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016 |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교회: 신앙 공동체 (The Church: Community of Faith)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2:37-47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38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개하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39 이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뿐만 아니라,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사람들, 즉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다른 여러 말로 그들에게 호소하고,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였습니다.
41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 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 믿은 사람의 수는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42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하고,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43 <믿는 사람들의 나누는 생활>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44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45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47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What should we do?”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수가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우리가 정말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회개를 뜻하는 희랍어는 ‘메타노이아 (metanoia)’입니다. 이 말의 본 뜻은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를 향하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는 삶으로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세계관이 바뀌고, 그 사람의 인생관이 바뀌는 사건이 회개입니다. 2,000년 전에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누가복음 19:8) 우리는 삭개오의 고백 속에 나오는 말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삭개오의 안중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준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이런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삭개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가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삭개오는 남을 속이고, 부정을 저지르고, 장부를 위조하고, 사기를 치고 하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100불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00불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차례 “직고(直告)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누구 앞에서 직접 말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4:12과 베드로전서 4:5에 이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Yes, each of us will give a personal account to God”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account라는 말은 report라는 말입니다. “우리 각 사람들은 하나님께 개인적인 보고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보고를 하게 될까요? “우리가 기도생활은 어떻게 하고, 성경은 얼마나 읽었고, 교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고, 교회에서 받은 직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보고를 하게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회개하고 나서 어떤 변화의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성경 지식이 많은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착한 일 (good work)’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성경 말씀 두 개만 보겠습니다. 하나는, 에베소서 2:10입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우리를 위해서 계획해 놓으신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7입니다.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의 사람들을 준비 시켜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여기서 ‘it’는 성경을 말합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인 저에게 오늘 읽은 말씀은 많은 도전과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변화의 삶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땅에 그렇게 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라는 말도 그들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 (a community of faith)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도 본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에클레시아, ekklesia)’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제도화된 의미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하는 6가지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6가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던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생각이나, 누구의 지지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들에게서 저절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42절).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사도들이 “아,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르쳐야 하겠어!”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NLT, NIV 등 모든 성경이 그런 식으로 이 말씀을 번역했습니다. 사도들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all the believers)이 주체가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teaching class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라는 부모의 말을 듣고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누가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성경을 읽어야 하겠어!”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동시에 신자들 간에 교제 (交際, fellowship)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fellowship”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오늘날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이 fellowship입니다. 신자들의 fellowship은 특별한 것입니다. 같이 지내고, 같이 놀고, 같이 먹고, 같이 여행가고, 이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쓰고, 같이 식사를 하고, 이 모든 일들이 신자들의 교제에 핵심적인 요소들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상처는 거의 모두 잘못된 교제의 삶에서 온 것입니다. 인위적인 교제의 삶이 아니라,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교제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을 의식하는 교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내 것을 주고 싶어서, 사람들이 너무 귀하게 보여서 시작된 교제의 삶입니다. 이런 교제의 삶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셋째로,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것을 보면 기도에 대한 말씀도 좀 특별합니다.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prayer”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자원해서 기도에 헌신한 것입니다. 누가 그런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새벽 기도하는 사람의 7가지 파워”라는 글입니다. 새벽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통제력이 있다 네요. 그리고, 삶의 우선 순위가 분명해 지고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삶에 꿈이 생기고요. 무서운 잠재력을 갖게 되고, 부지런해지고,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다 알아요.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기도를 힘들어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해도 힘들어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신 목적과 계획대로 이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끊어진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기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generosity입니다. ‘generosity’라는 말은 우리 말로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단순히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라는 말씀이 44절에 나오고요. 45절에는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옵니다. “And all the believers met together in one place and shared everything they had. They sold their property and possessions and shared the money with those in need.”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같이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며칠 전에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로 유명해진 이세돌 프로 기사에 대한 뉴스였습니다. 프로기사들이 소속된 기사협회에서 일률적으로 기사들의 수입의 몇 %를 떼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이세돌 같이 수입이 많은 기사는 돈을 많이 내게 됩니다. 일년에 3,000만원 정도 내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세돌이 이 제도는 부당하다고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떼어가고 협회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전 프로 바둑 기사협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착착해지더라고요. 이세돌 같은 사람은 3,000만원 협회비 내고도 엄청난 수입을 올립니다. 이번에 알파고와 대결할 때도 구글에서 엄청난 돈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협회 등록된 수많은 프로 기사들은 대전료가 적어서 생활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세돌에게 이런 동료들에 대한 generosity가 없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이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2,000년 전에 회개하고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어디까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의 삶의 목표가 어디까지인지, 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우리의 이기심을 이기고 자기의 것을 내 줄 수 있는지 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변화의 삶은 행동과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섯째로, ‘many miraculous signs and wonders’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자들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들이 생겼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이런 기적들이 생겼습니다. 신자들이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신자들 간에 교제가 일어나고, 기도에 힘쓰고, 자기 것을 내 주는 너그러운 마음들이 생겼을 때, 그 공동체 안에서 기적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싸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기뻐하신다는 싸인 아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그 교회의 주인이면 그렇다는 싸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 일하고 계시면 그렇다는 싸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섯째로, 2,000년 전의 회개하고 신앙공동체를 세웠던 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47절).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글리 크리스천들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개는 진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는 교회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경 속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 생활이 진실하다면, 오늘 우리의 회개가 진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회복 시키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