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2019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II) (To Live As A Christian)
김태환 목사
마태복음 5:9, 로마서 12:17-21
9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
20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17 Do not repay anyone evil for evil. Be careful to do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everybody.
18 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 live at peace with everyone.
19 Do not take revenge, my friends, but leave room for God's wrath, for it is written: "It is mine to avenge; I will repay,"① says the Lord. / ①Deut 32.35 says the LORD.
20 On the contrary: "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something to drink. In doing this,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① /①Prov 25.21-22
21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Advent Candle (대강절 촛불)’이란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까지 4주 동안 대강절이 계속되는데, 매주마다 촛불을 켭니다. 첫 주에는 보라색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둘째 주에도 보라색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평화를 상징라는 촛불입니다. 셋째 주에는 핑크색 촛불을 켭니다. 이 촛불은 기쁨을 상징합니다. 넷째 주에는 다시 보라색 촛불을 켭니다. 이 촛불은 사랑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그리고 넷째 주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흰색 촛불을 같이 켭니다.
이번 리뉴에서 많이 부른 찬양 중에 ‘시간을 뚫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김강현이란 분이 가사와 곡을 쓴 찬양입니다. 찬양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뚫고 이 땅 가운데 오셨네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 우리 삶에 오셨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오셨네
(합창)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네
꿈 없는 우리에게 그 나라 보여 주시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힘 없는 우리의 인생을 위로 하시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빛이신 그분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요한복음 1:9) 이 참 빛이 세상이 비치기까지 인류에게 희망이 없었습니다. 참 평화가 없었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비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김강현의 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뚫고’ 이 땅에 들어 오심으로 말미암아 꿈이 없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저지에 있는 뉴 브런스윅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26살의 청년이었고, 아펜젤러 역시 뉴저지에 있는 Drew 신학대학을 졸업한 27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덕분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고,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펜젤러가 조선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날에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시간을 뚫고’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처음부터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ternal Father, Prince of Peace).” (이사야 9:6)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신 분이지만, 특히 ‘평화’에 대하여는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신 (preeminent) 분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전문가입니다. 이 말이 ‘Prince of Peace (평화의 왕)’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누가복음 2:14)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겸손 사람의 예로 ‘목자들 (shepherds)’을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46:34). 아마도 목자들의 몸에서 동물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유목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농경문화에 적응하게 되고, 그 때부터 목자는 천대 받는 직업이 되었습니다. 원래 겸손을 말하는 ‘humble’이라는 말이 라틴어 ‘humilis’라는 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lowly’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교황이 266대 프랜시스 교황입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입니다. 그의 언행이 이전의 교황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 분이 교황이 되면서 많은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그가 사제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Be shepherds with the smell of sheep).”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그 사람이 참 목자이고,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God opposes the proud but favors the humble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야고보서 4:6) 하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샬롬 (shalom)’입니다. 여러분, ‘샬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고, 빠진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리고 “주께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샬롬’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everyone has sinned; we all fall short of God's glorious standard. Yet God, with undeserved kindness, declares that we are righteous. He did this through Christ Jesus when he freed us from the penalty for our sins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도 안 되는 친절을 베푸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23-24) 요한은 이 사실을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요한일서 4:10-11)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9)”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을 뚫고’ 이 역사 속에 들어 오셔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이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창조자들 (peacemakers)’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해야 하는 ‘평화’는 단순한 ‘peace’가 아니라 ‘샬롬 (Shalom)’입니다.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창조자들은 꾸준하게,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샬롬’을 창조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크리스천으로 사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악으로 악을 갚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의 창조자 (peacemaker)’로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끝으로,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같이 읽겠습니다.
평화의 기도 (Prayers for Peace)-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2-1226, 이탈리아)
주여, 나를 주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Thy peac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error, truth;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oubt, faith;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espair, hope;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오 주님,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To be loved as to love;
왜냐하면, 줌으로써 받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용서하는 것이 용서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And it is in dying to ourselves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