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5-10

5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의 악한 행동이 크게 퍼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6 여호와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7 그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든 땅 위의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겠다. 사람에서부터 땅 위의 모든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멸망시키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다.
8 하지만 노아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9 노아의 자손은 이러합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10 노아는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습니다.

5 The LORD saw how great man's wickedness on the earth had become, and that every incl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all the time.
6 The LORD was grieve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is heart was filled with pain.
7 So the LORD said, "I will wipe mankind,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earth--men and animals, and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and birds of the air--for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them."
8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9 This is the account of Noah. 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10 Noah had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New International Version)

새해 들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첫 주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설교를 했고, 지난 주에는 ‘크리스천 아이덴티티’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행(同行)’은 같이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같이 갈 뿐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Santiago)’를 갔다 온 선배 목사님의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 북부 서쪽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9세기에 그곳에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유골(遺骨)이 발견되면서부터 그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총 4개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길’은 길이가 80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길을 모델로 해서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해마다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바쁜 일상생활을 살던 사람들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선배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 길이 무척 아름다워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길 가는 중에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모두 같은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 많이 필요 없고, 눈 빛 하나만으로도 의사 소통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둘이 같이 갈 수 있겠는가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간단한 말씀이지만, ‘동행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많은 영감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동행하는 삶’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언제나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비록 삶의 과정에서는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을 지 몰라도, 그 결과는 언제나 해피 엔딩입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 (Joseph)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요셉의 삶은 한마디로 ‘형통한 삶 (successful life)’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succeeded in everything he did)” (창세기 39:2) 심지어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형통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요셉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간수장의 마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이 하는 일에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39: 20-23) 성경을 생각하면서 읽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그냥 읽지 않을 것입니다. ‘successful life (성공적인 삶)’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이 같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때 요셉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18살, 혹은 19살 정도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 아들 요셉을 늘 끼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씀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끼고 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혹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얘야, 하나님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아버지 야곱이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요? 야곱 자신이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거든요. 저는 이것이 요셉이 형통한 삶을 살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교육 덕분에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그런 죄를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9:9)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결과는 언제나 해피 엔딩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美德)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 (4:6)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살겠다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하지만 노아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아의 자손은 이러합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This is the account of Noah. 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창세기 6:8-9) NLT 성경에 보면 노아는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그 때 살았던 흠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의롭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노아가 모든 사람이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방주(方舟, an ark)’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방주’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모스 말씀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이 말씀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목적지가 같지 않으면 헤어져야 합니다. 목적지가 같아야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 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Life is not a speed but a direction)!” 수영이라는 한국 작가가 이런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Emanuel Pastreich)라는 사람도 같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삶의 방향이 잘못 되었으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수영이라는 작가가 쓴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삶의 방향이 분명하다면 온 삶이 다 분명해진다. 하지만, 삶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면 삶은 늘 문제투성이가 되고 만다.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면 힘들 때 잠시 멈춰 쉬었다 가도 좋은 것이 인생이다.”

어떤 사람이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길어야 여섯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사람은 처음에는 무척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정리해서 모두 자선 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몸에 별 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죽을 줄 알고 재산을 다 기부해 버렸는데, 그 돈 아까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시한부 인생으로 살았던 때처럼 인생을 진지하고 보람 있게 산 적이 없었습니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의사의 진단이 이 사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삶의 내용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우리가 건강할 때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요? 건강할 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어렵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의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 이유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한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 ‘The Contemplative Pastor: Returning to the Art of Spiritual Direction (묵상하는 목회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들이 바쁘다는 것은 헌신의 증상이 아니라 배신의 증상이다 (The word busy is the symptom not of commitment but of betrayal).” 바쁜 목사들은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 없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I can be active and pray; I can work and pray; but I cannot be busy and pray. I cannot be inwardly rushed, distracted, or dispersed. In order to pray I have to be paying more attention to God than to what people are saying to me (나는 활동적이면서 기도할 수 있다. 나는 일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바쁘면서 기도할 수는 없다. 나의 내면이 쫓기고, 산만하고, 분산되어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들은 유진 피터슨이 목사들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만,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빠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은 헌신의 증상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살기를 포기하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의 증상입니다. 맞습니까? 새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핑계대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유명한 설교자 중에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가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설교자라고 칭송을 받는 캠벨 모르간 (George Campbell Morgan, 1863-1945)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교회 (Westminster Chapel)에서 30년을 목회하신 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의 본문 말씀이 시편 73:27-28입니다. “Those who desert him will perish, for you de-stroy those who abandon you. But as for me, how good it is to be near God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망할 것입니다. 주를 떠난 사람들을 주께서 멸망 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