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 (To Live As A Christian)
김태환 목사
고린도후서 5:14-21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시키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 여러분을 권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가 있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4 Either way, Christ’s love controls us①. Since we believe that Christ died for all, we also believe that we have all died to our old life. / ①Or urges us on 15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ose who receive his new life will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Instead, they will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them. 16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17 This means that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18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who brought us back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19 For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 longer counting people’s sins against them. And he gave us this wonderful message of reconciliation. 20 So we are Christ’s ambassadors; God is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speak for Christ when we plead, “Come back to God!” 21 For God made Christ, who never sinned, to be the offering for our sin, so that we could be made right with God through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마디로 제일 잘 표현한 말씀이 마가복음 10:45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 (the purpose of life)’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우리에게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삶의 목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 전에는 이런 말이 있는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우리는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에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 곧 나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목적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막상 많은 사람들이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읽으면서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섬기는 것은 겸손한 말이나 태도, 예의 바른 행동, 이런 것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나오는 ‘대속물 (ransom)’이라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ransom’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이 말은 ‘rescue’ 혹은 ‘redemption (구원)’이라는 말과 관계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 (ransom)’이 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말에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도 ‘종(從)’이나 ‘노비(奴婢)’가 있었습니다. ‘속량’은 종의 몸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선량한 시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속전(贖錢)’이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몸 값으로 지불하는 돈을 말합니다. 몸 값을 지불하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자유인이 됩니다. ‘대속물 (代贖物)’은 몸 값으로 지불하는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감동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집에 종을 두고 있는 어느 양반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집 주인이 교회를 갔다 오더니, 그 집 종을 불렀습니다. “자네 내 방으로 들어오게!” 주인이 점잖고 진진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종은 영문도 모르고 주인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화로(火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 않게.” 그 종은 평상시와 다른 주인의 목소리에 당황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네 이게 뭔지 아나? 자네 노비 문서네.” 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노비 문서를 화로에 넣어버렸습니다. “이제 노비 문서를 태워버렸으니 자넨 이제부터 종이 아니네.” 우리 한국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전’이 되시고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양반 집 주인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주인은 자기 집에 있던 종의 노비 문서를 태워 버리고 그 종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그 종에게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0:45 말씀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이란 말이 더 이상 ‘수사학적인 (rhetoric)’ 말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섬김’이란 말을 별 뜻 없이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 앞에 나가서 “전 이제부터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전 그 말을 들으면서 “섬기고 싶으면 조용히 섬기면 되지 그렇게 요란하게 선언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섬김의 삶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십시오. 다시는 죄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1-1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you should consider yourselves to be dead to the power of sin and alive to God through Christ Jesus. Do not let sin control the way you live; do not give in to sinful desires. Do not let any part of your life become an instrument of evil to serve sin. Instead,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in Christ Jesus. So use your whole life as an instrument to do what is right for the glory of God.”
이 놀라운 일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날부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놀라운 삶의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6에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the good work (선한 일)’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는데, ‘the good work’라는 말이 ‘making us instruments of God’s righteousness (우리를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instruments of evil to serve sin (죄를 섬기는 불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ransom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로 지금 여러분과 제 안에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는 사로 잡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 잡는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urge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 (keyword)입니다. “왜 우리가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에 살던 대로 살면 안 되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질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제는 ‘instruments of God’s righteousness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우리를 urge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urge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 양반 집 주인은 그 날 교회에 갔다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셨다는 설교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 속에서 urge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네는 이제 종이 아니라고, 종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서 우리를 urge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변화의 삶’의 핵심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관점(觀點)’은 사물을 보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a point of view’를 말합니다. 이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a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입니다. 또 하나는,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성경적인 관점 (a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the eyes of faith (믿음의 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보았고, 그들은 그들이 눈으로 본 대로 보고했습니다. 그들이 보고는 모든 사람들을 낙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의 정탐꾼들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보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민수기 13-14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관점’이 바뀐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 (a new creation)’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관점이 바뀌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맡겨 주신 중요한 사역은 청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청년들의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을 ‘인간적인 관점’에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이 틀렸다든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는 보지 못하고, 놓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봐야 비로소 보이고, 비로소 해석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대속물’입니다 (16절).
저에게 청년들은 보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제가 이 청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청년들이 ‘새로운 피조물들’이 될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주는 것입니다. 청년부의 간사들 역시 청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청년들 옆에 붙여 주신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로, 가족장으로 세움을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넓게 보면, 여러분을 이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는 일에 도움이 되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ransom’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화목의 직분 (task of reconciliation, 18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 (Christ’s ambassadors, 20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urge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