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2020 | 대강절 셋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6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라 (Go, Tell The People What You Have Heard And Seen)
김태환 목사
마태복음 11:1-11
1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마치시고,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2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3 요한은 그들을 통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5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여라. 6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7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 모인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느냐?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갔느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갔느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9 그러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예언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10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라, 내가 너보다 앞서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는 너의 길을 준비할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그 누구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 (쉬운성경)
1 When Jesus had finished giving these instructions to his twelve disciples, he went out to teach and preach in towns throughout the region. 2 John the Baptist, who was in prison, heard about all the things the Messiah was doing. So he sent his disciples to ask Jesus, 3 "Are you the Messiah we've been expecting①, or should we keep looking for someone else?" / ①Greek Are you the one who is coming? 4 Jesus told them, "Go back to John and tell him what you have heard and seen? 5 the blind see,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to life, and the Good News is being preached to the poor. 6 And tell him, `God blesses those who do not turn away because of me①.'" / ①Or who are not offended by me 7 As John's disciples were leaving, Jesus began talking about him to the crowds. "What kind of man did you go into the wilderness to see? Was he a weak reed, swayed by every breath of wind? 8 Or were you expecting to see a man dressed in expensive clothes? No, people with expensive clothes live in palaces. 9 Were you looking for a prophet? Yes, and he is more than a prophet. 10 John is the man to whom the Scriptures refer when they say, `Look, I am sending my messenger ahead of you, and he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① / ①Mal 3.1 11 "I tell you the truth, of all who have ever lived, none is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even the least person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is!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희망의 촛불과 평화의 촛불에 이어 오늘은 기쁨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이 없고, 평화가 없고, 기쁨을 없던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으로 말미암아 희망과 평화와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사랑의 촛불을 켭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We know what real love is because Jesus gave up his life for us. So we also ought to give up our lives for our brothers and sisters).” (요한일서 3:16)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참 사랑을 안 사람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마치시고,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생생하게 그 때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시(指示)’라는 말씀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역성경들을 보면 ‘지시’ ‘명령’ ‘분부’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두 위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Jesus had finished giving these instructions to his twelve disciples”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이런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제자들을 교육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선생님은 오직 한 분이고,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데, 하늘에 계시다. 너희는 ‘지도자’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시다.” (마태복음 23:8-10)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지도자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선생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불릴 사람도 없고, 지도자라고 불릴 사람들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같은 동일선상(同一線上)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must have the same attitude that Christ Jesus had.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제가 처음으로 NLT 성경을 읽고 놀랐던 것이 ‘as something to cling to (뭔가 거기에 집착할 것으로)’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난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는 교만한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시를 받고, 모욕을 받을 때도 “난 하나님의 아들인데, 감히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겸손’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신 그 시간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인지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가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6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심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그렇게 물어보라고 한 것은 확인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확인이 필요했던 이유는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그려왔던 메시아 상과 너무 달랐습니다.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용사의 모습으로 오실 메시아를 꿈꿔왔는데, 막상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겠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시대가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귀로 들었습니다)” 라고 너희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회복(restoration’입니다. 원래 자리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희년(禧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년’은 50년째 되는 해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제도입니다. 종은 자유인으로 돌아가고, 땅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이 ‘희년’을 ‘Jubilee (기쁨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4:19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NIV)”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가 곧 ‘희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1)”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들 듣고 나사렛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의 권위에 한 번 놀랐고, 그의 설교의 내용에 두 번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삶이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참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는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소경,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봉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심청이의 아버지 이름이 심봉사 아닙니까? 판소리 심청전의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심황후 거동 보아라. 이 말이 지듯 말 듯 산호주렴을 거들 처 버리고 버선 발로 우루루루루 부친의 목을 안고 아이고 아버지, 심봉사 깜짝 놀라 아버지라니 누구요. 아이고,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우금 삼년인디, 이것이 웬 말이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인당수 풍낭 중에 빠져 죽던 청이가, 살아서 여기 왔소. 어서 어서 눈을 떠서 소녀를 보옵소서. 심봉사가 이 말을 듣더니 어쩔 줄을 모르난디, 에이 내 딸이라니. 아니 내 딸이라니. 내가 죽어 수궁천지를 들어 왔는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 참말이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 인고.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제. 아이고 갑갑하여라. 어디 내 딸이면 좀 보자. 눈을 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허더니 만은, 그저 두 눈을 번쩍 딱 떴던가 보더라. 옳지 인제 알것구나. 내가 분명 알것구나. 내가 눈이 어두워서 내 딸을 보지 못했으나 갑자사월 초파일날 꿈속에 보던 얼굴 분명헌 내 딸이라. 죽은 딸을 다시 보니 인도 환생을 허여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과 생시 분별을 못허것네. 어제까지만 해도 맹인이 되여 지팽이를 집고 다니면 어데로 갈 줄 아느랴. 올 줄을 아느랴. 오늘부터는 새 세상이 되었으니, 지팽이 너도 고생 많이 허였구나. 너갈데로 잘 가거라. 피루루루 내던지고, 얼시구나, 절시구나, 좋구나, 지화자 자자자 좋을시고.”
심봉사가 눈을 떠서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본 것이 이렇게 기쁜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전에는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알았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까?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알았습니까? 사명을 알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비로소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회복의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에 희망이 생기고,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을 알게 되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기쁨과 감사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데비 분 (Debby Boone, 1956-현재)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데비 분은 ‘You Light Up My Life (내 삶을 밝혀 준 당신)’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이 노래로 빌보드 차트에 10주 동안 #1 자리를 지켰습니다. 400만 장이 넘는 앨범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8년에 Grammy Awards ‘The Best New Artist’ 상을 받았습니다.
So many nights I'd sit by my window (수많은 밤을 창가에서 기다렸어요)
Waiting for someone to sing me his song (그의 노래를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So many dreams I kept deep inside me (내 안 깊은 곳에 두었던 수많은 꿈이 있었죠)
Alone in the dark but now you've come along (홀로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 당신이 내게 왔어요)
And you light up my life (그리고 내 삶을 밝혀주었어요)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나에게 간직할 희망을 주었죠)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당신은 나의 낮을 밝혀주고,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매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가사입니다. 데비 분은 지금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현역 가수로 활발하게 공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Episcopal Church의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데비 분의 삶에 불을 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불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삶을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요한을 그렇게 칭찬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돌 듯이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요. 그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He came right out and said, ‘I am not the Messiah.’” (요한복음 1:20, 3:28)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많이 소유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되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인지, 그를 알고 난 후에 내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희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대강절 촛불이 환하게 켜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