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2016 | 성령강림절 후 일곱번째 주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The Case of Ananias and Sapphira)
김태환 목사
사도행전 5:1-11
1 아나니아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삽비라도 자기들의 땅 일부분을 팔았습니다.
2 아나니아는 땅을 판 돈에서 얼마를 떼어 몰래 숨겨 놓고, 나머지만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런 내막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3 그 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여, 어찌하여 사탄이 그대의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을 팔아 받은 돈 가운데 얼마를 떼어 놓았소?
4 그 땅은 팔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성령을 속일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5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자마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6 젊은이 몇 사람이 들어와 그의 시체를 싸서, 밖으로 메고 나가 묻었습니다.
7 세 시간쯤 지나서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습니다. 삽비라는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8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남편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서 받은 돈이 이것뿐이오?” 삽비라는 “예,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9 베드로가 다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와 그대의 남편은 서로 짜고 주님의 성령을 시험할 수 있단 말이오?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장사지내고 온 사람들이 문 앞에 있으니, 그들이 그대를 메고 나갈 것이오.”
10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삽비라는 베드로 앞에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그 순간 젊은이들이 들어와 삽비라가 죽은 것을 보고, 그녀를 밖으로 메고 나가 남편 곁에 묻었습니다.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지금 우리는 A.D. 1세기 초에,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두 가지 일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18)”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일종의 wordplay같은 느낌이 듭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 (Simon)’이었습니다. “그가 들었다 (He has heared)”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영어로는 ‘피터 (Peter)’라고 하지만, 원래는 그릭 (Greek) 이름입니다. ‘Πετρος (페트로스)’입니다. ‘stone (돌,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람어로는 게바 (Cephas)입니다. 역시 ‘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반석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신 베드로는 교회의 큰 지도자가 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누가복음 24:49)”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제자들은 모두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가 나와 있습니다. 그 설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시민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여러분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사도행전 2:14)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같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같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이 물건을 필요한대로 나누어 썼습니다. 자기들의 property, possessions, money, 이런 것들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re were no needy people among them, because those who owned land or houses would sell them and bring the money to the apostles to give to those in need.” (사도행전 4:34-35)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사도들에게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에, 주목할만한 두 가지 사건이 터집니다. 하나는,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 하나가 일어난 걷게 된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 앞에 앉아서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소문이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 사람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12, 16) 꼭 이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그 수가 5,000 명 정도나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4)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그 사건이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이나, 집이나, 소유물, 돈을 자발적으로 사도들에게 가져 오는 중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말씀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하지요? 정상적인 우리의 판단이나, 이성이나 판단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기는 합니다. 이단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manipulate합니다.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아 넘어가도록 작업을 해서 재산을 바치고, 돈을 바치도록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판단으로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분명히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 속에 함께 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And each day the Lord added to their fellowship those who were being saved).” (사도행전 2:47)
여러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no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with God)." (마가복음 10:27) 우리들의 생각과 우리들의 경험과 우리들의 판단으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속에 개입하시면,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보면서 늘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맞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런 일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성경은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씀 하잖아요? 베드로와 요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을 낫게 한 능력은 우리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property를 팔아서, 자기 possessions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이 일을 맨 처음으로 했던 사람은 바나바 (Barnab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지난 주 설교 때 장석재 목사님께서 바나바에 대한 설교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나마 바나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고요. 키프러스 (Cyprus)라는 지중해 연안의 섬 출신입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이었고요. 바나바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말씀은 사도행전 11:24 말씀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And many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바나바가 ‘good man’이었다는 말도 인상 깊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He was full of the Holy Spirit’이 말씀이 바나바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판단이나 자기 자신의 욕심이나, 자기 자신의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바나바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처음 기초를 놓는 과정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을 크게 사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의 교회가 교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바나바 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러스에 있는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하니까 너도 나도 자기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가 가진 땅 중에 얼마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땅을 판 돈 중에 또 얼마를 떼어 숨겨 놓고, 나머지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ith his wife's consent, he kept the rest.” “자기 아내의 동의 하에 그는 나머지 돈을 따로 보관했다.”
이 부부의 불행한 말로(末路)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성령을 속입니까? 그대가 땅을 판 돈을 떼어 놓고 일부를 가져 온 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5:3-4)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삽비라가 그 자리에 왔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남편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서 받은 돈이 이것뿐이오?” 삽비라는 “예,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가 삽비라를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서로 짜고 주님의 성령을 시험할 수 있단 말이오?” 이 책망을 듣고 삽비라도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네요. “How could the two of you even think of conspiring to test the Spirit of the Lord like this?” “어떻게 당신들 두 사람은 성령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렇게 음모를 꾸밀 수가 있습니까?”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불과 몇 분 간격으로 죽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 늘 좋은 일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재산을 팔아서 모두 헌금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헌금할 때 정직하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 수 있는 단서(端緖)가 있습니다. 5절에 있는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이 말씀과, 11절에 나오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Great fear gripped the entire church and everyone else who heard what had happened)”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fear’라는 단어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 사전에 보면 ‘reverential awe, especially toward God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 부부가 한 자리에서 죽은 이 끔찍한 일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두려움이었습니다. “아,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이 교회, 우리 공동체를 움직이고 계시는구나!” “우리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순이 잘 나가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런 하나님을 향한 두려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려운 마음 때문에 우리가 주고 받는 말들이 진실해야 하고, 우리의 행동이 정직해야 하고,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하여 신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대변(代辨)하는 말씀이 되어야 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야 하지 아니겠습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코람 데오 (Coram Deo)’라는 말을 사용해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영어로 하면 ‘before God’ ‘in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운행하고 계신다는 거룩한 두려움이 우리 가운데 회복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