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25-30

2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왕은 백성들 위에서 왕노릇 한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은인으로 불린다.
26 그러나 너희가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
27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28 너희는 내가 시험을 당할 때 나와 함께 있었다.
29 내 아버지께서 내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주려고 한다.
30 너희는 내 나라에서 먹고 마실 것이며,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5 Jesus told them, "In this world the kings and great men lord it over their people, yet they are called `friends of the people.'
26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Those who are the greatest among you should take the lowest rank, and the leader should be like a servant.
27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28 "You have stayed with me in my time of trial.
29 And just as my Father has granted me a Kingdom, I now grant you the right
30 to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And you will sit on thrones, judging the twelve tribes of Israel.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성경이 구약에서는 이사야서이고,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서기 62-65년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화재 사건이 서기 64년 7월 18일에 일어났습니다. 네로 (Nero, 37-68 A.D. 재위 기간 54-68년)는 화재의 책임을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 돌렸고, 크리스천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피신해서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도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2통의 위로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그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 글 속에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받고 있는 박해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사셨으니 우리도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 속에 있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받는 삶에 참여하고 그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To live as a Christian means to participate and share in the suffering of Christ).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Paradigm Shift’라는 말이 있습니다. ‘paradigm’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frame of reference’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자가 과거의 경험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만든 자신만의 ‘frame of reference’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이다,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는 자기 나름의 크리스천들에 대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들은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그렇습니까?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여러분들 중에 이런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paradigm shift’가 일어납니다. 마치 자동차가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gear를 shift하니까 속도가 빨라지면서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되듯이 ‘paradigm’이 shift 되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전에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도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Elis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에 대한 영화를 통해서, 또 그녀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죽고, 그녀의 방에 붙어 있었다는 글 귀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하는 글 귀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독일 선교부에 보내 주는 선교비를 모두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담요 한 장도 절반은 누구에게 줘 버리고, 그녀 자신은 영양 실조로 죽었다는 글을 읽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리고,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또 느꼈습니다. 리빙스턴이 남긴 글 하나 소개할까요? “Oh, that I could dedicate my all to God. This is all the return I can make Him.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 (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 드린 것 뿐입니다. 하나님, 저와 함께만 가신다면 저를 어디든지 보내십시오. 저를 붙잡아만 주신다면 어떤 짐이든지 저에게 지우십시오. 저의 마음이 당신과 묶여 있는 끈을 제외하고는 내 마음에 묶여 있는 모든 끈들을 끊어 주십시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아,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로구나!” 하는 새로운 ‘paradigm’이 생깁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고난의 삶에 참여하고, 그 고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눈다’는 말은 자신도 그렇게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고난 받는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제 머리 속에 두 개의 성경 말씀이 떠 오릅니다. 하나는, 히브리서 5:8-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In this way, God qualified him as a perfect High Priest, and he became the source of eternal salvation for all those who obey him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셨고, 그는 그에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다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겠습니까? 교회생활을 좀 하고, 성경도 좀 알고, 기도도 좀 하는 사람들이 내가 받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이 맞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그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하는 진지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받는 고난이라면 그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라면 그 고난은 단순히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우리를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말씀은 베드로전서 2:24-25 말씀입니다. “그는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의 목자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24-25)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of your souls.”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은 고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받은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 다른 사람의 아픔, 다른 사람의 염려와 걱정, 다른 사람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떠 맡으신 것입니다.

Joseph M. Scriven (1819-1886)이 쓴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찬송의 영어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니)”입니다. 그 찬송 1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우리의 죄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니!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렵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마태복음 19:26) 그렇습니까? 자신도 연약한 몸이었지만 그 몸으로 조선의 여성들의 문제를 떠맡았던 Elisabeth Shepping (한국 이름: 서서평)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미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땅에서 살다가 그 땅에 죽은 리빙스턴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아니, 우리가 감이 접근할 수 없는 이런 사람들 외에도 이름 없이 조용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들의 아픔과 걱정을 같이 해 주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안에 있는 ‘이기주의 (selfishness)’라는 적(敵, enemy)과 싸워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문제만 생각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여러분, 잘 알아 두세요. 크리스천의 삶 속에 ‘이기주의’는 설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기주의’가 설 곳을 내주면 안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만 위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과 평생 싸워야 합니다. “내가 왜?”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길 때 “나는 크리스천이니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적과 싸워야 합니다. 이 내 안에 있는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천박한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크리스천이 왜 저래?” 하는 비난을 받습니다. 내 안의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는 크리스천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골로새서 1:24에 있는 말씀입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나는 여러분을 위해 내 몸에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여러분 자신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You have stayed with me in my time of trial. And just as my Father has granted me a Kingdom, I now grant you the right to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누가복음 22:28-29) “나의 아버지께서 왕국을 나에게 주신 것처럼, 다도 너희에게 나의 왕국의 식탁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준다. 너희는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in my time of trial)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in my time of trial’이라는 말 대신 ‘in my time of temptations (내가 유혹 받는 시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은 장차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앉을 권리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