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2020 | 추수감사주일 /In Times Of Trouble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Troubles)
김태환 목사
시편 116:1-14
1 나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도와 달라는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2 주께서 내게 귀를 기울이셨으므로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를 부를 것입니다. 3 죽음의 밧줄이 나를 옭아맸으며, 무덤의 고통이 나를 덮쳤습니다. 나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억눌려 있었습니다. 4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올바른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6 여호와는 순진한 자들을 보호하시며 내가 큰 위험에 빠졌을 때,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7 오 나의 영혼아, 이제 편히 쉬어라. 이는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나에게 선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8 주는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 내셨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셨으며, 나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9 이제 내가 여호와 앞에서 걸을 수 있고,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 나는 굳게 믿고 말했습니다. “나는 큰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11 또 나는 실망 가운데서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12 여호와께서 나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호와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13 나는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14 나는 여호와께 드린 나의 맹세를 지킬 것입니다.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약속을 이룰 것입니다. (쉬운성경)
1 I love the Lord because he hears my voice and my prayer for mercy. 2 Because he bends down to listen, I will pray as long as I have breath! 3 Death wrapped its ropes around me; the terrors of the grave① overtook me. I saw only trouble and sorrow. / ①Hebrew of Sheol 4 Then I called on the name of the Lord. “Please, Lord, save me!” 5 How kind the Lord is! How good he is! So merciful, this God of ours! 6 The Lord protects those of childlike faith; I was facing death, and he saved me. 7 Let my soul be at rest again, for the Lord has been good to me. 8 He has saved me from death, my eyes from tears, my feet from stumbling. 9 And so I walk in the Lord’s presence as I live here on earth! 10 I believed in you, so I said, “I am deeply troubled, Lord.” 11 In my anxiety I cried out to you, “These people are all liars!” 12 What can I offer the Lord for all he has done for me? 13 I will lift up the cup of salvation and praise the Lord’s name for saving me. 14 I will keep my promises to the Lord in the presence of all his people.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go into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시편 100:4)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감사와 찬송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와 찬송’을 예수님의 버전으로 말한다면 ‘신령과 진정 (in spirit and in truth, 요한복음 4:24)’이라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같이 나눌 말씀은 시편 116편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도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사미스트 (psalmist)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1절) “주께서 도와 달라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1절) “주께서 나에게 귀를 기울이셨으므로 (Because he bends down to listen)” (2절) 상대방의 말이 잘 들리지 않으면 상대방 쪽으로 몸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우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표현입니다. “주는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 내셨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셨으며, 나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8절) 참 이 사미스트가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낯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내가 부르짖고 하소연하면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정말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견고한 삶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고 있으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금방 도와 달라는 기도가 입에서 나옵니다. 며칠 전에 한국에 있는 어느 청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OOO입니다. 평상시 연락 잘 안 하다가 필요할 때만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청년이 보스턴에 있을 때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메일을 쓰지 않고 보다 친숙한 말로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an intimate relationship)’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일이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가 어색하고 힘이 듭니다. 이 ‘친밀한 관계’를 우리는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라고 하기도 하고 ‘친밀한 교제 (a close fellowship)’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노아 (Noah)’에 대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is is the account of Noah and his family.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창세기 6:9) 그 때 땅 위에 사는 사람 중에 노아 한 사람만이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2016년 5월 26일, 영화 감독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현재)가 하바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저는 그의 연설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 간의 증오, 계급 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가 있습니다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And there’s racism, homophobia, ethnic hatred, class hatred, there’s political hatred, and there’s religious hatred).” 그는 졸업생들을 이 시대를 살아갈 영웅들이라고 했습니다. 영웅의 화살통에는 사랑과 지원, 용기와 직관이라는 화살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영웅에게는 당연히 무찌를 악당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스필버그의 연설을 특별한 연설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무찌를 악당들이 많기 때문에 스필버그는 졸업생들에게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악당이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힘든 일이 없고,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잘 되는 세상을 원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고, 풍랑이 일어나지 않는 편안한 세상을 원합니다. 그런데, 스필버그의 연설은 다르지 않습니까? 악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운이 좋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는데, 스필버그의 연설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누가복음 8:23-25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깐 배 안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 사이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호수를 내리쳤습니다.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면서 금방이라도 배가 침몰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잠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즉시 바람이 멈추고 호수는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faith)?”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는 바람이 없고 잔잔한 호수 같은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한번 발상을 전환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미친 바람이 불고 거센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기회입니다. 광풍과 풍랑은 우리의 믿음이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예배입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면서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 추수 감사 예배입니다. 예전 교인들은 추수 감사 헌금을 추수한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추수 감사절이 되면 부자들은 교회에 올 때 소달구지에 쌀을 가마니로 싣고 와서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올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답답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활동이 제한되어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다 보니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팬데믹 (pandemic)’ 현상으로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추수감사절 예배라니...... 우리에게 무슨 감사할 것이 있을까요? 우리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과 실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지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의 믿음생활의 초점이 교회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예배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든 일주일을 버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이 패턴이 깨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음생활의 초점이 교회가 아니라 가정으로, 직장으로, 실험실로, 비지니스 현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교회가 되어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설교해도 안 되던 일들이,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 (Puritans)이 ‘플리머스 (Plymouth)’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케이프 코드 (Cape Cod)’에 정박을 하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아서 그곳에 내리지 못하고 ‘플리머스’ 쪽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영국에서 출발했던 항구 이름이 Plymouth였다) 지금 ‘플리머스’에 가면 그들이 내렸던 장소에 ‘1620’이라고 새겨진 ‘플리머스 락 (Plymouth Rock)’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타고 왔던 ‘Mayflower’는 고장 난 곳을 수리하고 며칠 후에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선장이 이곳은 살 곳이 못되니 같이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영국 국교인 ‘앵글리칸 처치 (Anglican Church or Episcopal Church)’의 폐단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형식과 권위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 대로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102명 중 41명이 ‘청교도 분리주의자들 (the Puritan Separatists)’이었고, 나머지 61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strangers)’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이들 중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행여나 이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알게 되면 호전적인 인디언들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모든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하는 감사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 있는 사람이 드리는 감사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드리는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드리는 감사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드린 감사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 ‘세겜’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12:7). 하지만, 그 땅에는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다시 식구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야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하박국의 감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고,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드렸던 감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였습니다 (사도행전 16:25).
시편 116편을 쓴 사미스트는 죽음의 밧줄이 그를 옭아맸고, 무덤의 고통이 그를 덮쳤다고 합니다 (3절).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I believed in you, so I said, ‘I am deeply troubled, Lord (나는 주님을 신뢰했기에 ‘주님 저는 지금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I believed in you”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I believed in you”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크리스천이 받는 고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감사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미국 생활에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왜 이렇게 말 끝마다 “Thank you”가 많습니까? 심지어 벌금을 내면서도 “Thank you”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감사절이 시작한 나라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디를 급히 가다가 무심코 뒤를 봤더니 경찰 차가 정지 신호를 보내면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차를 세웠더니 까만 선글래스를 쓴 키가 큰 무섭게 생긴 경찰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창문을 내리고 그 날 따라 왜 그랬는지 “Thank you!”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이 “Thank you? For What?” 하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Thank you for giving me a ticket”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경찰이 저를 잠시 바라보더니 “Ok, you go. Be careful next time” 하면서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그 경찰에게 “Thank you” 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보스턴은 감사의 도시입니다. 여기서 추수 감사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의 피 속에 믿음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이 DNA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호와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12절) 우리에게 단 한 순간도 감사의 이유가 없는 순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