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5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어라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12:1-11
1 유월절 육 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그 사람입니다. 2 그 집 사람들은 예수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3 마리아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습니다. 4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사람 유다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말했습니다. 5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 6 그러나 유다가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종종 돈주머니에서 돈을 제 마음대로 꺼내 쓰곤 하였습니다. 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마리아는 내 장례를 치를 날을 위해 이 향유를 준비해 둔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크게 무리를 지어 그 곳으로 왔습니다. 10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11 이렇게 그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celebration began, Jesus arrived in Bethany, the home of Lazarus--the man he had raised from the dead. 2 A dinner was prepared in Jesus' honor. Martha served, and Lazarus was among those who ate① with him. / ①Or who reclined 3 Then Mary took a twelve-ounce jar① of expensive perfume made from essence of nard, and she anointed Jesus' feet with it, wiping his feet with her hair.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 ①Greek took 1 litra [327 grams] 4 But Judas Iscariot, the disciple who would soon betray him, said, 5 "That perfume was worth a year's wages①. It should have been sold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 ①Greek worth 300 denarii. A denarius was equivalent to a laborer's full day's wage 6 Not that he cared for the poor--he was a thief, and since he was in charge of the disciples' money, he often stole some for himself. 7 Jesus replied, "Leave her alone. She did this in preparation for my burial. 8 You will always have the poor among you,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9 When all the people heard of Jesus' arrival, they flocked to see him and also to see Lazarus, the man Jesus had raised from the dead. 10 Then the leading priests decided to kill Lazarus, too, 11 for it was because of him that many of the people had deserted them① and believed in Jesus. / ①Or had deserted their traditions; Greek reads had deserted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말씀을 전체 문맥 상황 속에서 읽고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말씀만 따로 떼서 읽는 것입니다. 뭐 이렇게 읽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말씀을 전혀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 가져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매님, 여기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고 말씀을 딱 읽어 주면 대부분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 문맥에서 읽고 내용을 파악하면 그럴 위험성은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경우가 딱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가복음 버전 (누가복음 10장)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옆에 앉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접대하는 일을 했고, 마리아는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봉사하고 일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귀하다고 해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잘못하면 노동과 봉사를 경시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지금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분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열심히 예수님 일행을 접대한다고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마르다는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이네요? 모두 말씀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도 문제 아닌가요? 하나님의 일에는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을 말입니다만, 수도사들은 일을 기도라고 생각한다고 하네요. 강원도 태백산에 있는 예수원에 가면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다.” 이런 글귀가 예배당 양 옆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해석할 때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잘했다, 잘못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인 문맥과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한 마르다의 행동이 예수님께 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198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에 왔습니다. 사모님도 같이요. 그 때는 지금처럼 비행 시간이 짧지 않았습니다. 직항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개는 어디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갔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저는 무슨 비행기를 탔는지 지금 기억이 없습니다. 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일본을 경유했습니다. 한국인 승무원이 없었던 것을 보면 미국 비행기였던 것 같습니다. 전 그 때만해도 비행기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정말 없었습니다. 신혼여행 때 제주도에 갔다 온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조금 가져 갔는데, 그 돈을 작은 가방에 넣었습니다. 누가 훔쳐갈까봐 잠도 자지 않았고, 화장실로 안 갔던 것 같습니다. 매우 긴장했습니다. 일본 공항에서 4-5시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미국 비행기를 타고 LA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 잠도 안 자고요. 화장실도 한번 안 가고요. 무릎 위에 가방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계속하겠어요. 공항에 내려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계획이 없었습니다.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그러잖아요?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거든. 계획은 세워봤자 틀어지기만 해.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고. 무슨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지.” 정말 이 대사처럼 저희는 공항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 때 가서 어떻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오는 데다 계획마저 없으니 스트레스는 많이 받았겠지요. 더 많이 피곤하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공항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연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미국에 오도록 주선해 주신 분인데요. 캘리포니아 한국 간호사협회 회장 직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나와 있다가 우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 부부는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그분 차를 타고 가서 그분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이 좋더라고요. 저희 두 사람을 위해서 이 분이 터키를 구워 놓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웠으니까 터키를 구워 놓은 모양입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 진 것이 맛이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한 점 딱 먹었는데, 입에 안 받는 것입니다. 너무 피곤했고 긴장이 풀렸는지 딱 한 점 먹었는데, 더 이상은 못 먹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분도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피곤한 사람들이 입 맛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 분도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분이 잘못한 것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터키를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 못한 것입니다. 이 분의 정성은 고마웠지만, 입에서 안 받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만든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맛있게 잘 먹었어야 했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 말씀을 전체 문맥과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 도착한 것은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누가복음 19:28)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0:32-34) 32절만 영어 성경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They were now on the way up to Jerusalem, and Jesus was walking ahead of them.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awe, and the people following behind were overwhelmed with fear. Taking the twelve disciples aside, Jesus once more began to describe everything that was about to happen to him.” 이 말씀이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분위기였습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문맥과 상황은 1절에 있는 “유월절 육 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celebration began, Jesus arrived in Bethany, the home of Lazarus--the man he had raised from the dead)” 이 말씀입니다. ‘유월절 육일 전에’ 이 말씀을 이해해야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육일 남았을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베다니에 오시면서도 제자들보다 앞서 걸으셨고, 예수님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음식을 좋아합니다. 잘 먹어요. 그런데, 그 때는 너무 긴장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고, 또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터키였고요. 그래서 못 먹었습니다. 안 먹혀요. 예수님은 그 때 어땠을까요? 그 때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 만들어서 예수님을 대접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요. 누가복음 버전 (누가복음 10:38-42)에는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가만이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매우 비싼 나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위의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바닥에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 alabaster jar)이 깨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그림 밑에 이런 글이 씌여 있습니다. “My Alabaster Jar..... It’s Mine for the Breaking.....” “내 옥합인데..... 깨뜨리기 위한 나의 옥합입니다” 이런 글이 씌여 있습니다. 뭔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옥합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옥합을 평생 깨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언젠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옥하바은 무엇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for keeping or for breaking?’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전 여러분이 언젠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깨뜨리기 위해서 옥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 하지만, 마태복음 버전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성경에 보면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다 마리아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6:8). 자, 그러면 여러분이 잘 아는 누가복음 버전과 요한복음 버전을 다시 한번 비교해 보시지요. 누가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저녁 준비로 바빴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고,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행동은 두 버전이 똑 같고요. 마리아의 행동은 향유를 붓는 것으로, 또 가만히 예수님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르다와는 다른 행동 양식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보세요. 마르다와 마리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가 준비하고 있던 식사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의 행동에 더 예수님께 위로가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예수님께서 별로 식사에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터키를 구워 주신 분같이요. 그분은 최선을 다해서 터키를 구워 저를 잘 대접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상황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에게 큰 실례를 한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버전에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고요 (누가복음 10:42).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서는 마리아는 나의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행동을 성경에서는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어로, ‘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고요. 좀더 전문적인 말로는 ‘discernment,’ 혹은 ‘insigh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 종에게 다른 종들을 맡기면, 제 때에 양식을 나누어 줄 일꾼이 누구겠느냐?” (누가복음 12:4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faithful, sensible servant is one to whom the master can give the responsibility of managing his other household servants and feeding them.”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sensibilities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