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9:13-18, 29-32

13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호의를 기다리면서 주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주의 크고도 크신 사랑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14 나를 수렁에 빠지게 마시고 수렁에서 건져 주소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깊은 물 속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큰 물결이 나를 휩쓸지 못하게 하시고, 깊은 물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고, 무덤이 나를 덮치지 못하게 하소서.
16 오 여호와여, 주의 순결한 사랑으로 내게 대답하여 주소서.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나를 돌보아 주소서.
17 나는 주의 종입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내게 대답해 주소서. 내가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18 내게로 가까이 오셔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를 내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소서.
29 내가 괴롭고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하시고 지켜 주소서.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겠습니다.
31 그것이 수소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흐뭇하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32 겸손한 자가 이러한 일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 지금 ‘사순절 (Lent)’ 기간인데요. ‘사순절’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 우리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잘 보내고 계시지요? 새벽 기도에 열심히 참여하고 계시는 교우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냥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라이드로, 미디어로, 아침 식사로 참여하고 계시는 교우들께 감사 드립니다.

무엇이든지 자원해서 드리는 일은 힘들지 않고, 재미 있고, 성과가 있습니다. 공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보스턴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자기 전공분야의 첨단 학문을 배우고, 전공 분야의 지식을 넓혀가면서도, 나의 전문 지식이 직업을 얻고, 나의 생계수단이 되고, 돈을 번다는 단순한 생각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보다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닦은 나의 학문이 조국을 위해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고, 세상을 좀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지, 왜 교회에 나가는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고 습관적으로 믿음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생활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더 깊이 알려는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나에게 있어서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빌립보서 3:7-8)”라고 했는데, 성경책이 내 손 안에 있어야 합니다. J. I. Packer가 쓴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같은 책이 내 주변에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새벽에 나와야 한다고 야단을 하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만,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17). “Pray without ceasing”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숨을 계속 쉬어야 하는 것처럼, 기도를 그치면 영적호흡이 당장에 끊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의 설교, 그의 편지에 나오는 말들은 책상에 앉아서 깊이 생각해 본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탁상공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나 편지글들은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의 말씀들을 해석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했던 말들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볼까요?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마태복음 6:13)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temptation’이 너무 많습니다. 조금만 우리의 생각이 나태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면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악한 일에 가담하게 됩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한 일에 가담하지 않는 제일 좋은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계속 기도를 통해서 소통(疏通)하는 것이야 말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2,000년에 제자들이 살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더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18:1) NASB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en always ought to pray and not lose heart.” ‘men’이라고 했으니까 “사람은 항상 기도해야 하고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좋겠지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 없는 옵션이 아닙니다. 기도는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낙심할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에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없습니까? 우리 주변에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열 두 번도 더 드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네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말씀드린 연장선에서 오늘 시편 69편 말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 of David, to be sung to the tune ‘Lilies.’” 이 시편 69편을 어떻게 노래로 불러야 하는지 합창 지휘자에게 주는 지시 (instruction) 사항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백합’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시편은 그 노래 곡조에 맞춰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모르니까 맞춰 부를 수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쉬운성경에는 이 시편은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다윗의 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봐서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즐겁고 행복한 때를 노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시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많은 은혜가 되는 이유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잖아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한 자격이 없다.” 그렇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들은 다윗이 쓴 시편에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찰력 (insight)을 얻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기도가 주는 영적인 유익’입니다. 저는 오늘 시편 69편에 나와 있는 네 가지 기도가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유익들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유익들을 기도하지 않으면 모두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하면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첫째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줍니다. ‘intimate (친밀한)’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제가 기억하는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노아 (Noah)’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This is the account of Noah and his family.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 (창세기 6:9) 직역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이것은 노아와 노아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흠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가까운) 교제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호의를 기다리면서 주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주의 크고도 크신 사랑으로 확실한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13절) 여러분, 다윗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도의 말들을 주목해 보세요. “주님의 호의를 기다립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in your unfailing love)’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시오.” “확실한 구원 (sure salvation)을 베풀어 주십시오.” “내게로 가까이 오셔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8절) “내 마음이 괴롭고 몹시 아픕니다.” (29절) 지금 다윗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 말들은 하나님과 ‘close (intimate) fellowship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쉽게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이런 말 대신 영혼 없는 형식적인 말들이 나옵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만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친밀한 단어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둘째로, 기도의 유익은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게 합니다. 한번 다윗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은 내 어리석음을 잘 알고 계시니, 내 죄를 주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습니다.” (5절)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분 앞에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숨겨진 것들을 다 말씀 드리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전문적인 용어로 ‘confession (고백)’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정금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정금은 아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금을 말하잖아요? 지금 한국에 ‘Me Too’이 번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누구에게 말할 수 없어서 가슴에 숨겨두었던 일들을 하나 둘 공개적으로 꺼내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어디까지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워낙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다른 일보다 먼저여야 하니까 다른 말은 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냥 이러다가 수그러드는 일이 된다면 아예 처음부터 ‘Me Too’ 운동이 시작되지 말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되고,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 결과가 주목됩니다. 가해자 중에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나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아무리 가해자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살한 사람의 평소 친구들 조차 그 사람의 장례식에 가는 일이 조심스러워서 꺼리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기도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confess’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confess’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confess’하면서 하나님께서 상처를 싸매 주시는 치유를 경험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편은 다윗이 가해자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confess’하는 시편입니다.

적절한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결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겨 놓았던 부끄러운 일들을 ‘confess’함으로서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정금 같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삶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기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 역시 우리를 정결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고난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셋째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하나님을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provider (공급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신기하게도 시편 69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수소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흐뭇하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30-31절) 우리가 그 과정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 시편이 처음에는 어두운 기도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기도가 찬양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이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들을 들어 주시고 공급해 주시는 ‘provider’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provider’라는 사실을 다른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가 주는 유익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성숙한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이런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 믿음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인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 보겠습니다. “겸손한 자가 이러한 일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3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humble will see their God at work and be glad. Let all who seek God’s help be encouraged.” 여기서 ‘the humble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고난 받는 사람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마음이 낮아지잖아요?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시편 69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 속에 자기와 동일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자기와 똑 같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합니다. 나를 도와 주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도와 주실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기도가 자기 안에서 머물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 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