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2016 | 부활절 다섯째 주일
주님의 부탁 (The Lord's Request to Serve)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21:15-25
15 그들이 식사를 다 마쳤을 때,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 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여라.” 16 다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돌보아라.” 17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거의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여라. 18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는 네 혼자 힘으로 옷도 입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네가 팔을 벌리겠고 다른 사람이 네게 옷을 입힐 것이며, 다른 사람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 베드로가 뒤돌아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찬에서 예수님께 몸을 기댄 채 “주님,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던 제자였습니다. 21 베드로가 그 제자를 보고는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23 이 사건 때문에 이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형제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신 것뿐이었습니다. 24 이런 일들을 증언하고, 그것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5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른 일은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을 일일이 다 기록한다면 온 세상이라도 그것을 기록한 책을 담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쉬운성경)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와 예수님, 두 사람이 어색한 조우(遭遇)를 합니다. 조우라는 말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편에서 보면 주님과의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베드로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만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계획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은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마태복음 26: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재판을 받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스위스 화가 유진 버난드 (Eugène Burnand)가 그린 그림이 유명합니다. 그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두 제자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림 제목이 좀 깁니다.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Sepulchre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제임스 거니 (James Gurney)라는 사람이 이런 평을 썼습니다. “Burnand pointed out the complexity of emotions on each man. You can literally see their thoughts chasing across their faces—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on John’s face, and the hope against hope tempered with sorrow and regret on Peter’s face. In disbelieving shock, they run. Not knowing what they will find, they run. In hope against hope they run. They run (그는 두 사람의 감정의 복잡함을 그리려고 했다. 당신은 두 사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얼굴에서는 불안과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베드로의 얼굴에서는 슬픔과 후회로 뒤섞인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충격을 가지고 두 사람은 달렸다. 무덤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 채 그들은 달렸다. 결코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을 달리고 또 달렸다).”
여자들의 말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의 말대로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로 갔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고향에 돌아 온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같이 해변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식사하시는 이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은 똑 바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처음 확인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확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또 ‘시몬’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이 왜 나옵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성의 약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이라고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의 연약함에 대하여 이해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4:15 말씀을 알고 계시지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 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참 sympathy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sym’이라는 접두사는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pathy’는 ‘pathos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이 단어도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단순히 이해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연약함을 자신의 연약함처럼 느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베드로의 눈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난 너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로 걱정하지 말아라.”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로마서 8:1) 왜 그렇습니까?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s set you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of death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랑의 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틀에 얽매이지 않고 번역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지금까지 베드로를 묶고 있던 죄의식을 깨뜨리고, 베드로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탓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연약하다고요? 그래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 했다고요? 누가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 번이 아니라 수 백 번도 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나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죄의식이 있나요? 이 guilty feeling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내적 치유 세미나 이런데 좇아 다니는 사람들 있습니다. 제가 그런 세미나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세미나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무슨 technique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저는 치유되지 않고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많은 증상들을 유발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병원에서는 원목 (chaplain)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심리치료요법들 (psychotherapies)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My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마가복음 2:5, NASB)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때,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자유함’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물질로부터의 자유함, 명예와 권력에 대한 자유함, 그리고 관계로부터의 자유함이 없이는 올바른 사역자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까 제임스 거니 (James Gurney)의 그림 해석을 들었잖아요?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다릅니다.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니, 설마 그런 일이 있을라고? 그렇다면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이런 얼굴이었습니다. 제임스 거니가 이렇게 표현 했잖아요? ‘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on John’s face’라고요. 그런데, 베드로의 얼굴은 또 달랐습니다. ‘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tempered with sorrow and regret on Peter’s face’라고요. 이런 베드로를 그냥 내버려뒀더라면, 그는 평생 슬픔과 후회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guilty feeling’입니다.
주님과 베드로가 주고 받은 대화를 한번 들어 보세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Yes, Lord, you know I love you).” “그렇다면 됐다. 내 양을 먹여라 (Then feed my lambs)!” 그 뒤에 조금씩 뉘앙스가 다르게 “내 양을 돌보아라 (Then take care of my sheep)” “Then feed my sheep” 이렇게도 나와 있지만 이 말의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거의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해서 하셨는데, 세 번째 물으셨을 때는 베드로가 거의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17절)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ter was hurt that Jesus asked the question a third time. He said,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hen feed my sheep.’” 이 모든 과정은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돌보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을, 이제 제자 베드로 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베드로만 주님의 용서를 받고, 베드로만 주님이 받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이 용서해 주셨고, 우리도 주님이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돌보고,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탁은 섬김의 삶에 대한 부탁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 것처럼, 나의 제자들인 너희는 내 양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 양 (my lamb, my sheep)’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하는 양은 우리 (fence) 안에 얌전하게 들어 있는 착한 양들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친구가 없고, 대화 상대가 없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 ‘나의 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하고 많이 달라요. 우리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착한 양들에게 가고 싶은데,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인다’는 뜻을 가진 ‘feed’라는 단어가 엄마가 아기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뜻이 있잖아요? 저는 교회 식사 시간에 엄마들이 숟가락에 밥을 떠서 아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먹여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요? 그렇게라도 먹어야 아이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 주변에 있는 나의 어린양들 (my lambs)을 그런 마음으로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탁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우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베드로의 경우처럼, 우리가 회복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되는 것이 사역보다 먼저입니다. 내 양을 섬기라는 주님의 부탁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하는 이유는 평생 주님과의 관계 회복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섬기는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1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일에 준비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평소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준비된 사람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