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새로운 사람으로 (To Live As A New Person)
김태환 목사
고린도후서 5: 14-20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 여러분을 권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쉬운성경)
14 Either way, Christ’s love controls us①. Since we believe that Christ died for all, we also believe that we have all died to our old life. 15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ose who receive his new life will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Instead, they will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them. 16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17 This means that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18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who brought us back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19 For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 longer counting people’s sins against them. And he gave us this wonderful message of reconciliation. 20 So we are Christ’s ambassadors; God is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speak for Christ when we plead, “Come back to God!”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쪽에서부터 구름이 이는 것을 볼 때, 비가 곧 오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너희가 남풍이 부는 것을 보고 날이 덥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누가복음 12:54-56에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왜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본래 ‘위선자’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대에 올라간 연극 배우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대로 연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날씨를 분별하는 것처럼 너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을 텐데, 마치 시대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는 위기(危機)의 시대였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괜찮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조국이 멸망하는,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여 있는 때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를 몸으로 느끼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왜 날씨는 잘 분별하면서 위기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는 보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이 시대를 올바로 분별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누구인지 올바로 파악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AI와 테크놀로지가 발달해도 그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AI와 테크놀로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AI와 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이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하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발 하라리 같은 무신론자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변화의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코로나 이후의 시대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교회들이 구습(舊習)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새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시대를 책임질 수 없는 낙오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창조’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왜 여기서 ‘새로운 사람’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살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나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그 시대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엄청난 계획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제 역사는 예수님 이전의 역사와 예수님 이후의 역사로 구분될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중대한 질문 앞에서 바울은 ‘새로운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우리는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이후의 시대는 문명사적(文明史的)인 전환(轉換)을 가져오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이 변화의 시대를 잘 이해한 사람은 이 시대를 책임 있게,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청년들은 시대를 진단하는 전문가들의 책들을 사서 읽고, 그들이 분석하는 말들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2,000년 전에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inspiration)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말씀과 다른 이유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세상은 바뀌어도 하나님(예수님)은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올 미래에도 똑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세상에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훈련을 꾸준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의 순서와 관계없이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관점(point of view)을 가진 사람입니다(16절).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사물을 보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거기에 대처해 왔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관점을 버리고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점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하면 새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paradigm shift(패러다임 전환)’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틀(a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마태복음 9:17)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를 새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엄청난 변화와 팽창력을 가진 시대를 마주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낡은 주머니에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새 주머니에 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인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변화의 시대를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시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전문가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대를 방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새로운 사람’은 이전의 것들을 완전히 버리는 사람입니다(17절).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알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새로운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이전의 것들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 사람입니다. ‘A new person is in him the old life has gone and a new life has begun(새로운 사람은 그의 안에서 예전의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asy-to-Read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hen anyone is in Christ, it is a whole new world. The old things are gone; suddenly, everything is new(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갑자기 이전의 것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아주 멋진 번역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새로워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얼마 안 가서 우리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예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옛날 중국 은(殷)나라의 탕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수 대야에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고 새겨 놓고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탕 임금은 그렇게 해서 30년 재위 기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만, 그렇게 해서 정말 얼마나 인간이 새로워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목욕을 하고 세수를 하면 몸은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몸이 깨끗해지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거든요.
성경은 새로워지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다(17절)”고 합니다. 우리 속에는 새롭게 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힘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가 진실을 말한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are born again①, you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①Or born from above).” (요한복음 3:3)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born again’이라는 말에 ‘born from above’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새로워지는 일에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believe in Jesus)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belong to Jesus)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under the reign of Jesus)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실천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안전한지, 얼마나 만족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본회퍼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를 따르라는 말은 부름을 받았으니 지금까지의 삶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낡은 것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에서 떠나 불안정한 생활로(사실은 절대적으로 안정된 삶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전망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생활(실제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사실은 유일하게 예측이 가능한) 생활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성경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 본회퍼의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살아봐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영어 표현에 ‘take a risk’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지요? 믿음생활은 위험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람’은 삶의 메시지가 있는 사람입니다(18-20절).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된 사람에게 ‘wonderful message’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오라(Come back to God)(20절)”는 화목의 메시지입니다. ‘화목(和睦))’이라는 말은 ‘reconciliation’이란 말입니다. ‘conciliation’이라는 말에 이미 ‘화목’이라는 뜻이거든요? 앞에 ‘re-‘가 붙으면 ‘다시 화목하라(to make friendly again)’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원래 관계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새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사명(使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