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6)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4) (To Live As Influential People For Good)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0:42-45
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쉬운성경)
42 So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e rulers in this world lord it over their people, and officials flaunt their authority over those under them. 43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44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5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얼마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가 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는가?”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네로(54-68년), 도미티아누스(81-96년), 트라야누스(98-117년), 하드리아누스(117-13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데키우스(249-251년), 발레리아누스(253-260년), 이렇게 기독교는 로마에서 200년 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瞑想錄, Meditations)’을 남긴 황제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글을 쓴 지혜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잔인하게 크리스천들을 박해할 수 있을까요? 그는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시체를 치우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306-337년) 황제 때 와서 기독교를 공인(公認)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하게 된 것은 서기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년) 황제 때입니다. 그의 이름에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저의 관심은 이렇게 200년이 넘게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습니다. 로마의 다신론에 대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자기 통치 기반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모진 박해 상황에서도 세력이 꺾이지 않았던 기독교에 대해 날로 세력이 쇠퇴해 가는 로마가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들 가운데 알란 클라이더(Alan Kreider, 1941-2017)라는 신학자의 주장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크리스천들의 사랑의 실천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 당시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복음 전파가 행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호소력을 가지고 넓은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크리스천들의 삶의 모범과 사랑의 실천이 로마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이미 로마의 지배층 중에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로마 귀족들이 집에 하인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인 중에 크리스천들이 많았습니다. 귀족들은 크리스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정신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로마서에 나오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18, 21)”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사랑으로,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섬기기 위한 것(to serve others)’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높아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높아지는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높아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정말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진정으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 ‘종’이라는 말은 ‘διάκονος(다이아코노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서번트(servant)’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δοῦλος(둘로스)’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슬레이브(slave)’라고 번역합니다. ‘서번트’ 보다는 ‘슬레이브’가 훨씬 더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모두 ‘종’으로 번역했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는 ‘다이아코노스’라는 말을 사용하셨고, 다른 하나는 ‘둘로스’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한동안 리더십에 대한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리더십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리더십 형태인데, 강력한 힘으로 조직을 끌고 가는 형태입니다. 둘째는, 민주적인 리더십입니다. 리더가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고, 조직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조직원들의 의견들을 청취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리더십 형태입니다. 셋째로, 앞의 두 가지 리더십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섬기는 리더십(servant style leadership)’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리더십 형태입니다. 회사들이 뒤늦게 이런 리더십을 적용해 보려고 하지만 이게 잘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리더십 형태만 배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알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리더십 형태만 배워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 희생을 동반(同伴)합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책상에 앉아 머리 속으로 섬김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 놓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는 말은 속죄를 받기 위해 대신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랜섬(ransom)’이라고 합니다. ‘몸값’ 혹은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놓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섬김과 겸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섬김이 있을 수 없고, 섬김이 없는 겸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자기의 권리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목숨, 자기 생명이 소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 생명에 대해서 누구도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놓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무도 나에게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No one can take my life from me. I sacrifice it voluntarily).” (요한복음 10:18) 내 스스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써 겸손과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모두 닦아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13:12-17)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종들은 언제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주인이 볼 때만 열심히 일하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주인을 섬기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 (골로새서 3:22-23)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그런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에 대한 말씀을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실험실에서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는 탁월한 예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을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위선적으로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이 볼 때만 하는 척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은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요한복음 7:38 말씀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섬김이 나를 통로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 우리의 겸손과 섬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는 지금 이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면서 이 질문에 응답하는 설교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이 어렵고, 대답을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대답을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을 하면서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함으로써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실천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정말 이 사실이 믿어집니까? 우리 앞에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호모 데우스(Home Deus)’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한 시대입니다. 앞으로 AI가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관계하고,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지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AI가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호모 데우스’의 시대를 파멸과 불행해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시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그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1세기의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살아서 로마제국을 정복했고, 그렇게 살아서 사랑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시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 때는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쓴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 이 책을 가지고 새벽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Is it excessive to say that rivers will flow out of one individual believer? Do you look at yourself and say, ‘But I don’t see the rivers?’ Through the history of God’s work you will usually find that He has started with the obscure, the unknown, the ignored, but those who have been steadfastly true to Jesus Christ(한 개인으로부터 강물이 흘러나온다고 말하는 것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나에게는 강물이 보이지도 않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무명의 사람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 충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너무 작아 보이는 일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