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2021 |
부활절이 지나고(3) (After Jesus’ Resurrection)
김태환 목사
요한복음 20:24-29
24 열 두 제자 중에서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있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26 일 주일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그 집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7 그리고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8 도마는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쉬운성경)
24 One of the twelve disciples, Thomas (nicknamed the Twin)①, was not with the others when Jesus came. / ①Greek Thomas, who was called Didymus 25 They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replied, "I won't believe it unless I see the nail wounds in his hands, put my fingers into them, and place my hand into the wound in his side." 26 Eight days later the disciples were together again, and this time Thomas was with them. The doors were locked; but suddenly, as before, Jesus was standing among them. "Peace be with you," he said. 27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and look at my hands. Put your hand into the wound in my side. Don't be faithless any longer. Believe!" 28 "My Lord and my God!" Thomas exclaimed. 29 Then Jesus told him, "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New Living Translation)
여러분,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적어도 약 20년 간 ‘구전(口傳)’으로 전해졌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구전이 아니라 여러 개의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아리랑’에 대한 역사를 찾아봤습니다. “우리 민족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은 처음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출발하여 산길과 강줄기를 따라 메나리조의 노래로 형성, 확산되어 오는 과정에서 각 시대마다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 전국적으로 다양하며, 중국이나 일본, 카자흐스탄 등 해외에서 만들어진 아리랑도 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성경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쓰려고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 즉 말씀의 종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존귀하신 데오빌로 각하, 저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였으므로, 이 일을 각하께 차례대로 기록하여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미 배우신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any people have set out to write accounts about the event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They used the eyewitness reports circulating among us from the early disciples. Having carefully investigated everything from the beginning, I also have decided to write a careful account for you, most honorable Theophilus, so you can be certain of the truth of everything you were taught.”
누가가 그의 복음서를 쓴 것은 서기 60년대 초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직업은 의사였고(골로새서 4:14), 바울의 동역자로서(빌레몬 1:24) 바울의 주치의 역할을 합니다. 누가가 예수님을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1년 동안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던 바울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만난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자신의 관점에 따라 편집한 것이 ‘누가복음’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 말씀은 ‘같은 날 저녁에(That Sunday evening, 요한복음 20:19)’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부활하신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꼭 잠그고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미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내가 주님을 보았어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nonsense)라고 무시해 버리고(누가복음 24:11),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서야 여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누가복음 24:5-8) 여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꼭 그렇거든요?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적인 상황들이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절망감 때문에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What consumes your mind controls your life(당신의 마음을 삼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합니다).” “We have to pray with our eyes on God, not on the problems(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여자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문을 잠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상관없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Peace be with you)!”
우리 모두에게 평안의 인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고 있거든요? 1년 후, 2년 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청년들은 청년들 대로, 나이든 사람들은 또 나이든 사람들 대로,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가 아닌 다른 평화를 준다고 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주는 평화를 소유한 사람들은 충분히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충분히 그런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이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이거든요. 이 말씀이 이사야 9:6에 나오는데요.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은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 영국)이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요. 이 목사님의 별명이 ‘설교의 왕자(the prince of preachers)’였습니다. 청교도 신학에 뿌리를 둔 스펄전 목사님은 전통적인 교리를 생동감 있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설교 시간마다 감동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스펄전 목사님의 별명이 ‘설교의 왕자’였습니다. 설교를 제일 잘하시는 목사님, 설교하면 찰스 스펄전, 이런 뜻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평화의 왕자(the Prince of Peace)’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평화의 권위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Doug Hershey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According to Jesus, what the Lord is freely giving His followers is different than what you can find on our own in the world. This is a true peace that empowers us to be all that we were designed to be – fully and completely. It is a gift from the Creator Himself to those who follow Him(예수님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평화는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창조된 모습대로 우리를 온전하게 세워주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샬롬)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샬롬’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이런 축복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마태복음 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평화를 창조하는 ‘peacemakers’가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자 제자들은 무척 기뻐했다고 썼습니다(요한복음 20:20). 그런데, 그 자리에 제자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요한복음 20:25)”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도마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사람들은 쉽게 도마를 가리켜 ‘의심장이 도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도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해야 믿습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으로부터 시작해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와 데이비스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을 통해서 발전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백지(Tabula rasa)’와 같은데, 경험을 통하여 백지에 그림이 그려지듯이 지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주의 철학을 교육이론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유명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미국)입니다.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 1916)’ ‘경험과 교육(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1934)’ 등 많은 명 저서를 남겼습니다.
꼭 이런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더라도, 부활이라는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일주일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에 오셨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도마,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7절)
도마는 정말 예수님의 말 대로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을 찔러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나 있는 창자국을 만져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후에 이런 글을 남깁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3)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 제자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는데, 여러분들도 우리와 같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경험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경험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경험이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깨닫게 되는 진리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29절) 우리 믿음생활에서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도마처럼 보고, 만져보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많은 부활의 증인들(a great cloud of witnesses, 히브리서 12:1)’이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다음 세대를 위해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