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2021 | 고난주간 메시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Following In His Steps)
김태환 목사
베드로전서 2:21-25
21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22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 23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25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을 살피시는 목자와 보호자의 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쉬운성경)
21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22 He never sinned, nor ever deceived anyone.① / ①Isa 53.9 23 He did not retaliate when he was insulted, nor threaten revenge when he suffered. He left his case in the hands of God, who always judges fairly. 24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25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 (New Living Translation)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일년이 넘도록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지내오다 보니, 어느 새 고난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되네요.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어서 그런지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가 더 새롭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한 때를 서기 64-68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네로가 로마에 화재를 일으키고 그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려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던 때가 서기 64년 7월이었거든요? 크리스천들은 고난과 박해 속에 있었습니다. 언제 로마의 군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하고 희망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몇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욕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덟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길을 읽어버린 양들을 보살피는 영혼의 목자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죄가 없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을까?”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온 것이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을 살리는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마가복음 10:45) 이 말씀에 나오는 ‘대속물’이라는 말은 ‘램섬(ransom)’이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몸값’이라는 뜻입니다. 인질범들이 아이를 납치하고 ‘몸값’을 요구합니다. 아이의 ‘몸값’이 얼마인데, 그 돈을 가져오면 아이를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성경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 대신 목숨 값을 치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한 사람의 생명으로 모든 사람의 죄값을 치룰 수 있는가?” 예수님의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죄의 값을 충분히 치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거든요?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 치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9)” “And the ransom he paid was not mere gold or silver. It was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모두 하나님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으로 옮긴 자작극(自作劇)입니다. 하나님께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속성(屬性, attributions) 중에 사랑과 용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와 심판이 있습니다. 이 두 속성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시에 불의를 미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정의의 하나님이시거든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어도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24). 여기서 바울은 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 없는 자기 아들을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게 함으로써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도 충족되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도 충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딜레마가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된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는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 말의 그리스어 원문은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t is finished.” 혹은 “Paid in full(값을 모두 지불했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랜섬’ ‘대속물’ ‘몸값’으로 모두 지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고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두 실현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딜레마가 단번에 해결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읽어 보세요. 성경에 이런 딱딱한 교리적인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 5:8)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로마서 5:5)”고도 했습니다. 또한 제자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요한일서 3:16)” 라고 썼습니다.
‘찬송가의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작곡가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 영국)는 십자가에 대한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 찬송시로 만든 찬송가가 151장입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그의 찬송시 한 구절 한 구절에 십자가에 대한 그의 믿음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큰 빚을 졌습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자고 한 것입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여행을 하면서 갈릴리 해변을 혼자서 많이 걸었습니다.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많이 걸으셨을 텐데, 어딘가 예수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여러분이 듣기에는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때 저는 매우 진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발자취(steps)’를 이 땅에 남겼을까요?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고난 받는 삶의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영어에 ‘on behalf of’라는 말이 있고 ‘vicarious’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누구를 대신하여’ 또 ‘누구를 대신하여 받는’이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때로부터 500여년 전에 벌써 이런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4-6) 신학자들은 이 사람에 대하여 ‘고난 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이 사람은 고난 받는 자기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고난 받는 종’이 우리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이미 500여전 전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은 덕분에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By his wounds we are healed).”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남기신 이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어느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마가복음 2:5)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보통은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치료를 해 주시는데, 이 경우는 병자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Jesus seeing their faith)’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중풍병에 걸려 고생하는 병자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집의 지붕을 뜯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사람들입니다. 친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이 친구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문제, 누구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때,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높게 평가하십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믿음생활의 최대의 적은 ‘이기주의’입니다. 생각하는 것들이 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너도 나도 다 그렇습니다. 나만 잘되면 되고, 우리 집만 잘되면 되고,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누구든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돌아서야 내 제자가 될 수 있고 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의를 위한 삶의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4).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면 우리는 의를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3) 여러분, 이 말씀을 형식적인 말씀으로 듣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발자취를 따라 우리의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간혹이라도 올바로 살아야 하겠다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까? 뉴스에 나오는 흉악한 사고나 비인간적인 기사들을 보면서 “나는 올바로 살아야지!” 이런 반성을 하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 말씀 21절을 보십시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비록 고난을 받을지라도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나의 삶이 죄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고, 의를 행하는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결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세상을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때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우리 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