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2021 |
부활절이 지나고(1) (After Jesus’ Resurrection)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20:1-10
1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갔습니다. 날은 아직 어두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입구를 막았던 커다란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2 그래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빼갔나 봐요.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가져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3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무덤 쪽으로 향했습니다. 4 두 사람 모두 달려갔습니다.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5 그 제자는 몸을 굽혀 고운 베가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지만,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6 뒤따라온 시몬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 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고운 베가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7 그는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천도 보았습니다. 그 천은 고운 베와 겹쳐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8 그제서야 무덤에 먼저 왔던 다른 제자도 무덤 안으로 들어와 보고 믿었습니다. 9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10 그리고서 두 제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쉬운성경)
1 Early on Sunday morning①, while it was still dark, Mary Magdalene came to the tomb and found that the stone had been rolled away from the entrance. / ①Greek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2 She ran and found Simon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the one whom Jesus loved. She said, "They have taken the Lord's body out of the tomb, and we don't know where they have put him!" 3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started out for the tomb. 4 They were both running,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reached the tomb first. 5 He stooped and looked in and saw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but he didn't go in. 6 Then Simon Peter arrived and went inside. He also noticed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7 while the cloth that had covered Jesus' head was folded up and lying apart from the other wrappings. 8 Then the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 and he saw and believed? 9 for until then they still hadn't understood the Scriptures that said Jesus must rise from the dead. 10 Then they went home. (New Living Translation)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일제히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으로 기록했지만, 마태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태복음 28:1)’라고 했고,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마가복음 16:1)’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누가복음 23:55)’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시간은 ‘새벽(dawn)’ 혹은 ‘매우 일찍이 해가 돋을 때(very early in the morning)’였습니다. 마태는 이 때를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라고 기록했습니다. NLT 성경은 이 말씀을 ‘Early on Sunday morning, as the new day was dawn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부활에 대한 마태의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마치 새날이 동터 오는 것처럼, 그의 인생에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새 날’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와는 단절된, 전혀 다른 삶이 그의 앞에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넌센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도 안 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부활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둥, 여자들이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엉뚱한 무덤을 찾아간 것이라는 둥, 예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는 둥,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라는 설들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들을 일축(一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공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10-12) 전에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공의회(산헤드린)와 같은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우리가 믿는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이 여자들이 이렇게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을 보면, 이 여자들이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멀리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안식일이 지나 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여자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릴 ‘향품(burial spices)’이 들려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향품을 발라주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여자들이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 혼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요? 그 시간에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막달라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참 불행했던 여자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평소에는 사람들이 막달라라고 불렀습습니다. 성경에 보면 막달라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고 합니다(누가복음 8:2). 그만큼 막달라의 증세가 아주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 이후 막달라는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 이른 새벽에 혼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가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막달라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무서움을 이기고도 남았습니다. 막달라는 이 사랑의 힘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자들에게 유일한 걱정거리는 “무덤의 문을 막아 놓은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줄까(마가복음 16:3)?”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2)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서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4).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진 것을 본 막달라는 뭔가 일이 생긴 것을 알고 곧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가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다른 곳으로 빼간 것 같아요.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어요(2-3절)” 하고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는 급히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유진 버낸드(Eugène Burnand, 1850-1021, 스위스)가 그린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tomb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1898’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두 제자의 얼굴을 보십시오. 얼굴에 고통과 안도, 슬픔과 놀람, 절망과 경이의 상반된 감정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앞을 향해 곧바로 고정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덤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두 제자가 달려가서 본 무덤은 막달라가 말한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무덤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고운 베(the linen wrappings)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얇은 천입니다. 그리고 한 쪽에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이, 쉬운 성경에는 “잘 개켜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개역성경 개정판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7절) “while the cloth that had covered Jesus' head was folded up and lying apart from the other wrappings.” (NLT) “The [burial] face-cloth which had been on Jesu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Amplified Bible) 번역하면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은 동그랗게 감아 올린 상태로 한 곳에 놓여 있었다” 이런 뜻입니다. 머리를 감쌌던 천은 신기하게도 동그랗게 머리만 빠져나간 상태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무덤 안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사실을 영영 모를 뻔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무덤 안을 살펴본 제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했는데요. 우리는 그 제자가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 두 제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9-10절) 만일 이 때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반드시 부활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믿었다면 예사롭지 않은 무덤 안의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무덤 안에서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때는 두 제자가 무덤 안에서 본 것들을 그리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약 60년이 지난 때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때 무덤 안에서 보았던 기이한 장면들을 기억하고 비교적 상세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아, 맞구나! 그래서 그 때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들이 동그랗게 그런 모양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구나!”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쓴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사순절 새벽 기도 때 소개했던 말씀입니다. “부활은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역사에 기록된 어떤 사건보다 더 철저하게 증명된 사실입니다(The resurrec-tion is a fact better attested than any event recorded in any history, whether ancient or modern).” 팀 켈러(Timothy Keller, 1950-) 목사님의 말을 한번 들어 볼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면 당신은 그가 하신 모든 말씀들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슨 말을 했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걸려있는 중요한 이슈는 당신이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부활하셨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If Jesus rose from the dead, then you have to accept all that he said; if he didn’t rise from the dead, then why worry about any of what he said? The issue on which everything hangs is not whether or not you like his teaching but whether or not he rose from the dead).” 팀 켈러 목사님은 뉴욕에 있는 ‘리디머 교회(Redeemer Church)’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요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님 중 한 분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에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목적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기고 목적이 생깁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도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교회에 나와서 성경공부하고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말한대로 부활이 없고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이 난다면 “그냥 먹고 마시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자(고린도전서 15:32)” 이런 식의 삶의 태도가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질문들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지금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가치 있는 일, 옳은 일,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가요? ‘선한 싸움’이 아니라면 싸울 가치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한 삶을 레이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곁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가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 아닙니까?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바울의 권면을 함께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