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2020 | 대강절 둘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5
새 날이 온다 (New Days Are Coming)
김태환 목사
이사야 9:1-7
1 고통의 땅에 그늘이 걷힐 것이다. 옛날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셨다. 하지만 앞으로는 지중해로 나가는 길과 요단 강 건너편, 그리고 북쪽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외국인이 살고 있는 갈릴리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2 어둠 속에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짙은 그늘의 땅에 살던 백성에게 환한 빛이 비췰 것이다. 3 “하나님, 주께서 그 민족을 크게 하시고, 그 백성을 행복하게 하십니다. 추수할 때에 사람들이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나누는 백성처럼 기뻐합니다.” 4 주께서 미디안을 물리치시던 때처럼 그들이 진 무거운 멍에를 내려 주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막대기를 벗겨 주시며, 주의 백성을 치던 몽둥이를 없애 주실 것이다. 5 군인들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신고 다니던 군화와 피로 얼룩진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 불에 사라질 것이다. 6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7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나라에서 다스릴 것이다. 그가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쉬운성경)
1 Nevertheless, that time of darkness and despair will not go on forever. The land of Zebulun and Naphtali will be humbled, but there will be a time in the future when Galilee of the Gentiles, which lies along the road that runs between the Jordan and the sea, will be filled with glory. 2 The people who walk in darkness will see a great light. For those who live in a land of deep darkness①, a light will shine. ①Greek version reads a land where death casts its shadow. 3 You will enlarge the nation of Israel, and its people will rejoice. They will rejoice before you as people rejoice at the harvest and like warriors dividing the plunder. 4 For you will break the yoke of their slavery and lift the heavy burden from their shoulders. You will break the oppressor’s rod, just as you did when you destroyed the army of Midian. 5 The boots of the warrior and the uniforms bloodstained by war will all be burned. They will be fuel for the fire. 6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The government will rest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7 His government and its peace will never end. He will rule with fairness and justice from the throne of his ancestor David for all eternity.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2개를 켰습니다. 전주에는 희망의 촛불을 켰고, 오늘은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희망이 생겼고,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구약성경은 말라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요. 구약 마지막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 400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시대(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두 약속의 중간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 중간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暗黑期)였습니다. 이 때에는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모스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이 땅을 주리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빵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다. 그 날에 아름다운 여자들 젊은 남자들이 목이 말라 지칠 것이다.” (아모스 8:11, 13) 물론 이 말씀은 아모스가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한 말이니까 중간기하고는 약 350년의 시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이 말씀은 신구약 중간기에 살던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는 흔한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늘 남편이 잘해 주면 아내는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을 만나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모릅니다.
신구약중간 시대가 그랬습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그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영적으로 고갈되었습니다. 지금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영혼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 절대로 소홀하게 여기면 안 되고요. 개인 기도에 힘써야 하고요. 성경읽기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적인 침체(a spiritual depression)’가 찾아오면 우리 삶에 어떤 힘든 일들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희랍어에 시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όνος, cronos)’라는 말인데요. 특별한 의미가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라는 말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결정적인 기회의 타이밍 (the right, critical or opportune timing)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때가 차매 (4:4)’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when the fulness of the time came(꽉 찬 시간이 되었을 때)’ 이런 뜻이거든요?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지쳐 있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카이로스’였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달래 주었고, 채워주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azement gripped the audience, and they began to discuss what had happened.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마가복음 1:27)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마태복음 4:13-16)마태는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삼으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marginal people(주변 인간들)’이 큰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전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통의 땅에 그늘이 걷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역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짙은 그늘의 땅에 살던 백성에게 환한 빛이 비췰 것이다.” (이사야 9:1-2)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원전 745-695년까지 약 50년간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All right then,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the sign. Look! The virgin①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이사야 7:14)/①Or young woman 이 말씀을 잘 보면, ‘virgin(동정녀)’이란 단어에 ‘young woman(젊은 여자)’이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알마(almah)’로 되어 있는 것을 70인 역에서 희랍어로 번역할 때 ‘파르테노스(Parthenos, 동정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virgin’이라는 말에 ‘young woman’이라는 주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동정녀 탄생이라니? 말도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동정녀’라는 말을 꼭 ‘virgin’으로 번역하지 않고 ‘young woman’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젊은 여자의 몸에서 내어 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런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인카네이션(incarnation)’의 교리,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한복음 1:14)”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대속(代贖)의 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는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이 교리를 지켜오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는 말씀인데요. “The children of God are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이는 혈통으로도 아니고, 인간의 결정으로도 아니고, 남편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태어나듯이 예수님의 탄생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다윗의 가문을 선택하신 것뿐입니다. 인간의 결정에 따라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의미입니다.
지난 주간에 C. S. Lewis(1989-1963, 영국)의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루이스는 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the Savior)’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둑에 서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손을 내 밀어주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그의 손을 잡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한 발은 땅에 딛고 있으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루이스의 이 말이 참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발이 모두 물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한 분만이 물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7:14). 또 이사야 9:6에는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의 아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태복음 1:21-23)
모든 말씀들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은 영원히 평화가 이어지는 세상이라고요. 그는 절망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요.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런 꿈을 가지고 메시아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녀가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She talked about the child to everyone who had been waiting expectantly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
2,000년 전에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의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둠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뀌고, 절망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의 기도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또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선교사는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믿음생활은 오로지 자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에 대한 꿈과 열정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대강절에 희망과 평화의 촛불이 켜진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기대를 지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꿈과 열정의 회복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시간들까지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