작성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십자가라는 싸인이 들어가면, 그 일은 십자가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십자가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십자가는 그렇게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두명이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군지 성경에 ‘강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강도라고 한 것은 그 사람들의 잔인함이나 폭력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강도가 아니라 로마 정부를 뒤엎으려는 혁명을 시도 했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대신 풀려난 ‘바라바’도 ‘혁명가 (revolu¬tion¬ary)'였습니다. 로마는 다른 웬만한 일들은 유대인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 로마는 일체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에 대항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을 매달아 죽이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이 끔찍한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시몬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구레네 (Cyrene)’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지중해 연안의 ‘리비아 (Libya)’에 속한 곳입니다. 전통적으로 화가들은 구레네 시몬의 얼굴을 검게 그려 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이니까 흑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몬이 완전히 리비아 사람이라기보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유월절에 시몬이 예루살렘에 왔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21에는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시간 상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기 어렵지만, 비록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때의 그 경험이 시몬의 삶을 변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 (로마서 16:13)라고 할만큼 사도 바울의 사역에도 깊이 참여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십자가의 싸인들이 나타나야 할까요? 첫째로, 십자가의 싸인은 우리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나타납니다. 원래 십자가라는 것이 약한 것이잖아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죽는 일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내가 약할 때 그 때 나는 강합니다)” 우리에게 절망되고 낙심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의 싸인이라고 합니다. 이 십자가의 싸인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힘이 없을 때가 약한 때가 아니라, 내 힘이 강해서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교만한 생각이 들 때, 그 때가 가장 위험하고 약한 때입니다. 반대로, 내가 무력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히려 내가 강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약함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싸인은 우리의 구원 받은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죄에 대해서 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이 이끄는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납니다.
셋째로, 십자가의 싸인은 희생과 섬김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2-44)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도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진정으로 높은 사람들이 된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진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진리가 옳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생명을 내 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김의 삶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았던 엘리자베스 쉐핑 (Eliz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말 이름은 서서평입니다. 독일 사람입니다. 1912년, 서서평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조선) 왔을 때, 조선은 아직 개화 되지 않은 동방의 미개한 나라였습니다. 서서평은 한국인이 아니면서도 가장 한국인처럼 살았습니다. 한국인들과 똑 같은 옷을 입었고, 똑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아서 먹을 정 도였습니다. 서서평은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934년, 서서평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습니다. 자신의 시신은 의학용으로 기부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운구행렬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가 쓰던 방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가진 것까지 모두 조선 사람들에게 주고 떠난 것입니다. 그녀의 방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s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천천히 평온하게! (Slowly And Peacefully)’라는 서서평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많은 감동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싸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싸인은 (1) 우리의 약한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2)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변화의 삶을 통해서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납니다. (3) 우리의 삶에서 이기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자기를 ‘대속물’로 내 주신 예수님이 모습이 보일 때,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의 싸인이 나타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성취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의 싸인을 찾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무효로 만드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