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2020 | In Times Of Trouble 19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
김태환 목사
로마서 5:1-9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3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4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5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의 적절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선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쉬운성경)
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because of what Jesus Christ our Lord has done for us. 2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and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3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4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5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 6 When we were utterly helpless, Christ came at just the right time and died for us sinners. 7 Now, most people would not be willing to die for an upright person, though someone might perhaps be willing to die for a person who is especially good. 8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9 And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the blood of Christ, he will certain-ly save us from God's condemnation.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19’ 시간으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말합니다.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은 ‘because of our faith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하나를 고른다면 ‘믿음 (faith)’라는 말이 아닐까요? 복음서에 ‘믿음’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중풍병으로 고통받는 자기 종의 병을 고쳐 달라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 (Go back home. Because you believed, it has happened).” (마태복음 8:13)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에게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9:22) 왜 기도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이 말씀 카드들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alive (살아 있고)’ and ‘active (활동적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omnipotent God), 전지하신 하나님 (omniscient God),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 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어찌 평범한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믿음’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doctrinally)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척 프리만 (Rev. Chuck Freeman)이라는 분이 ‘HUFFPOST’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Noun faith’ is a form of mind control. It produces consumers. However, ‘Verb faith’ paints a starkly contrasting portrait. ‘Verb faith’ produces active, engaged citizens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명사로서의 믿음’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과 같아서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동사로서의 믿음’은 이와 대조적으로 활동적인 시민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천국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삶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 있고, 활동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consumers (소비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하는 건전한 ‘시민 (citizens)’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Chuck Freeman 목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those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면, 지금 우리는 엄청난 특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는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지금 2020년 8월 16일 현장예배에, 혹은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 속에는 온갖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앉아 있는 자리입니까? 집에서 컴퓨터를 켜 놓고 영상으로 예배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특별한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였더니, 그 은혜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Because of our faith)’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그 일의 대가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어마무시하다’는 말을 합니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 ‘어마무시한’ 일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8절)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별 느낌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렇고, 교회에 가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게 이해는 하고 있지만 내가 왜 ‘죄인’인지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죄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들어 보시겠습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들 (values)’과 ‘목표 (goals)’가 달라서 서로 부딪게 되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로마서 5:10)’라고 합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원수였다고요. 그 때 우리는 몰랐지만, 우리는 ‘전능자’와 원수가 되어 ‘전능자’와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전능자’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12 말씀이 그 때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자손도 아니며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In those days you were living apart from Christ. You were excluded from citizenship among the people of Israel, and you did not know the covenant promises God had made to them. You lived in this world without God and without hope)?”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 (ransom)’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아무나 다 아들로 받아 주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요한복음 3:16)’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팀 (God’s team)’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 프로 야구 좋아하는 분들 많이 계시지요? 한국의 류현진이라는 투수가 캐나다 토론토의 ‘블루 제이스 (Tronto Blue Jays)’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에 LA 다저스 (Dodgers)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LA와 계약이 끝나게 되어 어느 팀으로 갈 것인지 말이 많았습니다. 류현진이 좋은 투수이긴 하지만 나이도 많고 부상도 많아서 선뜻 나서는 팀이 없는 상황에서 투수 진을 보강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던 캐나다의 ‘블루 제이스’와 4년간 8,000만 달러 (한화로 930억원)를 받기로 하고 계약했습니다. 연봉 순위가 전체 메이저 리그 선수들 중에서 41위라고 합니다. ‘블루 제이스’에서는 엄청난 투수가 오게 되었다고, 류현진에 대한 어마어마한 마켓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막전에서 류현진이 그리 좋은 피칭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만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피드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안타를 많이 허용했습니다. 류현진으로서는 뭔가 자기의 진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많아서인지 두 번째 게임에 나가서도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세 번째 게임에서는 이기고, 네 번째 ‘마이애미’와의 게임에서 승리 투수는 못되었지만 한 점 밖에 내 주지 않을 정도로 잘 던졌습니다.
제가 류현진이라는 아구선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류현진은 자기를 데려간 ‘블루 제이스’에게 자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투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적으로 지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뽑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를 잘 뽑으셨다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아직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해서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1절) 이 말씀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팀’ 안에서 ‘as undeserved people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류현진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 나가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 생활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이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여기 ‘stand’라는 말은 단순히 ‘서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확실하다’ ‘견고하다 (firm)’ ‘굳건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외부의 어떤 상황이나 압박이나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2-4절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상황만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의 좌표(座標)를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