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2019 | 성탄주일 메시지 II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V) (To Live As A Christian)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3:16-18
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18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6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There is no judgment against anyone who believes in him. Bu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in him has already been judged for not believing in God's one and only Son. (New Living Translation)
세계 각국의 성탄절 인사가 재미 있습니다. 미국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일본 "メリ クリスマス (메리 크리스마스)!" 중국 "圣诞快乐 (셩딴 콰일러)!"
프랑스 "Joyeux Noël (조이유 노엘)!" 스페인 "¡Feliz Navidad (펠리쓰 나비대드)!"
브라질 "Feliz Natal (펠리쓰 나딸)!" 독일 "Fröhliche Weihnachten (프뢸리헤 바이나흐텐)!"
이탈리아 "Buon Natale (부온 나탈레)!" 그리스 "Καλά Χριστούγενα (칼라 크리스토게나)!"
한국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 북한 "기쁜 성탄절 되시라요!"
성탄절이 되면 성탄 찬송을 많이 부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탄 찬송가 중에 최고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찬송가는 Joseph Franz Mohr (모어, 1792-1848, 오스트리아)가 시를 쓰고, Franz Xaver Gruber (그루버, 1787-1863, 오스트리아)가 곡을 붙였습니다. ‘모어’는 그 교회의 주임 신부로 섬기고 있었고, 학교 음악 교사였던 ‘그루버’는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 겸 오르간 반주자로 있었습니다. 때는 1818년 크리스마스 전 날 저녁이었습니다. 주임 신부 ‘모어’는 다급한 마음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가대 지휘자 ‘그루버’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모어’의 손에는 그가 2년 전에 써 놓은 시 한 편이 쥐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미사가 불과 몇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모어’ 신부는 미사에 쓸 음악이 필요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교회의 오르간이 고장 나는 바람에 다른 음악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모어’는 이 찬양시에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그루버’의 집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어’의 시를 읽고 영감을 얻은 ‘그루버’는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간단한 멜로디와 합창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악보에는 6절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날 저녁에 테너 ‘모어’와 베이스 ‘그루버’가 이중창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가 후렴 부분을 불렀다고 합니다. ‘모어’가 기타 반주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노래가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노래가 1858년에 영어로 번역이 되었고, 현재는 14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수 십년 간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 (1803-1815)’으로 마음이 황폐해 진 사람들이 평화와 안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가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찬송을 국보급으로 여기고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이 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이 곡을 이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에 유네스코 (UNESCO)에서는 이 노래를 ‘인류의 유산 (world heritage)’으로 지정함으로써 더욱 가치를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배 시간에 사용할 음악은 필요한데, 교회 오르간은 고장이 나서 쓸 수 없게 되고, 예배 때까지 시간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불후의 명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많았더라면 영영 이 노래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들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Advent Candle)’ 네 개를 모두 켰습니다. 오늘 켠 촛불이 사랑의 촛불입니다. 보라색 촛불입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흰색 ‘그리스도의 촛불’을 켰습니다.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까지,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저는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네 가지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위대한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3:16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성경 66권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NIV)”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암송하면서도 오랫동안 ‘독생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차라리 ‘독자(獨子)’ 혹은 ‘외아들’이라고 했으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왜 ‘독생자’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자 (창세기 22:2, 12, 16, only son)’라고 나와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영어로 ‘only begotten son’이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낳은) 아들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희생하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거나, 내려 놓거나, 희생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지난 주 예배 시간에 불렀던 찬송가 304장 가사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이 찬송시를 쓴 Frederick M. Lehman (1868-1953, 독일)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범위가 별보다도 높은 곳에서부터 저 땅 속 깊은 지옥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넓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라면, 우리가 어떤 비참한 상황과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천박한 것입니까? 우리는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수준이 같은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해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랑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 (only son)’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 (sacrifice for reconciliation)’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who brought us back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고린도후서 5:18) 여러분,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 in Christ)’이 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 (task)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임무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켜야 하는 ‘그리스도의 대사 (Christ’s ambassadors)’로서의 임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20)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first)’ 베푸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악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죄를 벌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로 내주신 데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기를 마다하겠습니까?” (요한일서 4:9-11, 현대어 성경) 또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We love each other because he first loved us).”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고 배우기 전에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잊혀 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유분자 씨입니다. 저희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 올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그 때 그분은 재미간호사협회 회장으로 있었는데, 한국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저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참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김 목사님, 저에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처음에 미국 왔을 때 다른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저에게 감사하지 마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주세요.”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랑을 베풀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의 ‘주도권 (initiative)’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손을 내 밀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영어 단어에 ‘empower’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준다’는 뜻입니다.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that is what we are! But the people who belong to this world don't recognize that we are God's children because they don't know him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게 되었으니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릅니다).” (요한일서 3:1) 사도 바울은 “For Christ's love compels us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합니다., 고린도후서 5:14)”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드라이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단순히 위대한 사랑이라고 찬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empower’하고, 우리를 ‘compel’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 하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 말씀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empowering’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