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2020 | In Times Of Trouble 24
고난 받는 것이 나에게는 유익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김태환 목사
시편 119:65-72
65 [테트] 주의 종에게 선을 베풀어 주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에 따라 선을 베풀어 주소서. 66 내게 지식과 선한 판단에 대해 가르쳐 주소서. 이는 내가 주의 명령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67 고난받기 전에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갔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68 주는 선하시고, 주가 하는 일도 선하십니다. 저에게 주의 법령들을 가르쳐 주소서. 69 비록 교만한 자들이 거짓말로 나를 더럽혔어도, 나는 마음을 다해 주의 교훈들을 지킵니다. 70 그들의 마음은 차디차고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법을 기뻐합니다. 71 고난받는 것이 내게는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법령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2 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내게 더욱 귀중합니다. 수천 개의 은과 금보다 더욱 귀중합니다. (쉬운성경)
65 [Teth] You have done many good things for me, Lord, just as you promised. 66 I believe in your commands; now teach me good judgment and knowledge. 67 I used to wander off until you disciplined me; but now I closely follow your word. 68 You are good and do only good; teach me your decrees. 69 Arrogant people smear me with lies, but in truth I obey your commandments with all my heart. 70 Their hearts are dull and stupid, but I delight in your instructions. 71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72 Your instructions are more valuable to me than millions in gold and silver. (New Living Traslation)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119:65-72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은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시편입니다. 우선 길이가 무척 깁니다. 무려 176절까지 있습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그가 ‘율법 (law)’이라는 말을 각각 다른 말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율례 (statutes)’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말씀 (word)’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법령 (decree)’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명령 (commands)’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계명 (commandments)’이라고 말하고, 그 외에도 ‘증거 (statutes)’ ‘규례 (regulations)’ ‘교훈 (teachings)’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편 119편은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아주 독특합니다. 히브리어의 자음 (consonants)은 모두 22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자음 하나마다 8절씩 22개 연 (stanza)으로 시편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각 ‘연’의 8절은 모두 같은 자음으로 시작하도록 이 시편을 구성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편 119편은 아주 독특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9번째 자음 ‘ט(테트)’로 시작되는 ‘연’입니다. 그러니까 8절 말씀이 모두 ‘테트’로 시작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난’이라는 말은 주로 ‘suffering’이라고 번역할 때가 많지만, 이와 비슷한 말로 ‘affliction (고통)’ ‘troubles (근심)’ ‘difficulties (어려움)’ ‘hardship (힘든 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주의 종에게 선을 베풀어 주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에 따라 선을 베풀어 주소서 (You have done many good things for me, Lord, just as you promised) (65절)”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You have dealt well with Your servant, O LORD, according to Your word (당신의 종을 당신의 말씀에 따라 잘 대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또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은 이 말씀을 “LORD, You have treated Your servant well, just as You promised”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은 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대로 저를 선하게 잘 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65절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과 신뢰가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1983년에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때 조금이라고 돈을 절약하려고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일본 공항에서 악 5-6시간을 대기하다가 다시 비행기를 탔습니다. 정말 마음이 불안하고 막막했습니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누구 하나 공항에 마중 나올 사람도 없는데, 공항에 내리면 어디로 갈 것인가?”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저는 창세기 12:1-4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렇지? 아브람도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으로 갔지?” 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염려를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저의 이런 경험이 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고난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고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69-70절 말씀을 보면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말로 나를 더럽혔어도, 나는 마음을 다해 주의 교훈들을 지킵니다. 그들의 마음은 차디차고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법을 기뻐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만하고’ ‘마음이 차디차고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들 (their hearts are dull and stupid)’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더럽혔다’고 하는데, 이 말은 ‘짓뭉갰다 (smear)’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아무 짓뭉개서 내 인생을 망쳐 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이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 놓았지만, 나는 마음을 다해 주의 교훈들을 지키고, 나는 주의 법을 기뻐합니다.” 놀랍게도 자기의 원수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말씀을 공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말씀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we also have had the gospel preached to us, just as they did; but the message they heard was of no value to them, because those who heard did not combine it with faith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2, NIV) 말씀을 듣고 배웠으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 119편 본문 말씀에서 이런 교훈을 받습니다.
