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2016 |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3:1-10
1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베드로> 어느 날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2 성전 문에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날마다 메고 와서 ‘아름다운 문’이라 부르는 성전 문에 앉혀 놓고,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게 하였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이 막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구걸을 하였습니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 사람을 눈여겨 본 후에,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5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은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6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8 그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9 모든 사람이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0 사람들은 그가 전부터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로 인해 크게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There is no rule without exceptions)”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예외가 있을까? 없을까?”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어떤 원칙이라고 할까요? 어떤 규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유능한 사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유능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보면 유능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은 예가 별로 없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평범하거나, 아니면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의 단점은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술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대중 앞에 서면 우물쭈물하고, 버벅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좀 유능하다 싶은 사람은 구약 시대에는 바벨로니아 포로 시대의 에스라, 느헤미야 정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 바울 정도입니다. 복음이 막 이방 세계로 퍼져 나갈 즈음에 하나님의 마음도 급하셨는지 바울 같은 사람을 픽업하셨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신 성분도 좋습니다. 순수한 히브리 사람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5). 그리고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의 가장 존경 받는 학자였던 가말리엘 (Gamaliel) 밑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2:3). 당연히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반대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결과적으로, 유대교에 대한 그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최종 선교지는 스페인이었습니다. 로마를 경유하여 스페인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읽고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내가 일할 만한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기를 원했으므로,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방문하여 잠시,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기쁨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으로 가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15: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now I have finished my work in these regions, and after all these long years of waiting, I am eager to visit you. I am planning to go to Spain, and when I do, I will stop off in Rome. And after I have enjoyed your fellowship for a little while, you can provide for my journey.”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 밖에 다른 일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의 일에 맞춰 있었습니다. 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은 바울 같은 사람을 그의 일에 픽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픽업하시는 규칙을 깨뜨리면서 예외적으로 바울을 픽업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길게 말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복음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사용하시는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한 사람, 그것도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한 사람, 이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의 공회 (Sanhedrin)가 열렸습니다. 그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리가 나은 이 사람이 함께 출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한번 복음을 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심문을 하려고 했던 공회원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치고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사건은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문의 Headline 뉴스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4:16).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사도행전 5:14).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타이밍에 이 사건을 복음 전파의 기폭제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단순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어마어마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사건과 견줄만한 사건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 (4일)이나 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려 내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왔고 (요한복음 12:9), 나사로 사건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한복음 11:45, 12: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도로 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 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7-18)
이제 좀 더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서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걷게 된 말씀이 주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번 기도합니다. 아침 9시와 오후 3시, 그리고 해 질 무렵, 이렇게 세 번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날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때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 33년에 돌아가셨다면, 이 사건도 같은 해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날, 태어날 때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 사람은 그날 ‘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 앞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모두 9개가 있었습니다. 북쪽에 4개, 남쪽에 4개, 동쪽에 1개, 이 동쪽에 난 문이 바로 ‘beautiful gate (아름다운 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문을 제일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막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Peter and John looked at him intently (베드로와 요한은 집중해서, 열심히 그를 바라 보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NKJV에는 ‘fixing his eyes on him (시선을 그에게 고정하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세요!” 이 말에 이 사람은 돈을 줄려고 하나보다 하고 두 사람을 쳐다 보았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오늘 말씀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물론 그 밑에 나오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세요” 이 말씀이 제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똑 바로 바라 보았고, 이 사람은 뭔가 이 사람들이 나에게 주려나 보다 하고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는 이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집중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전에 보이지 않던 말씀이 보였습니다. 일어나 걷게 된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특이한 말씀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병이 나은 사람이 자기를 낫게 해 준 사람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꽉 붙들지 않았더라면 옆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두 사람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사람들이 “뭐야? 무슨 일이야?” 하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을 알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이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언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런 말이 한번도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이 사람을 열심히 (intently) 뚫어지게 바라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했을 때, 이 사람은 돈을 주려나 하고 두 사람을 바라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평생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불쌍한 이 사람, 날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이 사람의 눈에서 두 사람은 낫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이 사람에게 준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주었습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게 있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세요.” (6절)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돈을 드리는 대신, 당신을 일어나 걷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나면서부터 한번도 일어나 걸어 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된 생생한 현장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9장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 (Bartimaeus)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해 주길 원하느냐?” “예, 주님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이 대화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은 거지였습니다. 앞을 볼 수 없으니까 정상적으로 살 수 없고,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요? 당장에 한 끼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돈이 필요합니다. 따뜻하게 지낼 옷이 필요합니다. 잠 잘 곳이 필요합니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해 보았습니다. 다시 시력을 회복하는 일은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다시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들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구해야 할 것은 다시 보는 것이고, 정말 구해야 할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인데, 몇 푼 돈을 구하고, 입을 옷을 구하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서 우리에게 연약함 (weakness)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연약함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26). 정말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이 연약함을 성령께서 도와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치기 쉽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서 낫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 두 사도가 이 사람 집중해서, 열심히 바라 본 이유입니다. 이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비록 이 사람은 돈을 주려나 하면서 두 사도를 보았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이 사람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40살이 넘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4:22).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쯤 되었으면 이제 걷는다는 희망은 포기할 때가 되었건만, 이 사람은 걷는다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은 그 이름이 자기를 낫게 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공회가 열렸습니다. 사도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신자들의 공동체는 더욱 견고해 졌습니다. 문제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알아서,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드는 믿음, 이 믿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 앞에 현실이 됩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보게 되고, 이름 때문에 우리가 일어나 걷게 된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