이 시편 저자에게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67절, 71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고난 받기 전에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갔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67절).....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는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법령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0절).” 67절 말씀과 71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면 이런 말씀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으면서 주의 말씀을 읽게 되고, 주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바른 길을 찾았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고난 받은 것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참고 견디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고난이 오히려 좋았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저는 이 시편 저자의 말을 묵상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편 저자의 말 대로 한다면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는 좋았습니다. 이 상황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까? 다들 답답해하고 어서 이 상황이 끝나서 6개월 전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 1976- 이스라엘) 같은 학자는 지금이야말로 과거에 못다한 개혁을 완수할 때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준 유익이 참 많습니다. 첫째로, 이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지식과 과학의 힘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은 백신 개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의 피해를 제일 많이 본 나라들은 아이러닉 하게도 발달된 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입니다.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본 나라들은 저들보다 의료 시스템이 뒤떨어진 아시아 국가들입니다. 이들은 열악한 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국민들과 소통하고 국민들의 협력을 얻음으로써 코로나 사태를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높은 가치로 내세우는 나라들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검사를 받거나 마스크를 착용을 강요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국가들은 대부분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검사를 받고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불평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셋째로, 교회에 대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이런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교회 현장 예배가 온라인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모이는 대신 집에서, 여럿이 아니라 혼자서, 혹은 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한 장소에 모여 큰 교회를 자랑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 대신 가정이 교회가 되고,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되고, 이제는 개인 개인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로,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도 건강합니다. 내가 감염이 되면 내 주변 사람들도 감염이 됩니다. 우리에게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고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동식물을 남획하는 것은 곧 사람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에게 기생하는 바이러스가 중간 숙주 ‘천산갑’을 통하여 인간의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몸에 좋다고, 건강에 좋다고, 야생동물들을 마구 남획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앰허스트 (Amhurst)에 있는 한 목사님이 동영상을 보내왔습니다. 요즘엔 동네에 곰들이 많이 돌아다닌다고 하면서 집 뜰에까지 들어온 곰을 찍어 보냈습니다. 그리고 전에 안 보이던 이름 모를 새들도 많이 보인다고 또 동영상을 찍어 보냈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줄어 드니까 공기도 맑아지고, 자연도 회복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세계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별적으로 흘리는 리더십, 고집 불통의 리더십은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반면에, 투명하고, 민주적이고, 대중과 소통하는 리더십, 그리고 전문가들의 말을 존중하는 리더십이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다섯 가지 정도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유익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가만히 이것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 창조의 모습대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worm’s-eye view’로 보면 답답하고 짜증나고, 우울하기만 한데, ‘bird’s-eye view’로 보면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8년이나 포로로 잡혀 있다가 극적으로 생환(生還)할 수 있었던 제임스 스톡데일 (James Bond Stockdale, 1923-2005, 미국 해군) 대령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8년이라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중에 곧 풀려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겨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부활절까지는 석방되겠지!” 이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기약 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상심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기약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버텨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극적인 현실을 눈감고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톡데일 대령의 경험담은 ‘스톡데일의 역설 (The Stockdale Paradox)’이라는 말로 심리학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현실이 힘들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근거 없는 무조건적인 긍정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해가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긍정(肯定. positive)’이라는 말은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FKCC 교우 여러분, 지금 이 시간이 많이 어렵고 힘들지요?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칼 메닝거 (Karl Menninger, 1893-1990, 미국)라는 정신분석학자는 “Attitudes are more important than facts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창의적으로 이겨 나가도록 하십시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간의 시간을 중지시키고 하나님의 시간을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